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시스터즈 키퍼 - 쌍둥이별
조디 피콜트 지음, 곽영미 옮김 / 이레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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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제가 뭘 원하는지 알고 싶으세요? 전 기니피그가 되는 게 지긋지긋해요. 내 기분이 어떤지 아무도 묻지 않는 게 지긋지긋해요. 지긋지긋한데, 이 가족은 젠장 도무지 지겹지가 않아요-p296
 
흘려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어떤 작가는 가족을  '내다버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 사람들'이라 정의했다고 한다. 엉뚱하다 생각하면서도 그 말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가족은 어쩌면 정말 그런 존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족이 있어 행복하고 감사하다. 이 사람들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살았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사랑하는만큼, 때로는 미움이 배가 될 때가 있다. 가족이란 이름 아래 남보다 더 큰 상처를 주고받으며 사소한 말 한 마디에 날카로운 칼날처럼 반응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만큼은 절대적으로 이해받고 싶고 어리광피우고 싶기 때문이다.
 
'나'에 관한 최초의 정의는 가족관계에서 이루어진다. 누군가의 자식, 누군가의 형제, 누군가의 손자손녀. 그리고 우리의 탄생은 축복 속에서 이루어져야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그 당연하게 여겨져야 할 탄생이 가족의 사랑이 아니라 단순한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자신의 존재이유를 과연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여기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찾고 싶은 한 소녀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안나 피츠제럴드. 안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안나의 언니, 케이트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야 한다. 어릴 때 발병한 백혈병으로 케이트는 다섯 살을 넘기지 못할 운명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던 그녀의 부모 사라와 브라이언은 케이트에게 골수를 기증해 줄 맞춤형 아기를 갖기로 결심한다. 세간의 관심을 끌며 사라는 안나를 임신했고, 그렇게 '언니를 위해' 태어난 안나의 삶이 시작된다.
 
시작은 안나의 탯줄이었다. 그것은 케이트의 재발여부에 따라 성장주사, 공여자림프구 주입, 림프구 기증, 골수 채취로 이어졌고 결국에는 신장을 이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자신의 선택과는 상관없이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언니에게 모든 것을 바쳐왔던 안나는 신장기증을 거부하고-내 몸의 권리를 차기 위해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어요-라며 변호사 캠벨 알렉산더를 찾아간다. 결국 전직 변호사였던 엄마 사라는 스스로 자신을 변호, 아빠 브라이언은 안나 편에 서서 증언을 하면서 그들의 가정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다.
 
안나의 눈으로 보여지는 세상은 내 마음도 억울함으로 가득하게 했다. 안나와 큰아들 제시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케이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 늘 케이트만을 챙기는 엄마 사라는 내가 안나였어도 소송을 하게 만들만큼 안나에게 잔인하다. 하지만 막상 사라의 관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면 또 그런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아이는 커녕 미혼인 나이기에 엄마인 사라의 마음을 100% 이해할 수는 없지만 사랑하는 딸을 위해 무엇이든 해주고 싶어하는 그녀의 마음이 시리도록 전해져온다. 사라 뿐만 아니라 아빠 브라이언, 케이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집에 염증을 느낀 큰아들 제시가 털어놓는 각자의 이야기는 과연 이 소송에서 누가 진정으로 이길 수 있을 것인가 되묻게 한다. 소송은 진행되고 결과는 나오겠지만 안나든 사라든 그 누구도 진정으로 이겼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의 관계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케이트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이 바라보는 케이트의 모습은 안타깝지만 아름답다. 소송을 제기한 안나에게 원망을 품었을만도 한데 그녀는 한결같이 차분하다. 게다가 사라의 눈을 통해 보여진 케이트의 첫사랑은, 나라도 무슨 짓을 해서라도 지켜주고 싶을만큼 애처롭기까지 하다. 결국 이 책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지, 누군가의 눈을 통해 케이트를 바라보는지에 상관없이 매순간 목과 가슴을 꽉 막아버린다.
 
이 책에서 일어난 이야기는 결국 형태만 다를 뿐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 점이 나를 오싹하게 한다. 내가 사라라면, 내가 케이트라면, 내가 안나라면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한 선택이 옳았다고, 내 자식들을 모두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과연 그렇게말할 수 있을까. 답은 없다. 그저 우리는 주어진 운명에 아파하면서 그저 그렇게 살아야 할 뿐인 것이다.
 
