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버웨어 판타 빌리지
닐 게이먼 지음, 나중길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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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을 덮은 순간, 나는 다른 공간에서 빠져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조그마한 난쟁이 나라가 책 한 권에 입체적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그들보다 엄청나게 큰 내가 그들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내가 본 것은 글자가 아니라 책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인 숨겨진 세계의 신비로운 이야기. 

 런던의 증권맨 리처드는 약혼녀인 제시카와 길을 걷던 도중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한 소녀를 발견한다. 그녀의 이름은 Door, 도어. 런던의 지하세계에서 살아가는 그녀는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밴더마와 크루프라는 악당에게 쫓기고 있었다. (사실 밴더마와 크루프는 악당이라는 한 마디로 나타낼 수 없으나, 그들을 표현하기에는 엄청나게 잔인한 용어가 필요하므로 차마 여기에 쓸 수는 없었다) 리처드가 도어를 도와 준 후부터 그의 존재는 투명인간처럼 되어 버린다. 결국 지하세계로 도어를 찾으러 간 리처드는 , 가족이 살해당한 이유를 밝혀 복수를 꿈꾸는 도어와 그녀를 돕는 카라바스 후작, 경호원 헌터와 모험을 시작한다. 이상한 이동시장, 쥐대왕, 수도사들,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역과 지하터널, 거기에 천사까지 등장하는 와중에 이야기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우리를 이끈다.  

 닐 게이먼은 [스타더스트]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아직 국내에 익숙치 않은 작가이다. [스타더스트]를 처음 읽었을 때, 책 자체가 반짝거리는 듯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에 밤이 가는 줄 몰랐더랬다. 그런데 이 [네버웨어]는 [스타더스트]보다 몇 배는 더 재미있고, 신비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게다가 그의 표현력은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단해서(물론 번역의 힘일 수도 있다) 어떻게 이런 표현을 사용할 수 있는지 살짝 질투가 났다. 

 이야기 자체도 흥미진진하고, 구성에도 빈틈이 없지만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주인공이 변화하는 과정이었다.  그냥 회사에 다니고 약혼녀와의 결혼을 꿈꾸는 리처드는 처음에 우리 주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도어를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지하세계로 굴러떨어졌을 때도, 그는 그저 -내가 저 상황이었어도 저랬을거야-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그저 그런 캐릭터였다. 그런 그가 도어 일행과 여행을 하면서 변하기 시작한다. 자기에게 주어진 과제를 수행한 후부터 그의 마음 속에서 용기가 생기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사건 해결에 커다란 역할을 하면서  리처드는 성장해간다. 게다가 마지막에 그가 선택한 삶은 우리 모두에게 충분히 교훈을 줄 수 있을만한 것이었다. 

 -저는 멋지고 지극히 정상적인 생활을 원했습니다. 제가 머리가 이상한 놈인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이 지상의 삶이 전부라면 이대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화를 두려워한다. 나부터도. 평화롭고 안락한 생활을 계획하지만, 그  계획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때 느끼는 불안감에 정신이 멍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이룬 것이 우리가 진정 원한 것이 아니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아마 다른 길을 모색하기보다 포기하고 원하지 않은 삶을 사는 쪽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용기를 가지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한다. 리처드가 선택한 것처럼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라고. 그것이야말로 성장이고, 진정한 삶이라고.

 신비로운 동화같은 소재에 별가루같은 사랑, 마치 자신이 뛰어다니고 있는 듯한 숨막히는 스릴에 교훈까지 얹어주는 이 작품에 나는 완전히 닐 게이먼의 팬이 되어버렸다. 앞으로도 그의 작품이 나오기를 무척 고대할 것 같다. 나처럼 그의 이야기에 빠져버린 사람들에게, 책 뒤쪽에 실린 그의 인터뷰는 의미있는 선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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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가쿠타 미쓰요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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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책은 내 가장 친한 친구였으며, 지금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자칭타칭 밝은 성격임에도, 나의 내부에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상처받기 싫어하고 복잡하게 섥히고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는 인간관계를  두려워하는 또 하나의 내가, 나만 아는 곳에 숨어 있다. 다른 사람을 마주 대할 때의 약간의 포장과 위선은 인간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치다.  나의 진정한 모습을 온전히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으므로. 때문에 그러한 장치없이 스스럼없이 다가갈 수 있고, 나에게 어떤 해악을 끼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책은 무척 소중한 존재다.  표지에서 의자에 앉아 햇빛을 받으며 책을 읽고 있는 소녀는, 바로 나다.

