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추리소설을 좋아하지만 정작 '하드보일드'라는 말이 나오면 당황하게 된다. '하드보일드가 뭐지, 뭐였더라' 더듬거리며 인터넷을 검색하는데 불현듯 예전에도 검색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폭력적인 테마나 사건을 무감정의 냉혹한 자세로 또는 도덕적 판단을 전면적으로 거부한 비개인적인 시점에서 묘사하는 것이다'라는 설명을 읽으면서 그제야 겨우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그러고보니 표지 앞에 쓰인 '걸작 하드보일드' 라는 말이 그냥 쓰인 것만은 아닌 것 같아 기쁘다. 선전문구와 내용의 재미가 일치하는 책은 그리 많이 없으니까. 추리소설을 읽기 위해 꼭 하드보일드나 본격추리, 신본격, 이런 말의 의미를 모두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알아두면 책의 내용과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책 이야기를 하기 전에, 조금 엉뚱한 이야기지만 나는 남자든 여자든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을 좋아한다. 그들 앞에 서면 내가 겪은 일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듯 하다. '울 일이 적어진다'는 느낌이랄까. 하나하나에 화내고 기뻐하고 흥분하는 일은 열정적이고 아름답지만 모든 감정에 온 힘을 다해 반응하는 나같은 사람은 감정의 소모가 너무 크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진중해지고 차분해지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일을 바라볼 줄 아는 여유가 생긴다. 

어쩐 일인지 나는 이 책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주인공 사와자키의 이야기는 하드보일드라는 말과 어울릴만큼 감정이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마치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 사건에 휘말려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말투와 행동은 나의 흥분되는 마음까지 가라앉혀버린다. 하지만 그것이 또 싫지 않다. 마치 나이 많은 어른 앞에서 옛날 이야기를 듣는 듯한 편안한 기분까지 들었다. 숨막히는 액션과 추격신, 선혈이 낭자한 사건현장, 꼬이고 꼬인 이야기들은 자극적이지만 어떤 때는 그걸로 끝이다. 자꾸만 분위기를 떠올려보게 되고, 대사를 곱씹어보게 되고, 엉뚱한 대사 하나에 풋 웃음이 나는 매력적인 이 책과는 다르다. 

이야기는 도쿄 도심의 허름한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로 오른손을 주머니에 감춘 낯선 남자가 탐정 사와자키를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그 남자는 엄청난 액수의 돈이 든 봉투를 내밀며 르포라이터 사에키 나오키의 행방을 묻는다. 사에키의 행방을 알 리 없는 사와자키에게 봉투를 남긴 채 남자는 홀연히 사라지고, 곧이어 그의 아내인 사에키 나오코가 사와자키에게 수사를 의뢰한다. 경찰에게 구박을 받고, 상류층의 믿음직스럽지 못한 눈초리를 받아가며 사에키의 행방을 찾아다닌 사와자키는 그의 실종이 도쿄 도지사 저격사건과 관련이 있었음을 알아내고 그 누구도 짐작하짐 못한 사건의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은 다른 추리소설과는 다르다. 깜짝 놀랄만한 사건현장도 없고, 숨막히는 추격신도 없으며 작품 전체에서도 그다지 긴장감을 느낄 수 없다. 오히려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분위기는 하얀 담배연기 같은 모호함이랄까. 사건을 수사하는 사와자키의 행동마저 때로는 느긋하고 여유로워보인다. 게다가 투덜거리고 구박하면서도 사와자키를 도와주는 니시고리 경부와, 알코올 중독자이고 도망자이면서  종이비행기로 슬쩍 정보를 알려주는 와타나베 모두 개성이 살아있다. 서로 좋아하지 않는 관계, 하지만 무작정 미워할 수만도 없는 관계, 좋다. 

옮긴이의 후기에는 작가가 이야기한 제목에 관한 에피소드가 나와있다. 그는 '밤' 그 자체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추악한 어둠을 '밤'에 비유한 것은 아니었을까. 밤은 모든 만물이 잠들고 고요가 찾아오는 시간이다.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본성이 틈새를 비집고 나올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시간. 표지의 먹물처럼 꿀렁거리는 욕망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는 시간. 그 밤은 범인 안에서 몇 번이나 되살아났을까 생각하게 한다. 

하라 료가 깊이 빠졌다는 레이먼드 챈들러와 필립말로에 대해서는 잘은 모르지만 이런 분위기의 이야기가 하드보일드라면 기꺼이 환영하겠다. 오늘도 어딘가의 쓸쓸한 밤의 골목을 담배 연기와 함께 코트를 휘날리며 어기적어기적 걷고 있을 듯한 사와자키 탐정. 그 후속편이 기다려지는 멋진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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