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컷 한국 현대사 - 빛바랜 한 장의 사진이 품고 있는 속 깊은 역사, 그 순간의 이야기
표학렬 지음 / 인문서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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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현대사 관련 책을 몇 권 읽었지만 이상하게도 현대사에는 계속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책을 읽어도 머리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들어왔다고 해도 그 때뿐, 또 금방 잊어버리게 되더라고요.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때 현대사를 열심히 공부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고대사, 고려사, 조선사까지는 책에 열심히 밑줄도 치고 암기면 암기, 이해면 이해하려고 무척 노력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부분들을 많이 잊었다고 해도 조금만 책을 읽으면 쉽게 이해가 되는데, 현대사는 수업 시간에도 대충, 설렁설렁 넘어갔던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왜였을까요. 이제야 살짝 의심이 들지만 뭔가 사회적으로 현대사는 수업시간에 비중을 두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 있었던 걸까요. 조금이라도 어렸을 때의 머리가 더 좋았던 건가-하는 난데없는 생각도 해가며 어쨌든 열심히 책을 읽는 오늘입니다.


설명만 나열된 책보다 한 장의 사진을 소재로 관련 사실을 소개하는 방법이 저에게는 꽤 효과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대체 어떤 진실이 숨어있는 것인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내용에 더 집중하게 해주었어요. 1910년부터 1971년까지 굵직하면서도 마음아픈, 통탄하게 되기도 하고 울분을 내뿜게 되기도 하는 역사들이 바로 그 사진 한 장에 들어있었습니다. 책은 칼을 찬 교사들이 찍힌 일제의 무단통치부터 설명하며 시작됩니다. 식민지 시대는 더 말씀드릴 필요도 없이 마음 아픈 사진들로 가득했어요. 고종 황제의 일본식 장례 사진은 우리 민족의 무력감을 여실히 드러내주었고,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한 꼬마들 사진에서조차 그들이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봉오동 전투의 홍범도 장군 사진, 이봉창 의사가 마지막으로 찍은, 활짝 웃는 사진 앞에서는 그만 마음이 시큰거리고 말았네요. 징용의 희생자들이 남긴 -엄마 배고파요-가 새겨진 글자를 찍은 사진 앞에서는 누구라도 눈시울을 적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해방 후 찾아온 냉전의 시대, 이승만 정부, 제주 4.3항쟁, 한국 전쟁과 정치싸움, 독재에 대한 저항 등이 한 장의 사진과 함께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역사의 모든 부분이 그렇지만 현대사 쪽 책을 읽다보면 -유독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문구가 많이 떠오릅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 안에 너무나 많은 아픔과 피눈물들이 담겨 있기 때문일까요. 이야기로서의 역사도 무척 좋아하지만, 결국 역사를 알고 공부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진심으로 생각해보게 됩니다. 다시는 마음 아픈 역사가 반복되어서는 안되니까요. 저처럼 현대사가 어렵게 느껴지시는 분들이라면, 사진과 함께 각인되는 역사가 무척 크게 다가오실 것 같습니다. 저도 이 방법으로 수업 연구 한 번 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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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을 위한 길고양이 안내서
이용한.한국고양이보호협회 지음 / 북폴리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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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한님의 <고양이 시리즈>는 고양이 관련 책들 중에서도 제가 무척 애정합니다. 고양이 사진도 많은 데다가, 사진으로도 고양이, 특히 길고양이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거든요. 이번에는 한국고양이보호협회와 함께 [공존을 위한 길고양이 안내서]를 펴내셨네요. 길고양이, 캣맘, 캣대디는 어느새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길고양이에 대한 애정과 연민으로 한 끼 식사를 챙겨주는 것조차 이웃들의 눈치를 봐야 하고, 고양이들 또한 그들에 대한 이유모를 분노와 증오로 잔인한 범죄의 대상이 되기도 해요. 그 분노와 증오는 고양이들을 챙기는 사람들에게까지 번져가죠. 이 책은 그런 길고양이와 캣맘, 캣대디에 대한 이해서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용한님의 <고양이 시리즈>는 고양이 관련 책들 중에서도 제가 무척 애정합니다. 고양이 사진도 많은 데다가, 사진으로도 고양이, 특히 길고양이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거든요. 이번에는 한국고양이보호협회와 함께 [공존을 위한 길고양이 안내서]를 펴내셨네요. 길고양이, 캣맘, 캣대디는 어느새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길고양이에 대한 애정과 연민으로 한 끼 식사를 챙겨주는 것조차 이웃들의 눈치를 봐야 하고, 고양이들 또한 그들에 대한 이유모를 분노와 증오로 잔인한 범죄의 대상이 되기도 해요. 그 분노와 증오는 고양이들을 챙기는 사람들에게까지 번져가죠. 이 책은 그런 길고양이와 캣맘, 캣대디에 대한 이해서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책의 크기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어요. 아주 아담한 사이즈에 요렇게 귀여운 고양이들의 모습을 새겨넣은 스티커와 길고양이 사료(먹이) 안내문 스티커와 쥐약 및 독극물 살포의 즉각 중단을 요구하는 스티커도 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스티커들은 적당한 곳에 붙이면 되는 것인지 궁금하네요) 고양이 스티커는 너무 귀여웠는데 스티커들을 보니 살짝 마음이 아파왔습니다.

