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잉 아이 - Dying Eye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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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 그려진 눈동자를 밤에 보고 있으려니 오싹합니다. 처음에는 '제목이 다잉 아이라고 표지에 눈동자를 그려넣다니! 요런요런 촌스러운!' 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나니 이보다 더 어울리는 표지는 없을 듯 해요. 게다가 '잊지마, 당신이 나를 죽였다는 사실을'이라는 문구는 마치 한 편의 호러영화를 연상하게 합니다. 이 소설은 추리소설일까요, 호러소설일까요? 정답은 둘 다 입니다. 개인적으로 호러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과연 얼마나 몰입해서 읽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시간 때우기용으로는 괜찮은 작품인 듯 합니다.
 
초반의 교통사고 장면을 묘사한 장면이 가장 무서운 부분이기도 해요. 한밤, 자전거를 타고 가던 기시나카 미나에의 몸이 자동차에 치이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그 부분이 너무도 생생해서 그만 상상해버리고 말았어요. 죽기 직전의 단 몇 초가 그렇게 천천히, 그렇게 고통스럽다면 정말 끔찍할 거에요. 초반부터 강렬한 장면을 만났더니 그 뒤의 호러가 오히려 묻히는 경향도 없지 않아 있는 듯 합니다. 이 장면을 무섭다고 생각하게 된 건 제가 운전면허를 딴 지 얼마 되지 않은 탓도 있어요. 언제 어디서 찾아올 지 모르는 사고. 나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을 다치게 할 수도 있다는 공포가 이 장면에 겹쳐져서 남의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스포가 있을수도 =ㅅ=;;;-
공포를 조장하는 존재에 대한 궁금증으로 흥미롭게 읽기는 했지만 인물설정에 다소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요. 기시나카 미나에의 영혼에 빙의된 것으로 보이는 미도리가, 사고의 원인제공자라 생각한 주인공 아메무라 신스케를 계속 유혹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심지어 그의 아이를 낳겠다는 말도 하는데, 미도리의 몸 안에 정말 기시나카 미나에가 있다면 저는 차라리 사랑하는 남편(기시나카 레이지) 과 오래 함께하고 싶을 것 같거든요. 아메무라 신스케를 유혹한 후 나중에 어떻게 할 심산이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의미없어 보이는 장면들이 자꾸 나와서 곤란했습니다. 이 미도리의 정체가 참 아리송해요. 정말 빙의된 건지, 아니면 죄책감 때문에 그런 행동들을 한 건 지. 뭔가 애매모호한 것이 엉터리로 만들어진 일본 공포영화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가장 무섭지만 가장 인상깊은 장면인 초반. 기시나카 미나에가 죽어가면서 사고를 낸 운전자인 미도리를 강렬한 원한을 담아 쳐다보았기 때문에 그녀에게 원혼이 빙의된다는 설정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 <비몽>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본 김기덕 감독의 영화인데요, 기억이 흐릿해서 맞는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둘 중 한 사람이 죽어가면서 곁에 있던 나비를 쳐다본 덕분에 그 곳으로 영혼이 옮겨간 듯한 장면이 있었거든요. 상황과 내용은 영 다르지만 한쪽은 몽환적으로, 한쪽은 공포스럽게 묘사했다는 점이 흥미로운 것 같아요. 음. 그러고보니 그런 설정을 한 영화가 또 한 편 있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나네요.
 