 가쿠타 미쓰요의 소설을 접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나오키 상을 수상한 작품 [죽이러 갑니다]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제목이 너무나 자극적인 탓에 왠지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작가였다. 하지만 이 책은 제목부터가  내가 나의 분신이라 칭해 마지않는 <책>을 주제로 하고 있고, 띠지에 박힌 -모든 책에는 그 사람만을 위한 존재 이유가 있다-는 문구가 무척 마음에 들어 단번에 읽어버렸다.

이 책은 모두 9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헌책방에 팔아버린 책을 여행지에서 다시 찾게 되고, 그 곳에서 또 판 책을 또 다른 여행지에서 만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 <여행하는 책>, 여행지에서 병으로 앓아누워있을 때 읽은 책으로 책의 주인을 상상하는 <누군가>,  애인과 싸우고 홀로 떠난 여행지에서 발견하게 된 편지에 대한 이야기 <편지>,  동거하던 애인과 헤어지고 이사를 하기 위해 책장을 정리하면서 그려지는 <그와 나의 책장>,  책이 불행의 편지처럼 그려지는 <불행의 씨앗> , 전설의 책을 찾아헤매는 이야기 <서랍 속>,  작가가 된 주인공이 어린시절 추억의 책방에서 책을 훔친 사실을 사죄하러 가는 <미쓰자와 서점>, 병상에 누운 할머니를 위해 오래된 책을 찾아헤매는 <찾아야 하는 것>,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 대신 소중한 책을 선물하는 <첫 밸런타인데이>까지.

처음에는 좀 밋밋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금방 책 속 이야기에 빨려든다. 이야기는 하나하나가 그들의 이야기이지만, 그 모두는 바로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불행의 씨앗>이었다. -이 낡고 난해하고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책은 세월이 지날수록 의미가 변한다. 슬픈 일을 한 번 경험하면 의미가 바뀌고, 새로운 사랑을 하면 다시 의미가 바뀌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끼면 또 의미가 바뀐다-는 부분은 어쩐지 책에 대한 내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 같아서 마음이 벅찼다. 처음 읽을 때와 다시 읽을 때의 의미가 바뀌는 책.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책을 빌려서 보기도 하지만 사서 보는 것은 아닐까. 언젠가 그 책의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말이다.

<미쓰자와 서점>의 주인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그저 펼치는 것만으로 어디든 데려가 주는 건 책밖에 없지 않니-라고.  그 한 마디로 책의 존재이유가 정의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디로든 데려가주고 나를 자유롭게 해주고, 상처입은 마음을 달래준 것은 바로 언제나 나의 곁에 함께였던 <책>이었다. 

새삼 내 방에 있는 책들이 새롭게 보여진다. 지금까지 많은 책을 읽었고, 그 중에서 또 많은 책에 감동받았지만 과연 나에게 있어 꼭 존재해야만 하는 책은 무엇일까. 이 책이 있어서 내가 좋았다고, 소중한 사람에게 꼭 선물해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든 책. 오늘밤은 책장을 모두 뒤져서 그런 책을 한 번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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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를라 기담문학 고딕총서 8
기 드 모파상 지음, 최정수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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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나는 꿈을 꿨다. 희뿌연 안개가  온 방안을 뒤덮고 있는 그 공간 사이로,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꿈. 머리로는 -이건 꿈이야, 어서 일어나야 해-하며 몸부림쳐보지만, 쉽사리 잠에서 깰 수가 없었다. 차라리 아무 생각없이 잠들어버리기를 기도하던 중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나는 내가 왜 그런 꿈을 꾸었는지 단번에 알았다. 내 머리맡에 바로 이 책, 기 드 모파상의 [오를라]가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기 드 모파상은 나에게 [여자의 일생]이라는, 어린 시절 읽은 책의 작가였다는 사실로만 기억된다. 안타깝고  마음 아프고, 답답하면서, 나는 꼭 이렇게 살지 않겠다는 기억을 남겨준 [여자의 일생].  하지만 [오를라]에 담겨있는 작품들은 어쩐지 몽환적이고, 섬뜩하고, 훨씬 더 우울하다. 표지에 그려져 있는 희미한 사람의 그림자처럼. 

