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와 귀울음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0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며칠 전 읽은 [목요조곡]의 리뷰에서 밝힌 것처럼 온다 리쿠의 작품을 나는 참 좋아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작품을 통해 맛보게 될 실망에 대한 두려움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매번 그녀의 작품이라면 일단 손부터 대고 보는 것은, 그녀가 들려주었던 환상적인 이야기에 푹 빠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몽롱하면서도 아득한, 그러나 오싹한 그녀의 이번 이야기도 [목요조곡]에서 맛보았던 만족감을 다시 200% 채워주었다고 해도 좋다. 

[코끼리와 귀울음]은 세키네 다카오라는 전직 재판관이 주인공인 연작소설집이다. 그는 온다 리쿠의 초기작 [여섯 번째 사요코]에 등장한 세키네 슈의 아버지로 이 책에는 세키네 다카오 뿐만 아니라 그의 큰아들인 슈운과 딸 나쓰까지 등장한다. 슈운은 우리나라에 아직 출간되지 않은 [PUZZLE]에, 나쓰는 [도서실의 바다]에 주인공이었다고 하는데 역시 이 책의 중심인물은 그들의 아버지인 세키네 다카오. 어쩐지 풍채가 좋고 희끗희끗한 머리에 사람 좋은 인상을 가졌을 것만 같은 그. 개인적으로는 [여섯 번째 사요코]의 슈가 다시 보고 싶었지만 그의 아버지가 풍기는 매력도 상상하다. 

휘황찬란한 달을 배경으로 나뭇가지마다 코끼리와 화분, 술병, 커피잔 등이 매달려 있는 동화같은 표지의 이 책에는 모두 12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단편집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책을 집어들었던 나는 이 한 권의 책에 이렇게도 많은 단편이 실려있다는 점에 놀랐다. 각각의 분량도 그리 길지 않아 과연 제대로 된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던 듯 하다. 

여운을 남기면서도 오싹하고 과연 이것이 현실세계인가를 의심하게 만드는 몽롱한 이야기들. 각각의 이야기들이 서로 다른 향기를 내뿜고 <코끼리와 귀울음>이 표제작으로 내세워졌지만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는 <탁상공론>과 <왕복서신>이다. <탁상공론>에서는 슈운과 나쓰의 추리대결이 볼만하고 <왕복서신>에서는 미스터리와 함께 따뜻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서 좋다. 

그래도 둘 중 베스트를 꼽으라면 <왕복서신> 이라고 할까. 내가 상상한 세키네 다카오의 부드러운 마음과 그러면서도 전직 재판관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날카로운 모습이 한데 어우러져 훌륭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내가 좋아하는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문체를 사용하고 있어서 더 친근감이 들기도 하다. 번역의 힘이겠지만 그래서 더욱 원서의 문체가 궁금해지는 이야기라고 할까.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서 내 마음을 전하고 싶게 만드는 에피소드였다. 

[목요조곡]과 [코끼리와 귀울음]을 읽기 전에 나는 약간 온다 리쿠를 멀리하고 있었다. 국내에 발간되는 책은 출간 즉시 사들이고는 있었지만 일종의 의무감이 수반된 행위였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두 편의 작품을 통해 나는 또 온다 리쿠의 세계에 다시 진심으로 빠져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기쁘다. 내가 그녀의 작품에서 처음 느꼈던 매력을 다시 느낄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이 즐겁다. 짧지만 그래서 더욱 그녀의 기량을 엿볼 수 있었던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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