그나저나 앞으로 운전할 때 조심해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많은 운전자들이 운전대만 잡으면 폭력적으로 변한다는데 걸러지지 않은 잔인함과 분노라면 정말 엄청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조심하고 또 조심하기.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일에 죄책감을 가지기. 이것이 이 작품의 교훈이라면 교훈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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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3
혜경궁 홍씨 지음, 정병설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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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즐겨보는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조차 정조의 세상을 배경으로 한다. 성균관 유생들의 풋풋한 사랑과 유쾌한 모습들을 그리는 한편, 아들을 잃은 아비의 슬픔을 새겨넣었다는 '금등지사'를 찾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애쓰는 정조의 모습에서 이제 두 남녀주인공에게 닥칠 안타까운 운명을 예감한다. 어째서 그 많고 많은 조선의 왕들 중에서 영조와 사도세자, 정조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회자되는 것일까. 아들을 미워한 아비가 끝내는 그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게 만들었다는 비극적인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기 때문일까. 영화나 책을 통해 가장 드라마틱하게 전개되는 세 사람의 운명이 한 여인의 기록을 통해 공개되었다.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한국고전문학전집 중 [한중록]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과 <이산> 등을 통해 살핀 그 세 사람 사이에 진실로 무슨 일이 있었는 지 궁금하기도 했고, 어렸을 때는 만화로 읽은 [한중록]을 이제는 성인이 되었으니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가벼운 마음. 이미 어느 정도의 내용은 알고 있으니 더 새로울 것이 무엇이 있으랴, 싶었다. 하지만 예상보다 훨씬 깊은 마음과 고통의 세월이 여기에 있다. 오랜 세월을 다만 지켜보기만 하면서, 제한된 삶 속에서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혜경궁 홍씨. 그녀의 피눈물과 상처 속에서 근 2주간의 시간을 '어쩔 수 없이' 함께 해야만 했다. 다른 책이었다면 쉬이 덮어버렸을 지도 모를 기록. 그러나 그녀의 아픔의 시간을 따라가 주는 것이 의무감처럼 느껴진 것은 나 혼자 뿐이었을까. 

책은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담은 1부와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그린 2부, 친정과 정치사를 담은 3부로 이루어져 있다. <내 남편 사도세자> 에서는 그가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사도세자의 정서가 안정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성정은 그의 성장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 하다. 혜경궁 홍씨의 기록에 의하면 사도세자는 아주 어린 아기였을 때부터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고, 아버지의 사랑과 칭찬을 갈구했으나 끝내 얻지 못했다. 옹주들에게 치우친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오랜 시간 괴로워했고 엄하게 질책하는 아버지 앞에서는 마치 죄인인 양, 신하가 임금을 뵙는 양 주눅 든 모습이었다 한다. 혜경궁 홍씨는 그런 스트레스가 마음에 쌓여 광증을 얻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 것 같다. 그녀의 기록에는 영조를 탓하는 부분이 없으나 과연 마음마저 그랬을까. 사도세자는 정치적 싸움의 희생양이다, 사도세자의 광증이 너무 심해 정사에 해를 범하는 것을 보다못한 영조의 결단이다 등 논란이 끊이지 않지만 아들을 뒤주에 들여보내고 죽게 만든 아비의 마음은 여전히 알기 어렵다. 

<나의 일생> 에서는 혜경궁 홍씨의 탄생과 집안의 내력, 궁궐에 들어오는 과정, 궁중에서의 삶, 친인척들과의 관계를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내 남편 사도세자>와 뒤에 이어지는 <친정을 위한 변명> 에서 보이는 극한 설움과 슬픔이 조금 자제되어 있고 그 시대 사람들의 일상과 관계가 그려져 있다. <친정을 위한 변명>에서는 영조와 정조, 그리고 순조 초반의 정치사를 엿볼 수 있다. 임금의 며느리로서, 임금의 외가로서 자신의 집안이 얼마나 큰 고초를 겪었는 지, 정적인 화완옹주와 김귀주, 정순왕후와의 갈등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 지 그간의 힘겨운 시간들을 살펴볼 수 있다. 1부부터 3부까지의 시간들 속에서 그녀가 일생을 가슴 졸이며 살았다는 것을 알겠다.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심정. 그럼에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저 힘겨운 시간을 버텨내는 것만을 생각한 그녀의 회한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문득 표지에 희미하게 적힌 泣(읍)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운명이 가져다 준 엄청난 시련 속에서 묵묵히 살아낸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토해낸 [한중록] 은 더 뜨겁고 격정적으로 다가온다. 감칠맛 나는 해설이 그 기운을 더 북돋았던 것 같다. 혀에 착착 감기는 듯한 운율과 고풍스러운 미가 뿜어져나오는 문장들 속에서 괴롭고 슬프면서도 환희를 느꼈다.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감정의 물결이 괴로웠지만 이렇게 위대한 우리 문학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조선시대 어떤 문학도 도달하지 못한 인간의 깊은 내면에 닿아있다는 해설자의 설명에 백배 공감한다. [한중록]은 남편을 잃고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렸을 뿐 아니라 시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귀중한 역사서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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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칭 파이어 헝거 게임 시리즈 2
수잔 콜린스 지음, 이원열 옮김 / 북폴리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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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하하하하하! 1년 여의 긴 기다림이 끝나고 <헝거게임> 시리즈의 제2부 [캣칭파이어] 가 드디어 출간되었습니다. [헝거게임] 을 읽고 방안을 굴러다니기를 몇 번! 정말 길고도 긴 기다림의 시간이었습니다. 판엠의 수도 캐피톨이 더 이상 반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매년 조공인을 뽑아 생존게임을 벌이게 하던 어느 날, 우리의 주인공 캣니스의 용기와 지략, 본능에 의해 예기치 않게 두 명의 우승자가 나왔더랬죠. 경기 내내 그녀의 곁을 지켜준 피타와 집으로 돌아간 후 캣니스에게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 동안의 기다림이 너무 아까워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아껴가며 읽으려 했으나 결국 저도 모르게 몰입, 무아지경에 빠져 하루만에 다 읽어버렸습니다. 끙. 