 기담문학 고딕총서의 8번째 이야기  [오를라]에는 총 9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그 중 가장 무섭고 인상깊었던 작품은 <박제된 손>과, <마드무아젤 코코트>, 그리고 <산장>이었다. <박제된 손>에서는 한 남자가 이미 죽은 어떤 늙은 마법사의 박제된 손을 가져와 그것을 자기 집 현관 초인종으로 쓰겠다며 시작된다. 그를 바라보는 친구가 이 글의 서술자로, 어느 날 그 박제된 손을 가져간 친구가 누군가의 공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친구의 집으로 달려간다. 친구는 목에 심한 상처를 입고 정신착란을 일으키다가 손이 자기를 공격한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결국 죽는다. 그리고 친구의 시신을 묻으려고 땅을 파던 중 늙은 마법사의 시신으로 보이는 해골을 발견하고, 그 옆에는 잘려 나간 손목이 놓여 있다. <마드무아젤 코코트>는 애완용 개인 코코트가 가진 심각한 결점으로 인해 코코트를 물에 빠트려 죽인 후, 부패한 시신을 멱을 감으러 간 강에서 발견하고 미쳐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산장>은 한 겨울 내내 산장을 지키는 산장지기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사냥을 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자, 나머지 다른 한 사람이 찾으러 나가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죽은 다른 산장지기의 환영에 시달리다 미쳐버린다는 이야기다. 

 다른 작품들이 이 작품들에 못미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이 세 작품이 유독 무서웠던 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근원적인 공포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박제된 손>은 그렇다치더라도, 단지 발정기가 계속된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에게 폐가 되기 때문에 개를 죽인 남자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공포, 죄없는 생명을, 자신을 믿고 있던 동물을 물 속에 던져버리고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그 시신을 육십리외나 떨어진 곳에서 다시 만났을 때의 공포는 상상하고도 남는다. 또한 <산장>은 아무도 없는 곳, 자신과 다른 한 사람 뿐이었던 고립된 곳에 둘이 아닌  홀로 남겨졌을 때의,  두려움이 극도의 공포감으로 증폭되는 분위기를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잘 그려냈다.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앉아서, 평소 때는 그 모습을 보이지 않지만 한 번 마음의 수면 위에 떠오르면 쉽사리 놓아주지 않는 깊은 두려움들이 작품들 안에 눈을 번뜩이고 있다.   

 기 드 모파상은 공포의 대상이 되는 존재를 -이것이다!-라고 눈 앞에 바로 들이대지 않는다.  글을 읽는 동안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한기와  대상이 뚜렷하지 않은 상태에서 느껴지는 공포는  꿈 속에서까지 나를 괴롭혔다. 직접 눈 앞에 보여지는 것보다 정체를 알 수 없을 때의 무서움이 한 층 더 심한 법이다. 또한 과장되지 않고, 마치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이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는 문체 때문에 괴기스러움은 한층 심해지고, 극적인 분위기가 더욱 생생하게 살아난다. 

[오를라]를 읽으면 세상에는 좋을 일은 하나도 없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그만큼 우울하다. 하지만 기 드 모파상이라는 유명한 작가의 정신세계가 궁금하다면, 한 번쯤 읽어볼 것을 권한다. 단, 깊은 밤에는 읽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의 잔영이 꿈 속까지 따라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당신을 괴롭힐지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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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타이 도쿄 - 핸드폰으로 담아 낸 도쿄, 그 일상의 세포
안수연 지음 / 대숲바람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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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은 뒤 내가 느낀 첫 번째 감정은 "질투"였다. 책을 쓴 저자에 대한 질투. 10년 이상 카피라이터로 일을 했음에도, 주저없이 털고 일어나 사진을 공부하겠다고 일본으로 날아간 사람. 나와는 달리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그 타국 땅에서 2년 동안 용기로 가득찬 삶을 살았던 사람. 그리고 나서  찾아온 감정은 "그리움"이었다.  