 

책에는 길고양이와 관련된 여러가지 정보가 실려 있습니다. 가령 저는 노랑이나 고등어 삼색이같은 별칭이 애칭같은 거라 생각했어요. 예전 작가님의 책을 읽으면서 등장했던 고양이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작가님이 붙이신 거라고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가봅니다. 사진에 찍힌 애칭 이름 이외에도 카오스, 턱시도와 젖소, 올블랙이라는 이름들도 있답니다.  
 

 

고양이 용어사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웠습니다. 알고 있는 것도 꽤 많았지만 TNR(포획-중성화/불임수술-방사를 뜻하는 국제공용어, 길고양이 개체수를 적절하게 도와주는 프로그램) 같은 용어는 처음 들어봤습니다. 아마 이 용어를 읽어본다면, 고양이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이나 혹은 미움을 가진 사람들도 친근함을 느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봅니다.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길고양이 입양시에 필요한 물품 목록들도 적혀 있습니다. 저는 아기도 있고(고양이까지 성실하게 돌볼 자신이 없어요) 실제로 길고양이를 입양할 수 있을 정도로 용기있지도 않지만 혹시라도 길고양이를 입양할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참고로 해도 좋을 것 같아요.


이외에도 길고양이에 대해 알아야할 모든 것, 길고양이 관련 Q&A, 맨 뒤에는 고양이 관련 명언까지 실려 있습니다. 목록을 전부 옮겨적을 수는 없지만 말 그대로 길고양이에 대한 지식과 길고양이가 맞이하는 상황별 위기, 그리고 그에 따른 사람들의 대처방법 등이 적혀 있어요. 제목 그대로 안내서죠.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길고양이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갑자기 태도가 돌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적어도 하나의 생명에 대한 연민은 가지게 되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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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두 챕터 읽고 내일 다시 오세요 - 책으로 처방하는 심리치유 소설
미카엘 위라스 지음, 김혜영 옮김 / 책이있는풍경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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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 좋아하는 대상인 을 다른 누군가도 좋아해준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거예요. 발령 첫 해, 왜 그렇게도 힘들었던 걸까요. 생각보다 학생들을 좋아할 수 없었고, 마치 시험에 모든 기력을 소진한 듯 아무런 열정도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상담도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것 자체에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처음이니까 잘해내고 싶은 마음은 있어서 제 나름대로 생각해낸 방법이 책상담이었어요. 아이들과 이야기하다가 뭔가 권해주고 싶은 책, 읽어보면 좋은 책들을 추천해주면 저의 부족한 면이 조금쯤은 채워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비록 얼마 못가긴 했지만요. ‘책상담을 하려면 아주 엄청난 양의 책을 읽어야 가능한데, 그 때는 다시 책을 손에 쥐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라 제가 너무 부족했거든요. 결국 저도 적응하고 수업준비하는 데 정신 없는 시간을 보내다가 그렇게 1년이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 때 초반 2년 동안 함께했던 아이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이 책 두 챕터 읽고 내일 다시 오세요] 는 상담을 하고 책을 같이 읽고, 내담자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책을 처방해주는 독서치료사 알렉상드르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이름의 유래는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쳤던 어머니는 마침 그를 얻게 되었을 때 알렉상드르 뒤마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집니다. 편견 때문에 핑크빛 표지에 한 여성이 선글라스를 끼고 책을 들고 있는 모습에, 책을 처방해주는 사람도 남자, 똥꼬발랄한 이야기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주인공은 세상에서 책이 전부인, 아내 멜라니가 이제는 곁을 떠나버린 한 남자입니다. 교통사고로 얼굴이 망가진 소년 얀과의 상담을 주축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독서치료사인 그를 찾아요. 그들과 함께하며 알렉상드르는 수많은 책 속의 수많은 구절을 떠올리고 혹은 함께 읽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과 멜라니,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는 엄청난 의문을 껴안은 채 앞으로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죠.