독이 든 딸기를 꺼내 자신과 피타의 목숨을 구한 캣니스이지만 그녀의 악몽은 끊이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유대관계를 맺었던 11번 구역의 루가 죽음을 맞던 순간이 계속 꿈에 나타나고, 자신의 돌발적인 행동이 판엠 전체에 과연 어떤 영향을 미쳤을 지 노심초사. 결국 우승자 투어를 앞두고 찾아온 스노우 대통령의 협박(?)으로 그녀는 자신의 행동에 아무런 반항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합니다. 그것도 빠른 시일 안에. 하지만 캣니스가 모르는 사이 그녀는 어느 새 혁명의 상징이 되어 있었고 실제로 몇 개 구역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공포와 두려움으로 도주 계획까지 짠 캣니스. 그러나 자신이 혁명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동생 프림과 같은 많은 아이들을 구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용감하게 맞서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그 때. 반란 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스노우 대통령의 계략으로 헝거게임 75주년 기념 게임에 그녀와 그녀를 비롯한 역대 우승자들이 다시 한 번 헝거게임으로 돌아가게 되어버렸습니다. 

반란이 일어나리라는 것은 1부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2부에서 가장 궁금하고 기대했던 이야기는 캣니스와 피타, 그리고 게일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어요. 아마 많은 분들이 궁금하셨을 듯.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 아이같은 건 낳지 않겠다고 결심한 캣니스의 마음은 대체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요. 늘 목숨바쳐 자신을 지켜주고 캣니스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 피타와 짐승남의 냄새를 풍기는 게일. 현재 캣니스는 게일과 피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이는데요, 만약 다른 시리즈에서 여주인공이 이런 모습을 보였다면 냅다 욕을 해주었을텐데 캣니스가 미워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요. 저의 <헝거게임>시리즈에 대한 애정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시리즈를 읽으면 항상 '내가 이들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동생을 위해 헝거게임에 자원하고, 침착하게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고통스런 순간이 다가와 절망할지언정 금새 마음을 정리하고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는 캣니스에게서는 강한 의지와 당당함이 느껴져요. 자신의 안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늘 캣니스만을 생각하며 그녀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까지 되어 있는 피타를 보면서는 울컥하기도 하구요. 헝거게임 우승자 중 조공인을 뽑는다는 방송을 보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들어가게 해달라며 헤이미치에게 부탁했다는 대목에서는 또 한 번 바닥을 뒹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 피타 편애해요. 희생하는 피타이니만큼 그가 원하는 단 하나, 캣니스의 사랑을 꼭 받게 되면 좋겠어요. 