아쉽지만 나는 마지막 순간 내 가슴을 죄어온 이 책의 결말에 실망했다. 늘 언니의 동생으로 있고 싶다고 말했던 안나. 그것이 그녀의 소망이기는 했지만 그 소망을 신은 너무도 가혹한 방법으로 들어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케이트는 언제나 안나와 함께 하게 되었다. 그제서야 안나의 존재가치가 빛을 보게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씁쓸해진다. 안타까운 진짜 현실이 많기에 나는 그저 소설속에서라도 다시 행복한 모습으로 돌아가는 안나의 가정이 보고 싶었을 뿐인데.
 
'~상'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 편이지만 이 작품은 미국도서관협회 선정 알렉스 어워드 수상작이다. 누구든 이 책을 읽고 나면 어떤 상이라도 받을만했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한 권의 책이 오늘밤 또 내 가슴을 휘저어놓는다.
 
밤하늘에는 다른 별들보다 유독 더 밝아보이는 별들이 있다. 망원경으로 그 별들을 들여다보면 쌍둥이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두 별은 서로의 궤도를 도는데, 때로는 한 바퀴를 도는 데 거의 백 년이 걸리기도 한다. 이들은 엄청난 중력을 일으켜 다른 것들이 들어올 여지를 주지 않는다. 예를 들어, 청백색의 별을 보았다면 나중에야 그 옆에 동반성인 백색왜성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첫 번째 별은 아주 밝게 빛나지만, 두 번째 별을 알아볼 때즘이면 너무 늦어버린다. -p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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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와 귀울음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0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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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며칠 전 읽은 [목요조곡]의 리뷰에서 밝힌 것처럼 온다 리쿠의 작품을 나는 참 좋아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작품을 통해 맛보게 될 실망에 대한 두려움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매번 그녀의 작품이라면 일단 손부터 대고 보는 것은, 그녀가 들려주었던 환상적인 이야기에 푹 빠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몽롱하면서도 아득한, 그러나 오싹한 그녀의 이번 이야기도 [목요조곡]에서 맛보았던 만족감을 다시 200% 채워주었다고 해도 좋다. 

[코끼리와 귀울음]은 세키네 다카오라는 전직 재판관이 주인공인 연작소설집이다. 그는 온다 리쿠의 초기작 [여섯 번째 사요코]에 등장한 세키네 슈의 아버지로 이 책에는 세키네 다카오 뿐만 아니라 그의 큰아들인 슈운과 딸 나쓰까지 등장한다. 슈운은 우리나라에 아직 출간되지 않은 [PUZZLE]에, 나쓰는 [도서실의 바다]에 주인공이었다고 하는데 역시 이 책의 중심인물은 그들의 아버지인 세키네 다카오. 어쩐지 풍채가 좋고 희끗희끗한 머리에 사람 좋은 인상을 가졌을 것만 같은 그. 개인적으로는 [여섯 번째 사요코]의 슈가 다시 보고 싶었지만 그의 아버지가 풍기는 매력도 상상하다. 

휘황찬란한 달을 배경으로 나뭇가지마다 코끼리와 화분, 술병, 커피잔 등이 매달려 있는 동화같은 표지의 이 책에는 모두 12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단편집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책을 집어들었던 나는 이 한 권의 책에 이렇게도 많은 단편이 실려있다는 점에 놀랐다. 각각의 분량도 그리 길지 않아 과연 제대로 된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던 듯 하다. 

여운을 남기면서도 오싹하고 과연 이것이 현실세계인가를 의심하게 만드는 몽롱한 이야기들. 각각의 이야기들이 서로 다른 향기를 내뿜고 <코끼리와 귀울음>이 표제작으로 내세워졌지만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는 <탁상공론>과 <왕복서신>이다. <탁상공론>에서는 슈운과 나쓰의 추리대결이 볼만하고 <왕복서신>에서는 미스터리와 함께 따뜻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서 좋다. 

그래도 둘 중 베스트를 꼽으라면 <왕복서신> 이라고 할까. 내가 상상한 세키네 다카오의 부드러운 마음과 그러면서도 전직 재판관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날카로운 모습이 한데 어우러져 훌륭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내가 좋아하는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문체를 사용하고 있어서 더 친근감이 들기도 하다. 번역의 힘이겠지만 그래서 더욱 원서의 문체가 궁금해지는 이야기라고 할까.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서 내 마음을 전하고 싶게 만드는 에피소드였다. 

