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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웨어 ㅣ 판타 빌리지
닐 게이먼 지음, 나중길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덮은 순간, 나는 다른 공간에서 빠져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조그마한 난쟁이 나라가 책 한 권에 입체적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그들보다 엄청나게 큰 내가 그들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내가 본 것은 글자가 아니라 책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인 숨겨진 세계의 신비로운 이야기.
런던의 증권맨 리처드는 약혼녀인 제시카와 길을 걷던 도중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한 소녀를 발견한다. 그녀의 이름은 Door, 도어. 런던의 지하세계에서 살아가는 그녀는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밴더마와 크루프라는 악당에게 쫓기고 있었다. (사실 밴더마와 크루프는 악당이라는 한 마디로 나타낼 수 없으나, 그들을 표현하기에는 엄청나게 잔인한 용어가 필요하므로 차마 여기에 쓸 수는 없었다) 리처드가 도어를 도와 준 후부터 그의 존재는 투명인간처럼 되어 버린다. 결국 지하세계로 도어를 찾으러 간 리처드는 , 가족이 살해당한 이유를 밝혀 복수를 꿈꾸는 도어와 그녀를 돕는 카라바스 후작, 경호원 헌터와 모험을 시작한다. 이상한 이동시장, 쥐대왕, 수도사들,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역과 지하터널, 거기에 천사까지 등장하는 와중에 이야기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우리를 이끈다.
닐 게이먼은 [스타더스트]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아직 국내에 익숙치 않은 작가이다. [스타더스트]를 처음 읽었을 때, 책 자체가 반짝거리는 듯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에 밤이 가는 줄 몰랐더랬다. 그런데 이 [네버웨어]는 [스타더스트]보다 몇 배는 더 재미있고, 신비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게다가 그의 표현력은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단해서(물론 번역의 힘일 수도 있다) 어떻게 이런 표현을 사용할 수 있는지 살짝 질투가 났다.
이야기 자체도 흥미진진하고, 구성에도 빈틈이 없지만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주인공이 변화하는 과정이었다. 그냥 회사에 다니고 약혼녀와의 결혼을 꿈꾸는 리처드는 처음에 우리 주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도어를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지하세계로 굴러떨어졌을 때도, 그는 그저 -내가 저 상황이었어도 저랬을거야-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그저 그런 캐릭터였다. 그런 그가 도어 일행과 여행을 하면서 변하기 시작한다. 자기에게 주어진 과제를 수행한 후부터 그의 마음 속에서 용기가 생기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사건 해결에 커다란 역할을 하면서 리처드는 성장해간다. 게다가 마지막에 그가 선택한 삶은 우리 모두에게 충분히 교훈을 줄 수 있을만한 것이었다.
-저는 멋지고 지극히 정상적인 생활을 원했습니다. 제가 머리가 이상한 놈인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이 지상의 삶이 전부라면 이대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화를 두려워한다. 나부터도. 평화롭고 안락한 생활을 계획하지만, 그 계획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때 느끼는 불안감에 정신이 멍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이룬 것이 우리가 진정 원한 것이 아니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아마 다른 길을 모색하기보다 포기하고 원하지 않은 삶을 사는 쪽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용기를 가지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한다. 리처드가 선택한 것처럼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라고. 그것이야말로 성장이고, 진정한 삶이라고.
신비로운 동화같은 소재에 별가루같은 사랑, 마치 자신이 뛰어다니고 있는 듯한 숨막히는 스릴에 교훈까지 얹어주는 이 작품에 나는 완전히 닐 게이먼의 팬이 되어버렸다. 앞으로도 그의 작품이 나오기를 무척 고대할 것 같다. 나처럼 그의 이야기에 빠져버린 사람들에게, 책 뒤쪽에 실린 그의 인터뷰는 의미있는 선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