제가 너무 그들의 애정관계에만 집중한 것 같지만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긴장감도 굉장하고, 인물의 미묘한 심리 또한 잘 그려낸 작품입니다. 울컥울컥하게 만드는 장면도 있고, 문체는 건조한데 거기에서 뿜어져나오는 감정의 깊이가 꽤 좋아요. 반란의 시작, 행동이 있었으니 이제 마무리만 남은 셈인데 작가가 과연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완성할 지 기대가 큽니다. 3부는 부디 빨리 나왔으면 좋겠어요. 다시 1년이란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면, 그건 너무 슬픈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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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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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관심을 가진 작품은 [설계자들]이었다. 여기에서 '설계자'란 돈을 받고 누군가의 죽음을 의뢰받아 이를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게끔 전체적인 구성을 짜는 사람을 말한다는데, 영화 <인셉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뭔가 색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을 것만 같은 이야기. 하지만 작가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 지도 모른 채 무턱대고 덤벼들 수는 없는 법. 결국 오래 전에 구입하고 고이 책장에 모셔둔 [캐비닛]을 꺼낸다.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한 작품 [캐비닛]. 무슨무슨 상을 받았다는 것에 그리 큰 신경은 쓰이지 않지만 먼저 이 작품을 읽은 지인이 꽤 괜찮은 작품이라고 미리 언질을 주었기 때문인지 거는 기대가 꽤 크다. 

처음에 몇 장을 읽고 난 후 다시 표지를 들여다봤다. 분명히 장.편.소.설이라고 되어 있는데, 작품의 형식이 연작단편식이라 뭔가 잘못 안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분명히 '13호 캐비닛'이라는, 우리가 사무실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평범한 캐비닛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했는데, 갑자기 서인도제도의 마르티니크 섬 상피에르에서 일어난 화산폭발과 그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루저 실바리스가 툭 튀어나왔다. 재난에서 살아남은 후 사막으로 가서 상피에르 사람들에 대해 우스꽝스러운 글을 남긴 그. 순간 '우웅? 이상한데?'라는 생각이 든 것도 당연하지 싶다. 

13호 캐비닛은 주인공의 직장에 폐물처럼 숨겨진 캐비닛이다. 그 캐비닛의 원래 주인은 권박사. 그는 사십 년 동안 그 캐비닛 안에 들어있는 자료를 모으고 연구했다. 캐비닛 안 자료는 사실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바로 심토머(징후를 보이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니까. 누군가는 식수 대신 휘발유를 마시고 누군가는 강철을 씹어먹고, 또 누군가는 신문을 읽으면서 그 종이를 삼킨다. 몸에서 은행나무가 자라기도 하고, 도플갱어를 만나기도 하며 두 달에서 이 년, 혹은 더 긴 세월을 잠으로 보내는 토포러도 있다. 분명히 약속장소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는데 내리고 보니 몇 달, 혹은 몇 년이 통째로 사라진 것을 경험하는 타임스키퍼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고양이로 변신하고 싶어하는 남자, 한 몸에 남성과 여성이 공존하는 사람의 자료도 이 캐비닛 안에 들어있다. 분명히 실재하는 것은 아닐텐데 어느 순간 '나도 이렇게 되면 좋겠다!'고 바라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하지만 작품을 통해 보이는 것은 오히려 현실을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들, 하지만 실제로 겪는다면 조금 황당할 법한 이야기들이 줄줄 이어진다. 전체 분량이 조금 긴 듯도 하고, 뒤로 갈 수록 이야기가 살짝 산으로 가는 듯한 맛도 나지만 -어떻게 이런 존재들을 만들어낼 생각을 했을까- 감탄할 정도로 작가의 상상력이 대단하다. 한 챕터 한 챕터가 끝날 때마다 살짝살짝 등장하는 단상도 참 맛깔지다. 

우리가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지 어쩌면 있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닐까. 이 작품에서 주인공의 역할은 크지 않다. 그는 그저 평범한 소시민. 심토머들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할 수 있게 될 지 확신조차 갖지 못한 인물이다. 그의 역할은 다만 지켜보기, 혹은 심토머들의 배출구다. 어디에서도 풀 수 없는, 간혹 찾아오는 좌절과 절망감을 권박사에게, 그리고 이제는 주인공에게 털어놓으며 그들은 자신의 삶을 받아들인다. 어쩌면 그들의 세상에서는 그저 지켜봐주는 사람,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가장 절실했는지도 모르겠다. 