[목요조곡]과 [코끼리와 귀울음]을 읽기 전에 나는 약간 온다 리쿠를 멀리하고 있었다. 국내에 발간되는 책은 출간 즉시 사들이고는 있었지만 일종의 의무감이 수반된 행위였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두 편의 작품을 통해 나는 또 온다 리쿠의 세계에 다시 진심으로 빠져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기쁘다. 내가 그녀의 작품에서 처음 느꼈던 매력을 다시 느낄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이 즐겁다. 짧지만 그래서 더욱 그녀의 기량을 엿볼 수 있었던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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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놀 청소년문학 28
바바라 오코너 지음, 신선해 옮김 / 다산책방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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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들은 종종 무서운 상상을 한다. 침대 밑에 무서운 괴물이 숨어 있다면 어떻게 하나, 자신이 생각하는 최대의 나쁜 짓-이를테면 거짓말, 친구와 다투기 등-을 해서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못 받으면 어쩌나 하는 상상은 아이를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겁에 질리게 한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런 생각들이 단순히 '상상'에 그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현실세계에서 갑자기 아빠가 엄마와 동생을 남겨두고 사라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게다가 남겨진 것은 25센트자리 동전 세 뭉치와 1달러 지폐가 가득 든 통, 현재 생활의 근거지가 된 고물차 한 대 뿐이라면. 생각만으로도 눈 앞이 캄캄해지는 일이다. 

하지만 조지나는 상상만으로 그쳤다면 좋았을 그 일을 겪었고, 지금은 엄마와 동생 토비와 함께 고물차에서 생활하고 있다. 살고 있던 집에서도 쫓겨나고 남은 돈이라고 해봐야 고작 몇 푼. 엄마는 생활을 이어나가기 위해 하루에 두 가지 일을 하고 있지만 새로운 집을 마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패스트푸드 점에서 몸을 씻어봐도 꼬질꼬질한 모습은 나아지지 않고 고물차 뒷구석에서 하루를 마무리해야 하는 생활에 질린 조지나는 어느 날 개를 훔치기로 결심한다. 훔친 개를 잘 숨기고 있다가 개를 찾는 전단지가 붙으면 주인에게 돌려주고 사례금을 받는다는 앙큼한 생각을 해낸 조지나. 그 날부터 보랏빛 공책에 '완벽하게' 개를 훔치기 위한 작전을 세우기 시작하고 급기야 동생 토비와 '윌리'라는 이름의 귀여운 개를 훔치는 데 성공한다. 

전체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것은 조지나이지만 책을 잘 들여다보면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버무려져 있다. 철없고 늘 징징대지만 편치 않은 생활에 늘 지저분한 모습으로 다녀야 하는 동생 토비, 남겨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일을 하지만 쉽게 돈이 모아지지 않는 현실에 지쳐 아이들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엄마는 마치 경기가 좋지 않은 우리의 현실세계를 반영하고 있는 듯 하다. 친구들의 놀림과 선생님의 눈을 의식할 수 밖에 없는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조지나가 생각해 낸 방법을 단순히 옳다, 그르다의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겠다. 다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개를 훔치고 난 후의 그녀의 행동과 생각들이다. 

비록 자신과 가족을 위해 윌리를 훔치고 윌리의 주인인 카멜라 아줌마에게 접근했지만 조지나의 마음은 죄책감으로 인해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윌리를 낡은 집 뒷편에 숨겨놓고 먹이와 물을 걱정하고, 윌리가 외로우면 어쩌나, 내가 정말 나쁜 짓을 하고 있구나, 이 일이 과연 성공적으로 끝날까 등 온갖 고민에 휩싸인 조지나는 그러나 방랑자 무키 아저씨를 만나면서 마침내 올바른 선택을 한다. '때론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의 발자취가 더 중요한 법이야' 라는 무키 아저씨의 말은 자칫했으면 더욱 힘든 상황에 처했을지도 모를 조지나를 위로하고 구원해주었고 무키 아저씨가 떠나간 자리에서 발견한 자전거 바퀴자국과 함께 그녀는 성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바라던 소원이 그녀가 계획한 일을 그만두었을 때 마법처럼 이루어진다. 만약 그녀가 끝까지 '완벽하게' 개를 훔치는 계획을 실행했다면 조지나는 아마도 편한 마음으로 보송보송한 침대에 눕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인생에는 원하지 않을 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때가 한 번쯤은 다가오는 것 같기도 하다. 

