작지만 위대한 일들
조디 피코 지음, 노진선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12월
평점 :
품절


 

2018년에 들인 책들을 아직 다 읽지 못했다. 둘째 곰돌군이 잠든 시간과 첫째 곰돌군이 어린이집에 간 사이 짬짬히 읽는다고 해도 끝이 없는 집안일에, 먹고 치우는 일조차도 꽤 시간이 걸린다. 하원 후 아기들이 잠들기 전까지는 정말 쓰나미가 밀려오듯 정신이 없다.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그 기본적이고도 일상적인 일들이 사실은 굉장히 큰 일이라는 것을 아이들을 돌보면서 알게 되었다. 아기들이 잠들면 조용히 안방을 빠져나와 소파에 털썩, 시계를 보면 어느 새 밤 11시가 다 되어간다. 멍한 상태로 있다가 책이라도 읽어보려고 하면 몰려오는 졸음이란. 이런 와중에 이 [작지만 위대한 일들]은 나의 잠들을 포기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보통 그 해에 맞이한 책들은 언제 읽든 그 해의 리뷰로 표기하고는 하는데 이 작품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느 해의 마지막으로 읽은 작품이 아니라, 새로운 해의 시작으로 표기하고 싶었던 이유는, 내가 조디 피코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고, 이번 작품 역시 지금까지의 작품만큼이나 강렬하고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20년 넘게 한 병원 분만실에서 근무한 루스 제퍼슨. 그녀는 흑인이지만 뉴욕주립대학과 예일간호대학원을 졸업한 재원이자, 베테랑인데다 유능하고 책임감 또한 강한 간호사다. 어느 날 한 아기의 건강검진을 마치자마자 극렬한 백인우월자인 아기의 부모로부터 자신들의 아기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돌보지 않게 해달라'는 요구를 듣게 된다.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루스는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고, 이튿날 포경수술을 마친 그들의 아기와 우연히 단 둘이 남겨진 상황. 아기는 갑작스러운 호흡곤란을 겪다 사망하고 말았다. 아기의 부모로부터 고소를 당하고 새벽에 경찰에 끌려간 루스. 열일곱 아들 에디슨만이 걱정인 가운데 그녀 앞에 국선변호사인 케네디가 나타나고, 케네디는 루스에게 법정에서 인종 문제를 들먹일 수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누가봐도 명백한 인종차별. 오랜 세월 내면의 자신을 억눌러온채 평범하고 안정된 삶을 살고자 한 루스에게 닥친 인생 최대의 위기. 법정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루스와 인종 문제를 내세울 수 없다는 케네디의 대립으로 서로간의 불신이 쌓여가는 가운데 마침내 재판이 시작된다.

 

병에 걸린 언니를 살리기 위한 '도구'로 태어난 소녀가 부모를 고소하는 이야기를 그린 [마이 시스터즈 키퍼], 한 고교에서 벌어진 총기난사사건을 풀어낸 [19분], 자폐를 앓는 남자가 사건에 휘말리는 소설 [그림자 규칙]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잊지못할 소재로 독자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조디 피코가, 이번에는 예민하고도 어려운 문제인 인종차별 문제를 소설 속에 녹여냈다. 누구보다 뛰어난 간호사임에도 불구하고 루스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받는 부당한 해고조치와 고소, 재판의 과정들에 나 또한 억울했다. 어떤 사회 속에서 자행되는 공공연한 차별과 멸시와 조롱.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견뎌가며 살아가는 걸까. 그러나 순간, 나도 백인우월주의자들에 대해 이렇게 분노하고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거리에서 흑인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흠칫하지는 않았는지, 지하철에서 자리에 앉아있는 흑인 옆에 감히 다가갈 생각도 못해 본 것은 아닌지.

그 때만 화난 게 아니에요. 지금도 화나요.

난 오랫동안 화가 나 있었어요.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죠.

당신은 몰라요.

난 1년 365일을 너무 흑인처럼 보이거나 너무 흑인처럼 말하지 않으려고 애썼고,

그래서 연기를 했어요.

