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퍼드 살인 방정식
기예르모 마르티네스 지음, 김주원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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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내 최대 적은 선생님도 친구도 아닌, 바로 수학이었다. 이 수학이란 생물(나에게는 마치 나를 약올리기 위해 태어난 별종같이 생각되었기 때문에) 은 언제나는 아니었지만, 나의 예상을 빗나가게 하는 답을 내놓기 일쑤였고, 좀 쉽게 풀었다 싶으면 실수 때문에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만들었다. 항상 수학문제를 풀 때 머리를 쥐어뜯곤 했는데, 이 표지의 남자는 그 때의 내 모습과 어쩐지 비슷하다. 나는 수학 때문에 머리를 감싸안았지만, 이 남자는 무슨 이유로 이렇게 괴로워하는 걸까. 그에게 맡겨진 숙제는 바로 살인방정식이다. 

 아르헨티나에서 영국으로 유학을 온 '나'는 암호해독가로 유명한 어느 노부인의 집에서 하숙을 시작한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하숙비를 지불하려고 찾아갔다가, 저명한 수학자 아서 셀덤과 함께 노부인의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 아서 셀덤은 누군가로부터 원이 그려진 이상한 메시지를 받고 찾아온 것. 그 후 범인의 연쇄살인은 계속된다. 산소호흡기에 의존하고 있던 환자가 사체로 발견되고,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공연 도중 갑자기 질식사하며,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던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의 스쿨버스가 전복되어 아이들이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살인이 일어날 때마다 아서 셀덤에게 원, 물고기, 트라이앵글, 테트라크티스의 기호가 그려진 이상한 쪽지가 전달되고, '나'는 이 유명한 수학자와 함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머리를 쥐어뜯게 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수학과 거의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책 표지에 쓰인 '수학으로 풀어낸 치밀한 살인의 미학'이라는 글귀에 혹시라도 책을 읽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할까 봐 노심초사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 책으로 인해 수학의 길에 다시 한 번 뛰어들어볼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동생이 읽고 있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라는 단어를 발견하고는 반가웠고, 역시 이해하는 데에 어렵기는 했지만 논리적 추론에 관계된 설명이 나올 때는 왠지 모르게 내가 지적인 사람이 된 듯 하여 뿌듯함까지 느꼈다. 역시 책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접하게 되는 건 즐거운 일이다. 

 한 가지  재미있게 생각한 것은 등장인물들의 행동이다. 살인이 일어나고, 이상한 쪽지가 배달되었음에도 책 속의 사람들은 사건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동안 내가 읽었던 추리 소설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사건의 중심이 되어 마치 자기가 아니면 사건을 해결할 수 없을 것처럼 행동하는데, 이 작품속의 사람들은 어딘지 모르게 사건에 무관심하다. 그저 쪽지가 배달되고, 사건이 일어나면 그제서야 '아, 또 누가 죽었어?'라는 느낌일까. 오히려 논리적으로 주변 상황을 설명하고, 테니스를 치며 일상생활을 즐긴다. 그러다, 한 가지 계기를 통해 그제서야 충격 아닌 충격을 받고 사건의 전모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나중에 밝혀진 사건의 결말을 알게 되면 그 이유를 알게 되겠지만.

 대신 작가는 독자에게 배려심을 발휘한다. 기호들에 대한 설명이며, 힌트를 요기조기 숨겨놓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발견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논리적 설명이라는 것이 읽다보면 빠져들지만, 나중에는 역시나 희미해지기 때문에. 다만,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책을 읽게 되니 읽는 맛이 좋다. 밝혀진 범인에 대해서는 안쓰러움보다 비열함을 느꼈다. 결국 어떤 말로 포장을 해도 자신의 욕망 때문에 일을 벌인 것이니, 내가 주인공이었다면 당장 응징을 가했을 거다. 

 수학과 논리적 추론이라는 색다른 소재로 나를 또 다른 세계로 인도해 준 작가의 다음 작품을 하루 빨리 만나보고 싶다. 수학이 어려웠던 이들이여, 수학에 공포심을 가졌던 이들이여, 주저하지 말고 이 책을 집어들라~당신들도 수학에 가까워질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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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로 보는 서양미술사
장 라쿠튀르.질 플라지 지음, 이봉순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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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보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역시 <간접적인 경험>이 제일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게 아닌가 싶다. 직접 가 볼 수 없고, 직접 느껴볼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단순히 펼치기만 하면 내 눈 앞에 생생하게 나타나는 것.  집어들기만 하면 다른 세계로 나를 데려다 주는 것. 나에게 있어 책 이외의 경이로운 발명품은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미술품 관련 서적에 있어서는 특히나. 