세상이 어렵다. IMF 때보다 더 어렵다는 경기한파에 추운 날씨까지 더해져 몸도 얼어붙고 마음도 얼어붙기 쉽다. 하지만 한 권의 책으로 마음을 녹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가. 적당히 계산적이고 적당히 순수한 조지나와 그런 그녀 앞에서 아무 의심없이 온 힘을 다해 꼬리를 흔들어대는 윌리를 통해 그래도 붙잡을 것은 희망과 정직함 밖에 없음을 실감한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조지나의 계획 실행서에 배시시 웃음이 비어져나오는 유쾌하면서도 가슴 따뜻한 성장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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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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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을 좋아하지만 정작 '하드보일드'라는 말이 나오면 당황하게 된다. '하드보일드가 뭐지, 뭐였더라' 더듬거리며 인터넷을 검색하는데 불현듯 예전에도 검색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폭력적인 테마나 사건을 무감정의 냉혹한 자세로 또는 도덕적 판단을 전면적으로 거부한 비개인적인 시점에서 묘사하는 것이다'라는 설명을 읽으면서 그제야 겨우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그러고보니 표지 앞에 쓰인 '걸작 하드보일드' 라는 말이 그냥 쓰인 것만은 아닌 것 같아 기쁘다. 선전문구와 내용의 재미가 일치하는 책은 그리 많이 없으니까. 추리소설을 읽기 위해 꼭 하드보일드나 본격추리, 신본격, 이런 말의 의미를 모두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알아두면 책의 내용과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책 이야기를 하기 전에, 조금 엉뚱한 이야기지만 나는 남자든 여자든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을 좋아한다. 그들 앞에 서면 내가 겪은 일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듯 하다. '울 일이 적어진다'는 느낌이랄까. 하나하나에 화내고 기뻐하고 흥분하는 일은 열정적이고 아름답지만 모든 감정에 온 힘을 다해 반응하는 나같은 사람은 감정의 소모가 너무 크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진중해지고 차분해지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일을 바라볼 줄 아는 여유가 생긴다. 

어쩐 일인지 나는 이 책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주인공 사와자키의 이야기는 하드보일드라는 말과 어울릴만큼 감정이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마치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 사건에 휘말려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말투와 행동은 나의 흥분되는 마음까지 가라앉혀버린다. 하지만 그것이 또 싫지 않다. 마치 나이 많은 어른 앞에서 옛날 이야기를 듣는 듯한 편안한 기분까지 들었다. 숨막히는 액션과 추격신, 선혈이 낭자한 사건현장, 꼬이고 꼬인 이야기들은 자극적이지만 어떤 때는 그걸로 끝이다. 자꾸만 분위기를 떠올려보게 되고, 대사를 곱씹어보게 되고, 엉뚱한 대사 하나에 풋 웃음이 나는 매력적인 이 책과는 다르다. 

이야기는 도쿄 도심의 허름한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로 오른손을 주머니에 감춘 낯선 남자가 탐정 사와자키를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그 남자는 엄청난 액수의 돈이 든 봉투를 내밀며 르포라이터 사에키 나오키의 행방을 묻는다. 사에키의 행방을 알 리 없는 사와자키에게 봉투를 남긴 채 남자는 홀연히 사라지고, 곧이어 그의 아내인 사에키 나오코가 사와자키에게 수사를 의뢰한다. 경찰에게 구박을 받고, 상류층의 믿음직스럽지 못한 눈초리를 받아가며 사에키의 행방을 찾아다닌 사와자키는 그의 실종이 도쿄 도지사 저격사건과 관련이 있었음을 알아내고 그 누구도 짐작하짐 못한 사건의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은 다른 추리소설과는 다르다. 깜짝 놀랄만한 사건현장도 없고, 숨막히는 추격신도 없으며 작품 전체에서도 그다지 긴장감을 느낄 수 없다. 오히려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분위기는 하얀 담배연기 같은 모호함이랄까. 사건을 수사하는 사와자키의 행동마저 때로는 느긋하고 여유로워보인다. 게다가 투덜거리고 구박하면서도 사와자키를 도와주는 니시고리 경부와, 알코올 중독자이고 도망자이면서  종이비행기로 슬쩍 정보를 알려주는 와타나베 모두 개성이 살아있다. 서로 좋아하지 않는 관계, 하지만 무작정 미워할 수만도 없는 관계, 좋다. 