가면을 쓰듯 늘 억지 미소를 지었죠.

지겨워요. 아주 지긋지긋해요. 하지만 그래도 했어요.

내게는 보석금이 없으니까요. 아들이 있으니까요.

가장 슬프고 수치스러운 사실은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딱한 삶을 살면서

나도 그 쇼를 믿었다는 거예요.

내가 그걸 다 해내면 당신들의 일원이 될 줄 알았어요.

p553

재판에서 루스가 증인으로 나서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안도하는 케네디와는 달리, 루스는 자신이 숨긴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자신의 내면에 꽁꽁 묶어둔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피를 토하듯 말한다.

당신은 자기가 국선 변호인이고,

도움이 필요한 유색 인종을 도와준다는 사실을 아주 자랑스러워하죠.

하지만 우리의 불행이 당신의 행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있어요?

편견은 쌍방향으로 작용해요.

편견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이 있으면,

이득을 보는 사람도 있는 법이죠.

p554

나는 감히 루스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내가 그녀로, 백인우월주의와 그로 인한 폭력이 만행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흑인이 아닌 이상 내가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나 또한 유색인종이고 백인들 사회에서는 그들에게 황인종이라 불리며 차별을 당하는 존재가 되겠지만 나는 피부색을 보지 않아요, 나는 인종을 차별하지 않아요 라는 말들조차 어떤 이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조디 피코는 그녀 자신이 백인임에도, 그래서 이 작품이 굉장히 민감한 사안이 될 수 있음에도, 이 소설은 자신과 같은 부류, 네오나치족을 금세 알아보고 그가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말하지만 정작 자기 안에 있는 인종 차별주의는 알아보지 못하는 백인들을 위해 썼다고 밝힌다. 단지 피부색에 바탕을 둔 차별이 아니라 누가 권력을 가졌는가에 관한 문제. 유색인종이 불이익을 받아 성공하기가 더 어렵듯이, 백인은 이익을 얻어 성공하기가 더 쉬운 사회에 대해서. 하지만 이 작품은 또한 우리를 위한 책이기도 하다. 같은 유색인임에도 또 다른 유색인을 비하하고 멸시하는 우리 안의 못난 모습들을 위한. 그리고 비단 인종차별 뿐만이 아닌 다른 수많은 차별에 대한 경각심을 울려줄 것이다.

 

죽은 아기를 잃은 깊은 슬픔과 분노에는 두말 할 나위없이 공감했다. 둘째 곰돌군을 낳기 전 겪은 한 번의 유산경험은 진정한 상실감이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엄청난 일이었다. 비록 9주밖에 되지 않은 아기였지만, 한 번 그 아이의 심장을 들은 이상 나는 그 심장 뛰는 소리, 심장이 들리지 않는 적막감, 어떤 물체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그 순간의 초음파 화면을 영원히 기억한다. 그런데 무사히 태어난 아기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다면 나 또한 분명히 병원을, 의사를, 간호사를 저주하고 또 저주하며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맹세했을 것이다. 죽은 아기의 부모들-커크와 브릿-의 아픔에 너무 마음 아팠지만 루스가 겪는, 그리고 겪었던 차별에 관한 고통이 굉장히 크게 다가와서 어느 정도는 그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아기가 소중하듯, 루스의 에디슨도 분명 소중한 아이이고 인간이므로.

 

재판이 끝이 아니다. 작가가 말하는 미래는 굉장히 극적이고 아름답다. 현실에서 과연 이렇게 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쩌면 책이므로 가능한 일이라고 누군가는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바로 그 책이므로, 어떤 이야기이므로 우리는 그 이야기에 위로받고 희망을 발견한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말 '만일 내가 위대한 일을 할 수 없다면, 작은 일을 위대하게는 할 수 있습니다'에서 가져왔다는 제목이 주는 울림이 거대하다. 2019년에 이 작품을 뛰어넘을 작품이 있을까 싶다. 그만큼 내게는 굉장히 인상적이었고 가슴에 깊이 다가왔다. 역시 조디 피코라는 찬사를 아낌없이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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