[캐비닛]을 읽고 나니 [설계자들]에 대한 기대가 한층 높아졌다. 아직 내 책장에는 읽을 책이 수없이 많이 쌓여 있고 읽고 싶은 책도 많지만 '어쩔 수 없이' 설계자들도 그 아이들의 가족이 될 것만 같은 느낌. 우리 소설도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이후 또또 새삼 깨달아서 괜히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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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놀 천사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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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애정해마지않는 지로 아저씨의 신작입니다 갑자기 요 한 문장으로 리뷰를 끝내도 상관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만 쓰고 싶은 마음이 마구마구 솟아나요. 그만큼 온몸으로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작품을 쓰는 좋은 작가에요. 지로 아저씨의 책을 읽고 리뷰를 쓸 때마다 언급했던 것 같지만, 다시 한 번! [칼에 지다]를 읽지 않았다면 아무 말도 하지 마시고 조용히 서점으로 달려가셔서 책을 손에 드시길 권유합니다. 어떤 분은 지로 아저씨의 작품이 모두는 좋지 않다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저같은 경우는 다른 작품들도 다 좋더라구요. 하지만 그 중에서도 [칼에 지다]는 그다지 취향을 타지 않는 작품이니 꼬옥! 읽어보세요  

[저녁놀 천사]는 모두 여섯 편의 이야기가 실린 단편집입니다. 저는 단편집을 그리 좋아하지 않음에도 지로 아저씨의 작품이라면 단편도 상관없이 모두 읽어요  네, 제가 좀 편애하는 경향도 있어요. 하지만 지로 아저씨의 책을 한 권이라도 읽어보셨거나 저를 좀 아시는 분이라면 '아, 얘는 이럴만 해'라고 아마 이해해주시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은 저의 지나친 착각일까요. 남들이 뭐라하든, 저는 계속 지로 아저씨를 사랑할 거에요! 편두통으로 인한 정신없는 리뷰, 그래도 계속 읽어주세요! 에헴! 약도 먹었으니 이제 얌전해질게요. 

표제작 <저녁놀 천사>는 자신의 가게에서 잠깐 일하다 사라진 여자를 그리워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첫번째 결혼으로 심한 상처를 받고 그 아픔을 잊을 수 없어 50이 넘는 나이까지 아버지와 둘이 장사를 하며 살아가는 이 남자의 가게에, 준코라는 여자가 잠시만 머물게 해달라며 통사정을 하죠. 처음에는 마뜩찮았던 남자지만 어느 새 그녀는 남자의 가슴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한 마디 말도 없이 사라진 준코. 그녀가 떠나고 일년 반 후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남자는 잊은 듯 살았던 그녀를, 자신이 얼마나 사랑했는 지 깨닫게 됩니다. 나이도 자실만큼 자신 어르신이 그 사실을 깨닫고 훌쩍훌쩍 우는 장면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모든 감정은 강렬하다는 것을 일깨워주죠. 

<저녁놀 천사>의 감성이 조금 약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그 뒤의 이야기들이 모두 주옥같습니다. <차표>와 <언덕 위의 하얀 집>은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두 작품의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차표>에 등장하는 소년이 우리나라의 <소나기>를 연상시킬만큼 착하고 순수하다면 <언덕 위의 하얀 집>의 소년은 이제 반항기에 접어든 아이에요. 둘 다 성장하기 위해 한 계단을 밟는다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 계단이 어떤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성장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를 비교하면서 읽어보신다면 절로 '캬~'소리가 나올 겁니다. 

<호박>은 공소시효를 일주일 남겨둔 남자와 우연히 그를 찾아낸 형사의 이야기가, <나무바다의 사람>은 작가의 자전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작품이에요. 하지만 이 여섯 작품 중에 가장 강한 '캬~'를 연발하게 만든 이야기는 바로 <특별한 하루>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읽고, 뒤통수를 탁 얻어맞은 느낌으로 연달아 세 번을 다시 읽었습니다. 작가가 만들어낸 추리소설같은 기발한 설정과 가슴으로 깊이 전해져오는 감동에 환성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한순간이라는 척도를 영원으로 바꾸는 방법을 발견한 사람들'의 이야기거든요. 저는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아낌없이 별 다섯을 칠했습니다! 

책을 읽다가 쪼콤 아쉬움을 느끼게 한 것은 단 하나의 번역이었습니다. <언덕 위의 하얀 집>에 '정사'라는 단어가 나오는데요, 문맥에 따르면 이 '정사'는 므흣한 그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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