옮긴이의 후기에는 작가가 이야기한 제목에 관한 에피소드가 나와있다. 그는 '밤' 그 자체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추악한 어둠을 '밤'에 비유한 것은 아니었을까. 밤은 모든 만물이 잠들고 고요가 찾아오는 시간이다.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본성이 틈새를 비집고 나올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시간. 표지의 먹물처럼 꿀렁거리는 욕망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는 시간. 그 밤은 범인 안에서 몇 번이나 되살아났을까 생각하게 한다. 

하라 료가 깊이 빠졌다는 레이먼드 챈들러와 필립말로에 대해서는 잘은 모르지만 이런 분위기의 이야기가 하드보일드라면 기꺼이 환영하겠다. 오늘도 어딘가의 쓸쓸한 밤의 골목을 담배 연기와 함께 코트를 휘날리며 어기적어기적 걷고 있을 듯한 사와자키 탐정. 그 후속편이 기다려지는 멋진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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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선생님의 수첩에는 무엇이 있었나? - 성공적인 인간관계를 만드는 대화의 시작 "입을 닫고 귀를 열어라"
페란 라몬-코르테스 지음, 김현철 옮김 / 북폴리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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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든 그 관계를 계속해나가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바로 대화다. 내가 상대에 대해 아무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좋은 말로 표현하지 못하거나 그 사람의 말을 성의있게 들어주지 않으면, 그 관계는 곧 악화된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주기를 바라거나 상대방의 마음을 자신이 온전히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금물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감정과 생각은 서로 표현하고 밖으로 드러낼 때에만 상대에게 전달된다. 

주인공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인 아내와 '대화'로 인해 문제를 겪고 있었다. 대화로 시작해 말다툼으로 끝나는 일상. 그런 삶이 지겨워진 주인공은 막스 선생님에게 조언을 바라지만 막스 선생님이 보낸 것은 텅 빈 수첩 하나와 바다로 나가라는 짤막한 편지 뿐이었다. 그 동안 아내와 단 둘이 시간을 보낸 적이 극히 적었음을 깨달은 주인공은 아내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고 서로의 생각과 감정에 집중하면서 그들 사이에 있었던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 노력한다. 그리고 막스 선생님이 보내 준 텅 빈 수첩에 행복을 부르는 그들만의 법칙을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주인공과 아내가 발견한 행복을 부르는 법칙은 다음의 다섯 가지다. 바다로 나가기 위해 오랜 시간 준비기간을 거치면서는 시간을 충분히 투자하라는 법칙을 얻었고, 항해를 하면서 바람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면서는 상대의 말에 집중하라는 법칙을, 작은 사고가 일어나 아내와 마찰이 있었을 때는 상대방의 감정 상태부터 파악하라는 것을. 폭풍우가 닥쳐 큰 혼란을 겪고 마침내 그것을 이겨냈을 때는 감정적으로 판단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법칙을, 전체적인 항해를 돌아보면서는 상대에게 보조를 맞추어 천천히 대화하라는 법칙을 얻었다. 

많은 책들이 인간관계와 대화를 강조한다. 입이 하나고 귀가 둘임은 다른 사람의 말을 좀 더 성의있게 들으라는 표시라는 것을 재차 상기시킨다. 그런데 그런 책들은 대부분 밖을 향한 대화법에 관해 기술하고 있었다. 사회생활을, 직장생활을 잘 하려면 어떻게 대화를 해야하는가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밖을 향한 대화법 뿐만 아니라 안을 향한 대화법도 중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자주, 그리고 크게 상처를 입히는 대화를 하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집에서 가족에게 말하는 방식을 생각해 보았다. 밖에서는 하하호호 웃으면서 집에서는 가족에게 짜증을 내지는 않았나,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들으려고 했었나, 내 감정 때문에 가족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었나. 안타깝게도 나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나와 가족의 사이가 이 책의 주인공들처럼 나쁜 것은 아니나 나의 대화방식을 고쳐야 함은 자명하다. 

하지만 이 책에서 강조하는 대화법들을 밖에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제시된 대화법들은 가장 기본적인 사항들로 모든 인간관계의 반석을 마련해줄 수 있을 규칙들이다. 쉽지만 우리가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던 대화의 법칙들. 짧고 쉬운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기억에 남게 될 막스 선생님의 훌륭한 수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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