 

책과 독서치료사를 소재로 한 소설이라 여러 작품들의 문구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문구들이 그리 많지 않아서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정말 집중하면서 읽었어요. 초반 설정과는 달리 생각보다 무겁지 않은 분위기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알렉스는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책을 처방해주거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만, 그 자신 또한 그들을 통해 자신에 대해 되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해요. 상담자는 그 자신이지만 오히려 그들을 통해 치유받기도 한다고 할까요. 삶에서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들이 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연결된다는 것, 참 멋진 일인 것 같습니다.

 

이 책을 보니 저도 나중에 복직하면 다시 책상담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좋아하는 장르는 미스터리, 스릴러쪽인데. . 다양한 분야의 독서가 필요할 것 같군요. 핫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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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엄마와 인도 여행이라니! - 세 여자의 ‘코믹액숀’ 인도 방랑기
윤선영 지음 / 북로그컴퍼니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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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준 작가님의 <엄마 시리즈>를 무척 좋아합니다. 엄마와의 추억이야기, 함께 하는 여행이야기 모두에 깊이가 있고 사진이나 글들도 마음에 정겹게 다가와요. 저뿐만 아니라 저희 엄마도 팬이세요. 그래서 태원준 작가님의 책이 나올 때마다 구입해서 함께 읽곤 했답니다. 그런 작가님이 전격 추천한 책이라니, 당연 궁금할 수밖에요. 10년 넘게 홀로 여행하다가 좋은 것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어 그 첫 스타트를 엄마, 이모와 함께 끊은 윤선영 저자. 그녀들이 선택한 여행지는 세상에, 무려 인도입니다. 저도 항상 동경만 하고 정작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다녀와서 한 번만 가는 사람은 없다는 여행지로 유명한 그 인도요.

 

저자가 엄마와 함께 여행하게 된 계기는 간단하면서도 가슴 아픕니다. 열다섯, 집이 망하고 힘든 시간들을 견뎌낸 저자는 여행이 주는 자유로움에 매료되어 오랜 시간 혼자만의 여행을 즐기죠. 그 누구의 시선도 개의치 않고, 가난한 집 딸, 망한 집이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는, 누구도 자신을 알지 못하는 낯선 여행지가 주는 자유로움을 만끽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좋은 것을 보니 엄마가 생각났다고 해요.


엄마는 좋은 곳에 오빠와 나를 제일 먼저 데려갔고, 좋은 음식은 내 입에 먼저 넣어줬는데 나는 이렇게 혼자서만 좋은 것들을 만끽하고 있구나. <p6>

좋지 않은 형편에도 여행을 다니는 그녀를 친척들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단 한 사람, 오직 엄마만은 그녀의 여행을 지지하고 응원해줍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떠나게 된 엄마와의, 아니 엄마와 이모와의 여행. 어디로 여행가고 싶으냐는 물음에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인도라고 대답한 엄마는 그 곳에서 무엇을 찾고 싶으셨던 걸까요.

 

58세 박귀미 여사(엄마), 55세 박귀연 여사(이모)들과의 여행은 순탄치만은 않습니다. 물론. 하지만 가족과의 여행은 바로 거기에 묘미가 있는 것 아니겠어요. 엄마는 손으로 카레를 떠먹는 딸내미의 등짝을 후려치며 밥투정을 하기도 하고, 기차에서 만난 모르는 인도여성-심지어 전날 딸내미와 멱살잡이까지 했는데 말이에요-과 함께 말은 통하지 않으면서 과일을 나누어 먹기도 하고, 집을 떠나왔음에도 마치 집인 것 마냥 숙소에서 빨래와 청소를 하며 여행을 즐깁니다. 이모는 캘커타의 이불빨래 널기 봉사 후 끙끙 앓기도 하고, 유명 유적지에 가서는 보지 않고 앉아있겠다며 어린아이같은 면모를 보이기도 하며, 망고 알레르기가 있음에도 한국보다 망고가 싸다는 이유로 망고를 무한흡입해서 얼굴이 퉁퉁 붓기도 해요.

 