 그 동안 미술에 관해 적당한 양의 책을 봐왔지만, 일관성 없이 내가 좋아하는 그림만, 내가 좋아하는 작가만 보게 되어 한편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한 번은 전체적으로 개괄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차에, 이 책을 만났다.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인 내용을 설명하면서 주요 작품들이 실려 있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 헬레니즘 미술, 고딕, 르네상스, 그리고 추상화와 현대의 여러 작품들..그림들이 크고 깔끔해서 책을 휙휙 넘기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그림 안에는 현재의 우리가 발견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림에 있어 문외한이라 해도 좋을 정도의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그림에 관심이 가고, 매달리게 되는 것은 그 안에 숨어있는 매력을 은연중에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미술책은 글자를 따라가는 것이 주된 활동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일반 책들보다 사람을 더 자유롭게 한다. 가령 책에 나온 스톤헨지를 보고 이런 저런 상상을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사실이라 단정지을 수 없는 점이 매력이다. 옛날의 일은 옛날의 일일 뿐, 지금을 사는 우리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알아낼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때문에 그림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봐도 자신의 생각을 펼칠 수 있다는 점이 멋지다. 물론 학술적인 내용을 알고 그림을 본다면 더 좋겠지만.

 마로니에북스에서 나온 미술 책들은 전문적인 느낌이 들어 믿음이 간다. 미술관 기행 시리즈를 비롯하여, [이미지로 보는 서양 미술사]이 책까지 나에게는 미술감상을 하는 데 친구가 생긴 것 같아 마음이 든든하다. 원래 목적이 미술사의 개괄이었으므로, 나에게는 그림 자체에 대한 설명보다 전체적인 시대에 관한 설명이 주를 이룬 것이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의 미술관련 서적을 탐독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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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보일드 에그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6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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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보일드  1930년을 전후하여 미국문학에 등장한 새로운 사실주의 수법  계란을 완숙하다라는 뜻의 형용사. 하드보일드라는 말의 의미를 예전부터 궁금해하던 나였지만, 이제서야 찾아보게 되는 게으름을 어찌할까. 그저 하드라는 단어가 들어가길래, 뭔가 굉장히 거세고 격한 느낌만을 받았을 뿐, 찾아볼 생각도 안 하던 단어의 뜻을 [하드보일드 에그] 덕분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풋. 웃음이 났다. 추리소설 작가 필립말로를 좋아하는 주인공 모가미 슌페이가 할머니 비서, 가타기리 아야에게 하드보일드의 의미를 설명할 때마다 그녀가 받아들인 의미는 다름아닌 <완숙 계란>이었기 때문이다. 

 모가미는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좋아하고, 필립말로를 좋아하는 동물 찾기 전문 탐정이다. 예쁜 여비서를 구할 꿈에 부풀어 어느 날 한 통의 전화를 받고 한 사람을 고용하지만, 예쁘기는 커녕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가 비서로 짜잔! 등장한다. 차 밑을 기어다니며 고양이를 찾고, 공원 나무를 타서 이구아나를 찾아내는 그에게는 버려진 동물들을 데려다 키우는 마음이 따뜻했던 친구 가츠유키와 그의 아내 쇼코가 있다. 주인 없는 시베리안 허스키(꼬맹이)를 가츠유키에게 맡긴 어느 날, 가츠유키의 장인이 살해당하고, 모가미는 살인의 전모를 파헤치고 꼬맹이에게 씌워진 누명을 벗기기 위해 할머니 비서와 고군분투한다. 결국 예상치 못한 사실에 맞딱뜨리게 되고, 할머니 비서에게 간직하고 있던 비밀이 드러난다. 

