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록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3
혜경궁 홍씨 지음, 정병설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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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즐겨보는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조차 정조의 세상을 배경으로 한다. 성균관 유생들의 풋풋한 사랑과 유쾌한 모습들을 그리는 한편, 아들을 잃은 아비의 슬픔을 새겨넣었다는 '금등지사'를 찾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애쓰는 정조의 모습에서 이제 두 남녀주인공에게 닥칠 안타까운 운명을 예감한다. 어째서 그 많고 많은 조선의 왕들 중에서 영조와 사도세자, 정조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회자되는 것일까. 아들을 미워한 아비가 끝내는 그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게 만들었다는 비극적인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기 때문일까. 영화나 책을 통해 가장 드라마틱하게 전개되는 세 사람의 운명이 한 여인의 기록을 통해 공개되었다.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한국고전문학전집 중 [한중록]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과 <이산> 등을 통해 살핀 그 세 사람 사이에 진실로 무슨 일이 있었는 지 궁금하기도 했고, 어렸을 때는 만화로 읽은 [한중록]을 이제는 성인이 되었으니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가벼운 마음. 이미 어느 정도의 내용은 알고 있으니 더 새로울 것이 무엇이 있으랴, 싶었다. 하지만 예상보다 훨씬 깊은 마음과 고통의 세월이 여기에 있다. 오랜 세월을 다만 지켜보기만 하면서, 제한된 삶 속에서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혜경궁 홍씨. 그녀의 피눈물과 상처 속에서 근 2주간의 시간을 '어쩔 수 없이' 함께 해야만 했다. 다른 책이었다면 쉬이 덮어버렸을 지도 모를 기록. 그러나 그녀의 아픔의 시간을 따라가 주는 것이 의무감처럼 느껴진 것은 나 혼자 뿐이었을까. 

책은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담은 1부와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그린 2부, 친정과 정치사를 담은 3부로 이루어져 있다. <내 남편 사도세자> 에서는 그가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사도세자의 정서가 안정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성정은 그의 성장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 하다. 혜경궁 홍씨의 기록에 의하면 사도세자는 아주 어린 아기였을 때부터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고, 아버지의 사랑과 칭찬을 갈구했으나 끝내 얻지 못했다. 옹주들에게 치우친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오랜 시간 괴로워했고 엄하게 질책하는 아버지 앞에서는 마치 죄인인 양, 신하가 임금을 뵙는 양 주눅 든 모습이었다 한다. 혜경궁 홍씨는 그런 스트레스가 마음에 쌓여 광증을 얻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 것 같다. 그녀의 기록에는 영조를 탓하는 부분이 없으나 과연 마음마저 그랬을까. 사도세자는 정치적 싸움의 희생양이다, 사도세자의 광증이 너무 심해 정사에 해를 범하는 것을 보다못한 영조의 결단이다 등 논란이 끊이지 않지만 아들을 뒤주에 들여보내고 죽게 만든 아비의 마음은 여전히 알기 어렵다. 

<나의 일생> 에서는 혜경궁 홍씨의 탄생과 집안의 내력, 궁궐에 들어오는 과정, 궁중에서의 삶, 친인척들과의 관계를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내 남편 사도세자>와 뒤에 이어지는 <친정을 위한 변명> 에서 보이는 극한 설움과 슬픔이 조금 자제되어 있고 그 시대 사람들의 일상과 관계가 그려져 있다. <친정을 위한 변명>에서는 영조와 정조, 그리고 순조 초반의 정치사를 엿볼 수 있다. 임금의 며느리로서, 임금의 외가로서 자신의 집안이 얼마나 큰 고초를 겪었는 지, 정적인 화완옹주와 김귀주, 정순왕후와의 갈등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 지 그간의 힘겨운 시간들을 살펴볼 수 있다. 1부부터 3부까지의 시간들 속에서 그녀가 일생을 가슴 졸이며 살았다는 것을 알겠다.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심정. 그럼에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저 힘겨운 시간을 버텨내는 것만을 생각한 그녀의 회한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문득 표지에 희미하게 적힌 泣(읍)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운명이 가져다 준 엄청난 시련 속에서 묵묵히 살아낸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토해낸 [한중록] 은 더 뜨겁고 격정적으로 다가온다. 감칠맛 나는 해설이 그 기운을 더 북돋았던 것 같다. 혀에 착착 감기는 듯한 운율과 고풍스러운 미가 뿜어져나오는 문장들 속에서 괴롭고 슬프면서도 환희를 느꼈다.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감정의 물결이 괴로웠지만 이렇게 위대한 우리 문학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조선시대 어떤 문학도 도달하지 못한 인간의 깊은 내면에 닿아있다는 해설자의 설명에 백배 공감한다. [한중록]은 남편을 잃고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렸을 뿐 아니라 시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귀중한 역사서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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