태원준 작가님의 책에서도 그랬지만, 여행지에서의 엄마들은 왜 그렇게 꽃 같고, 귀여우신 건가요. 그리고 왜 그렇게 마음을 저리게 하는 건지. 사실 저는 책의 도입부분을 읽을 때부터 이상하게 눈물이 났습니다. 우리 엄마는 여행을 못해본 것도 아닌데 책 속 박귀미 여사가 꼭 우리 엄마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나는 언제 또 엄마랑 단 둘이 여행을 가볼 수 있을까, 애틋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라나시에서 갠지스 강을 물끄러며 바라보며 너는 이 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서 좋았겠다-는 그 말에 또 눈물이 났습니다. 집이 망하고 엄마는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셨을까요. 딸내미의 마음 고생도 만만치 않았겠지만, 자식들이 원하는대로 해줄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아는 엄마의 마음은, 그 속이 말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 엄마가 난생 처음 해외 여행을 가서 미처 자신도 몰랐던 모습을 깨닫고, 있었는지도 몰랐던 감정들을 느끼는 그 과정이 너무 애달프게 다가왔어요. 그리고 이제라도 엄마가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엄마의 여행 후기가 실려 있습니다. 솔직하면서도 담담하게 그려진 그 소회가, 참으로 따뜻하고 다정하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엄마와 이모, 저자는 다시 한 번 함께 여행을 한 것 같아요. 이모가 필리핀 여행을 가려는 저자에게 자신도 데려가라며 생떼(?)를 쓰는 와중, 엄마에게서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오거든요. -나도 데려가라- 그들의 필리핀 여행은 어땠을지, 부디 또 한 번 책으로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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퐅랜,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
이우일 지음 / 비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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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떠나 그 곳에서 정착하며 살아볼 수 있다는 건, 커다란 행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에게 떠난다는 건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거든요. 겁도 많고, 소심하고, 생각도 많아서 어딘가로 떠난다는 생각만으로도 살짝 스트레스를 받는 저로서는,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 안주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을 정도에요. 이곳에서의 삶을 과감히 정리하고 다른 어딘가에서의 생활을 생각한다는 것, 과연 저의 인생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더욱. 아주 오랜 시간을 투자한 여행기, 정착기 등을 읽으면 부럽기도 하면서 질투가 나요, 무척. 내가 감히 도전해보지 못하는 것을 이렇게 쉽게 실행해버리는 사람들이 있구나. 도저히 깰 수 없다고 생각했던 나의 껍질이, 누군가에게는 투명막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구나. 가슴도 답답해지죠. 그런데 지금 걱정되는 단 한 가지는, 내가 그 껍질을 영원히 깨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 껍질을 우리 곰돌군도 똑같이 가지게 될까봐, 그게 가장 두렵습니다. 절대 저의 삶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곰돌군은 저보다는 좀 더 넓은 세상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꼈으면 하는 부모의 바람이랄까요.

 

만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에세이스트, 수집가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가지고 있는 저자 이우일님은 2015년 가을 어느 날,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미국 오리건주의 작은 도시 포틀랜드(퐅랜)로 떠납니다. 만화가이자 그림책 작가인 아내, 그림공부 중인 딸 은서, 노령의 고양이 카프카까지 함께요. 적지 않은 도시를 여행했고, 이집트의 작은 바닷가 마을 다합과 캐나다의 몬트리올에서도 장기간 머문 저력이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퐅랜의 삶이 다른 누구보다 조금쯤은 쉽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퐅랜에서의 그들의 삶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어요.

 

비가 와도 우산도 쓰지 않고 그저 맞고 다니는 퐅랜의 사람들, 타투가 대중적인 도시, 1970년대부터 정비된 미국 최대 규모의 자전거 도로를 소유한 곳, 퐅랜의 맛집, 중고가게, 맥주가 맛있고 서로에게 생큐를 외치는 밝은 도시, 빈티지 책을 새책과 함께 진열하는 파월 북스, 독특한 페스티벌-조용한 음악 페스티벌, 세계 누드 자전거 타기 대회(자전거를 좋아하는 짝꿍에게 우리도 여기 가서 살게 되면 꼭 참가해보라고 말해두었습니다), 강 건너기 대회(물 위에 둥둥 떠서), 여자 수염 대회 등-이 열리는 퐅랜의 전체적인 모습과 그 곳에서 가족과 함께 하는 삶, 이를테면 수집가로서의 자신, 가족에 대한 단상, 이베이와 관련된 일화 등이 간결하고도 유머있게 쓰여 있습니다. 마치 나는 쓸테다, 읽으려면 읽든지-같은 느낌이랄까요. 흐흐.

 

거의 마지막 부분은 은서가 대학을 가기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되어 있습니다. 은서도 은서지만 작가의 아내분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딸을 따라가는 것을 마뜩치 않게 생각하는 엄마라니, 아마 저였다면 안절부절 걱정이 태산이라 말린다고 해도 따라갔을지도요. 아이에게 무엇을 어디까지 해줄 것인가, 어떤 삶의 지표를 제시해줄 것인가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볼 수 있었던 부분이었어요.

 

은서가 떠난 후 가족들은 태평양의 섬으로 떠나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 곳에서 일 년 정도 머물 예정이라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에요. 만약 짝꿍이 저에게 지금 떠나자고 한다면 전 훌쩍 따라나설 수 있을까요. 그 언젠가를 한 번, 아직은 포기하지 못하겠습니다.

모든 것엔 끝이 있다.

끝이 있으니 우린 즐기며 살 수 있다.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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