내가 일본에 갈 때 나는 용기없고, 숫기없는 대학 2학년생이었다. 부모님 품 안에서 병아리마냥 살다가 난생 처음 집을 떠나 나 혼자만의 생활을 꾸려보겠다고 떠났던 때. 그렇게 가서 두 주먹 불끈쥐고 세차게 살았다면 좋았으련만, 나는 그렇게 살기에는 아직도 덜 자라 있었다. 사람에 대한 낯가림도 있었고, 무엇보다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1년만 지나면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기를 꺼렸다. 주위에서 외로움 때문에 남자, 혹은 여자친구를 만들었다가도 돌아갈 때 헤어지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고, 동성끼리도 한국으로 돌아가면 연락을 끊는 상황을 많이 들어서인지 그런 나의 생각이 옳다고만 믿었다. 그 때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믿었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는 그 때도 외곬수에 철부지였구나 싶다. 

저자 안수연은 10년 이상을 카피라이터로 일했다고 한다. 그러다 사진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해 무작정 일본으로 갔다고 하니, 그 용기가 참으로 부럽다. 케이타이(휴대전화)로 찍은 작은 사진들에 그녀의 맛깔나는 코멘트까지 덧붙여져, 여느 에세이와는 다른 차별성을 띠고 있다. 그녀의 머릿속을 몰래 들여다보는 느낌이랄까. 잘난척을 하며 써내려가는 여타의 에세이집보다 친근했고, 공감가는 내용이 많다. 많이 알려진 겉모습보다 색다른 모습을 조금이라도 엿보고 싶다면,  읽어보시기를.

그렇게 책을 읽어내려가다보니, 익숙한 냄새가 코끝에 스민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풍겨져나오는 일본의 냄새. 나만이 맡을 수 있는 거리의 냄새, 풍경의 냄새, 도시의 냄새가.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내가 예전에 살았던 그 도시에 있는 것 같았다. 북적이는 신주쿠와 시부야 거리,  7시만 되도 가게문을 다 닫아 한산했던 동네, 그 때는 멀게만 느껴졌던 역에서 기숙사까지의 거리, 거리에 흩어지던 벚꽃과 즐겨 찾았던 중고 책방..가슴 한 쪽이 싸해지면서 불현듯 다시 간다면 예전보다 더 잘살 수 있으리라는 근거없는 용기가 생긴다 . 

일본에 있던 어느 날 저녁 기숙사로 돌아가는데, 몇 개의 방에 켜진 불빛이 새어나오는 그 건물이 그렇게 삭막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세상에 나와 기숙사 건물만 있었던 것 같은 이상한 느낌. 아침에는 괴물같은 까마귀가 까악-까악- 울어대며 쓰레기통을 뒤지고,  가면을 쓴 것 같은 단조로운 사람들 표정에, 모든 일에 괜히 겁이 났던 불쾌한 느낌.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고, 외로움과 쓸쓸함의 슬픔을 알았던 곳이어서 한국으로 돌아가도 일본을 그리워하는 일은 없을 거라 믿었는데, 나는 돌아오는 비행기에 탄 순간부터 그 곳을 그리워했다. <매력이란 그런 것이다. 처음 마주쳤을 땐, 이게 뭐야 하고 눈살을 찌푸릴만한 것도 자꾸 보면 눈에 익고 다정해 보인다는 것. 매력을 느끼는 취향에 있어서 영원불변한 테이스트란 없다>라는 저자의 말처럼 나는 어느새 도쿄의 매력에 빠져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가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에 그 곳이 이토록 그립게 느껴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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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누비스의 문 1 - 털에 뒤덮인 얼굴
팀 파워즈 지음, 이동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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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내 환상의 중심은 -시간여행-이었다. 주전자 타임머신이 나오는 만화를 너무 좋아해서 그 주문을 항상 입에 달고 살았던 기억이 난다. 급기야 저주에 의해 3000년 전의 고대 이집트로 끌려가버린 여주인공을 중심으로 사랑과 음모의 소용돌이를 그리는 어떤 책을 읽고 내 환상은 급격히 커져버려,  나도 고대 이집트로 한 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 되어버렸다. 고대의 상형문자, 파피루스, 나일 강가에서 불어오는 바람, 피라미드, 여러 유적들..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찬 어린시절의 그 소망은 사라지지 않고 아직도 내 안에 남아있다. 그런데  그런 나의 소원을,  장소는 다르지만, 아주 간단히 이루어버린 사람이 있다!