 처음에 책을 집어들고 읽기에 몰입할 수 있게 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 동안 내가 접해왔던 다른 일본 소설들과 분위기가 달랐고, 익숙하지 않은 말투가 많아서일 것이다. 어쩌면 처음에 하드보일드의 의미를 모르고 읽어서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작품은 뒤로 갈 수록 마치 달걀 껍질을 벗겨내야 흰 속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새로운 매력을 가득 숨기고 있다. 뒤로 가면 생각지 못한 감동에 가슴이 먹먹해지기까지 한다.  가벼운 유머를 한창 나열하다가도 어느 순간 보면 우리의 삶의 한 부분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유행이라고 큰 개들을 기르다가 사료값이 만만치 않고, 기르기가 힘이 들어 주인들이 개를 버리는 현실이 책 속에 있다. 자신의 감정만을 앞세우며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의 모습이 판으로 박은 듯 박혀 있다. 다만, 그러한 인정없는 세상을 단순한 유머가 아닌 깊이를 곁들여 표현하는 솜씨가 놀랍다. 

 며칠 전 영화 <세븐데이즈>를 보았다. 영화 속 인물들은 마치 우리 세상의 더럽고 추한 인물들만 모아놓은 듯 황량하기 그지없다. 비리 형사, 추악한 마음을 가지고 그래도 정치를 해보겠다는 부장판사, 죄를 저지르고도 그 죄의 무게를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범죄자..모가미 탐정의 친구 가츠유키와 쇼코가 동물들에게 집착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동물보다 사람이 더 못났어, 동물은 의리를 알지만 사람 중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아, 인간만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 다른 생물을 가차없이 해칠 수가 있지.. 가츠유키와 쇼코는 인간의 그런 추악한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토록 동물에게 집착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들도 결국 자신들의 소중한 동물들을 위해서라지만 추악한 마음을 가진 인간이었음을, 동물들보다 못한 존재였음을 드러내버리니 그것 또한 아이러니. 

 세상을 살다보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 때때로 알 수 없게 된다. 사람들이 중시하는 가치는 너무나 빨리 변해버리고, 그 가치가 변하는 속도만큼 사람이 변하는 속도도 헤아릴 수 없다. 하지만 그럴 때는 아야 할머니의 <완숙 계란>을 생각하고 싶다. 너무 삶아서 퍽퍽해진 것처럼 답답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가치와 정도를 알고, 사람의 도리와 인정을 아는 사람. 마음 속에 슬픔을 감추고도, 명랑한 모습으로 오호호홋! 하고 웃을 수 있는 사람. 어쩌면 작가는 '하드보일드'한 추리소설을 쓰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완숙 계란>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오늘 밤 꿈 속에 오호호홋! 하며 주름을 잔뜩 모아 웃는 아야 여비서가 나타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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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 보이
팀 보울러 지음, 정해영 옮김 / 놀(다산북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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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접한 성장소설은 [내 영혼이 가장 따뜻했던 날들]. 이 책은 작가의 자전적 성장소설이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아마도 평생 이 책을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에게 사랑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나에게 깊은 슬픔과 동시에 부러움을 안겨준다. 나에게 있어 할아버지라는 존재는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어려운 존재였으니까. 그런 면에서 [리버보이] 또한 [내 영혼이 가장 따뜻했던 날들]과 같은 느낌을 갖게 했다. 

 수영을 좋아하는 소녀 제스. 물 속에서만 자신의 존재가치를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명랑하고 똑똑한 소녀다. 그런 그녀에게 너무나 소중한 할아버지의 심장발작으로 인해 요양을 겸해 가족여행을 떠나게 된다. 장소는 할아버지의 고향. 어린 시절 가족을 화재로 다 잃어 등지고 떠난 고향으로,  할아버지는 마지막을 예감한 듯 그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무엇인가를 찾고 싶다는 듯. 그리고 할아버지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꼭 그 곳에서 완성하고 싶어한다. <리버보이>라 이름붙인 그 그림을..할아버지의 고향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제스는 강가에 서 있는 신비로운 소년을 발견한다. 신비로운 소년의 정체와 할아버지의 관계는..

 작품은 커다란 물줄기를 따라가는 것 같다. 잔잔하면서도 조용하고, 큰 굴곡은 없지만 그 안에서 뛰어노는 단어들은 내 마음을 충분히 맑고, 따스하게 감싸주었다. 무엇보다 할아버지와 손녀의 애틋한 사랑은 부러움을 넘어 박수를 쳐 주고 싶을 만큼 가슴을 울렸다. 특히 할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어 스스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자, 제스가 할아버지의 손이 되어 대신 그림을 완성하는 부분은 엄숙하기까지 하다. 어린 소녀 제스가 할아버지에게 [다만 행복해주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점점 성숙해 가는  제스의 모습에 뿌듯함과 안쓰러움이 느껴진다. 

