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보일드 에그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6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하드보일드  1930년을 전후하여 미국문학에 등장한 새로운 사실주의 수법  계란을 완숙하다라는 뜻의 형용사. 하드보일드라는 말의 의미를 예전부터 궁금해하던 나였지만, 이제서야 찾아보게 되는 게으름을 어찌할까. 그저 하드라는 단어가 들어가길래, 뭔가 굉장히 거세고 격한 느낌만을 받았을 뿐, 찾아볼 생각도 안 하던 단어의 뜻을 [하드보일드 에그] 덕분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풋. 웃음이 났다. 추리소설 작가 필립말로를 좋아하는 주인공 모가미 슌페이가 할머니 비서, 가타기리 아야에게 하드보일드의 의미를 설명할 때마다 그녀가 받아들인 의미는 다름아닌 <완숙 계란>이었기 때문이다. 

 모가미는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좋아하고, 필립말로를 좋아하는 동물 찾기 전문 탐정이다. 예쁜 여비서를 구할 꿈에 부풀어 어느 날 한 통의 전화를 받고 한 사람을 고용하지만, 예쁘기는 커녕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가 비서로 짜잔! 등장한다. 차 밑을 기어다니며 고양이를 찾고, 공원 나무를 타서 이구아나를 찾아내는 그에게는 버려진 동물들을 데려다 키우는 마음이 따뜻했던 친구 가츠유키와 그의 아내 쇼코가 있다. 주인 없는 시베리안 허스키(꼬맹이)를 가츠유키에게 맡긴 어느 날, 가츠유키의 장인이 살해당하고, 모가미는 살인의 전모를 파헤치고 꼬맹이에게 씌워진 누명을 벗기기 위해 할머니 비서와 고군분투한다. 결국 예상치 못한 사실에 맞딱뜨리게 되고, 할머니 비서에게 간직하고 있던 비밀이 드러난다. 

 처음에 책을 집어들고 읽기에 몰입할 수 있게 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 동안 내가 접해왔던 다른 일본 소설들과 분위기가 달랐고, 익숙하지 않은 말투가 많아서일 것이다. 어쩌면 처음에 하드보일드의 의미를 모르고 읽어서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작품은 뒤로 갈 수록 마치 달걀 껍질을 벗겨내야 흰 속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새로운 매력을 가득 숨기고 있다. 뒤로 가면 생각지 못한 감동에 가슴이 먹먹해지기까지 한다.  가벼운 유머를 한창 나열하다가도 어느 순간 보면 우리의 삶의 한 부분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유행이라고 큰 개들을 기르다가 사료값이 만만치 않고, 기르기가 힘이 들어 주인들이 개를 버리는 현실이 책 속에 있다. 자신의 감정만을 앞세우며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의 모습이 판으로 박은 듯 박혀 있다. 다만, 그러한 인정없는 세상을 단순한 유머가 아닌 깊이를 곁들여 표현하는 솜씨가 놀랍다. 

 며칠 전 영화 <세븐데이즈>를 보았다. 영화 속 인물들은 마치 우리 세상의 더럽고 추한 인물들만 모아놓은 듯 황량하기 그지없다. 비리 형사, 추악한 마음을 가지고 그래도 정치를 해보겠다는 부장판사, 죄를 저지르고도 그 죄의 무게를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범죄자..모가미 탐정의 친구 가츠유키와 쇼코가 동물들에게 집착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동물보다 사람이 더 못났어, 동물은 의리를 알지만 사람 중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아, 인간만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 다른 생물을 가차없이 해칠 수가 있지.. 가츠유키와 쇼코는 인간의 그런 추악한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토록 동물에게 집착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들도 결국 자신들의 소중한 동물들을 위해서라지만 추악한 마음을 가진 인간이었음을, 동물들보다 못한 존재였음을 드러내버리니 그것 또한 아이러니. 

 세상을 살다보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 때때로 알 수 없게 된다. 사람들이 중시하는 가치는 너무나 빨리 변해버리고, 그 가치가 변하는 속도만큼 사람이 변하는 속도도 헤아릴 수 없다. 하지만 그럴 때는 아야 할머니의 <완숙 계란>을 생각하고 싶다. 너무 삶아서 퍽퍽해진 것처럼 답답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가치와 정도를 알고, 사람의 도리와 인정을 아는 사람. 마음 속에 슬픔을 감추고도, 명랑한 모습으로 오호호홋! 하고 웃을 수 있는 사람. 어쩌면 작가는 '하드보일드'한 추리소설을 쓰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완숙 계란>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오늘 밤 꿈 속에 오호호홋! 하며 주름을 잔뜩 모아 웃는 아야 여비서가 나타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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