브렌던 도일은 시인 콜리지의 전기를 썼으며, 영국의 시인 윌리엄 애쉬블레스를 연구하는 미국 영문학자다.  어느 날 문화 사업의 대부호인 J.코크런 대로가 발견한 시간의 틈새로 콜리지의 강의를 듣기 위해 같이 시간여행을 떠나게 되지만,  이집트의 마법사 닥터 로마니에 의해 현대로 돌아오지 못하고 과거에 남게 된다.  닥터 로마니는 도일이 이용한 시간의 틈새를 찾아내어 과거로 돌아가, 과거 영국의 이집트 지배를 막고 영국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목적. 그의 동료 아메노피스 파이키는 마스터의 주문에 의해 이미 아누비스가 빙의되어 -개 얼굴 조-라는 이름으로 다른 이들의 몸을 빼앗아 살아가고 있다. 닥터 로마니의 습격으로 부상을 당하고, -개 얼굴 조-의 공격으로 윌리엄 애쉬블레스로 살아가게 된 도일. 어찌된 영문인지 현대로 돌아갔다고 생각한 대로마저 다시 나타나 도일의 생명을 위협한다.

아누비스는 이집트의 신으로, 저승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 죽은 자를 오시리스의 법정으로 인도하며, 죽은 자의 심장을 저울에 달아 살아 생전의 행위를 판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한다. 아누비스의 문이란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문이며, 그것은 곧 시간의 틈새가 되고, 도일과 닥터 로마니가 대립할 수밖에 없는 매개로 작용한다.

시간의 틈새라는, 인간이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요소 때문일까. 작품에는 그 시간의 틈새에 매달린 등장인물이 끝도 없이 등장한다. 주인공인 도일부터, 영국을 멸망시키려는 닥터 로마니와 그의 마스터, 개 얼굴 조, 개 얼굴 조에 의해 약혼자를 잃은 재키, 시간 여행을 계획한 대로까지. 또한 스팀펑크(SF, 더 좁게는 대체 역사물의 하위 장르 중 하나. 20세기 산업 발전의 바탕이 되는 기술(예: 내연기관, 전기 동력) 대신, 증기기관과 같은 과거 기술이 크게 발달한 가상의 과거, 또는 그런 과거에서 발전한 가상의 현재나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라는 장르에 어울리게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인지 모를정도로, 눈이 뱅뱅돌고, 눈 앞에서 불꽃이 튀는 듯한 사건들에 정신이 없다. 그럼에도 중심축을 벗어나지 않고 이야기를 일관되게 이끌어나가는 작가의 힘이 대단하다. 

작품은 단순히 선과 악의 대립, 주인공의 승리라는 오락적 기능만을 내보이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원치 않은 상황에 놓여졌을 때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인가, 과거의 한 시점으로 돌아가게 됐을 때 나의 행동이 역사를 바꿀 수 있다면 과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그 때 한 행동은 과연 나의 의지로 행해진 것인가 아니면 이미 결정된 것인가등 시간 여행이라는 주제에서 제기될 수 밖에 없는 문제에도 눈을 돌린다.  아마도 겪어보지 않은 이상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숙제겠지만, '역사 속에 던져진 개인의 존재 이유'라는 측면에서 또 다른 생각을 하게 한다. 

주인공 도일은 유쾌하다. 연고도 없는 곳에 훌렁 남게 된다면, 나라면 허둥지둥 정신이 없었을텐데, 도일은 온갖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느긋하다. 정신없이 일어나는 사건들 속에서 그런 도일의 느긋한 성격이 오히려 돋보였던 것 같다. 또한 주어진 시간 속에서 때로는 싸우면서, 때로는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에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모습을 본다. 책 앞장에 나온 <누구도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두 번째 발을 담글 때 강은 같은 강이 아니고, 그도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말에 어쩌면 겪어보지 못한 과거를 아쉬워하지 말고, 지금 현재를 충실하게 살라는 의미가 담긴 것은 아닐까.  만약 미래에서 지금의 현재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고 해도, 그 현재는 이미 온전히 나의 것인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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