 인생을 살다보면 소중한 것을 어쩔 수 없이 놓아주어야 할 때가 다가온다. 죽음은 탄생과 함께 모든 존재가 겪을 수 밖에 없는 숙명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 또한 죽음이라는 것에 그렇게 담담할 수는 없지만, 이제는 우리의 생활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죽음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우리를 변화시킬 수도 있음을. [인생이란, 가장 슬픈 날 가장 행복하게 웃는 용기를 배우는 것]이라는 글귀에서 나는 아직도 나이만 먹었지 인생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음을 절감한다. . 

 이 책을 보는 동안 [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라는 양귀자님의 [모순]의 글귀가 생각났다. 너무 소심한 마음에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죽음이라는 정해진 일에 너무 겁먹어 사랑하는 사람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장 슬픈 날  가장 행복하게 웃는 용기를 배우기 위해 내 삶의 순간순간, 모든 것을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기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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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필요한 주문
지수현 지음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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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가 친구가 될 수 있는 비밀(?)을 라디오에서 들은 적이 있다. 하나는 서로를 단순히 친구로만 여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에게 사랑을 느끼는 사람이 우정이 깨질까봐 그 사랑을 숨기는 것이었다.  두 번째의 비밀을 들었을 때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곁에 있기 위해 자신의 사랑을 숨겨야만 하는 사람.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쓸쓸한 사람이 아닐까. 나는 개인적으로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자꾸 만나고, 이야기하고, 세월을 나누다보면 정들어버리는 것이 사람이니까. 

 연주와 경주도 14년이란 오랜 세월동안 친구로만 지내오다 연인이 되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멀미"가 이들에게도 약점이다. 그 "멀미"가 그들을 친구로 만들어주었고, 결국은 경주가 연주에게 마음으로 다가가는 계기가 되었다. 14년의 친구 생활을 청산하고 바로 연인으로 지내는 것이 나에게는 어색할 것만 같은데, 이들은 너무 오랜 세월을 친구로 지내온 것이 오히려 강점으로 작용한 듯 하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사랑도 세상의, 사람의 '편견'때문에 결국 이별을 맞이한다. 그리고 1년여가 지난 지금, 그들은 자신들의 앞에 다시 나타난 그 사랑을 거부할 수 있을까. 

 조근조근한 대화체로 쓰여 있는 이 책은 단순히 소꿉친구의 우정에서 사랑으로 변한 이야기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연주는 술주정뱅이에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아버지를 증오하지만, 뼛속까지 아버지를 미워하지 못한다. '아버지'라는 이름 하나로 괴팍한 그 노인은 연주에게 증오의 대상이자 사랑받고 싶은 소중한 사람이 된다. 항상 아버지에게 구박을 받으면서도 병에 걸린 남편을 내버려두지 못하고, 해달라는대로 다 해주고 마는 연주의 어머니는 어쩌면 우리가 사는 모습과 가장 비슷하다. 달아나고 싶어도 달아날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막상 달아나버리면 아쉬운 것.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니까. 콩가루 집안이지만, 그렇게 아둥바둥 살아가는 연주네 집은 현실 속의 보통 가정, 바로 그것이다. 

 오랜 친구사이였던 사람이 여자로, 남자로 보이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이것은 아마도 우리가 절대 풀 수 없는 몇 가지 문제 중 하나일 것이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다. 오직 그 답을 알 수 있는 것은 살아온 삶을 정리할 때, 추억할 때일 것이다. 아직도 사랑에 대해 모르는 것이 더 많아 감히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친구가 여자로 혹은 남자로 보이는 것, 그것 또한 인연이자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연주와 경주의 이야기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고,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삶을 버텨내고 살아내는 것. 그러기 위해 우리는 각자 자신들만의 힘을 내기 위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스스로를 다독이는 말, 혼자 깊은 밤 화이팅을 외치는 것, 누군가에게 기대어 위로의 말을 듣고자 하는 것. 불행하지 않도록, 강해지도록, 다시 태어나도록 우리에게는 정말 주문이 필요하다. 그 주문이 효과가 있든없든 사랑을 위해, 자신들의 소중한 삶을 위해 각자 자신만의 주문을 외워봐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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