퐅랜,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
이우일 지음 / 비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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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떠나 그 곳에서 정착하며 살아볼 수 있다는 건, 커다란 행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에게 떠난다는 건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거든요. 겁도 많고, 소심하고, 생각도 많아서 어딘가로 떠난다는 생각만으로도 살짝 스트레스를 받는 저로서는,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 안주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을 정도에요. 이곳에서의 삶을 과감히 정리하고 다른 어딘가에서의 생활을 생각한다는 것, 과연 저의 인생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더욱. 아주 오랜 시간을 투자한 여행기, 정착기 등을 읽으면 부럽기도 하면서 질투가 나요, 무척. 내가 감히 도전해보지 못하는 것을 이렇게 쉽게 실행해버리는 사람들이 있구나. 도저히 깰 수 없다고 생각했던 나의 껍질이, 누군가에게는 투명막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구나. 가슴도 답답해지죠. 그런데 지금 걱정되는 단 한 가지는, 내가 그 껍질을 영원히 깨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 껍질을 우리 곰돌군도 똑같이 가지게 될까봐, 그게 가장 두렵습니다. 절대 저의 삶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곰돌군은 저보다는 좀 더 넓은 세상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꼈으면 하는 부모의 바람이랄까요.

 

만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에세이스트, 수집가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가지고 있는 저자 이우일님은 2015년 가을 어느 날,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미국 오리건주의 작은 도시 포틀랜드(퐅랜)로 떠납니다. 만화가이자 그림책 작가인 아내, 그림공부 중인 딸 은서, 노령의 고양이 카프카까지 함께요. 적지 않은 도시를 여행했고, 이집트의 작은 바닷가 마을 다합과 캐나다의 몬트리올에서도 장기간 머문 저력이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퐅랜의 삶이 다른 누구보다 조금쯤은 쉽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퐅랜에서의 그들의 삶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어요.

 

비가 와도 우산도 쓰지 않고 그저 맞고 다니는 퐅랜의 사람들, 타투가 대중적인 도시, 1970년대부터 정비된 미국 최대 규모의 자전거 도로를 소유한 곳, 퐅랜의 맛집, 중고가게, 맥주가 맛있고 서로에게 생큐를 외치는 밝은 도시, 빈티지 책을 새책과 함께 진열하는 파월 북스, 독특한 페스티벌-조용한 음악 페스티벌, 세계 누드 자전거 타기 대회(자전거를 좋아하는 짝꿍에게 우리도 여기 가서 살게 되면 꼭 참가해보라고 말해두었습니다), 강 건너기 대회(물 위에 둥둥 떠서), 여자 수염 대회 등-이 열리는 퐅랜의 전체적인 모습과 그 곳에서 가족과 함께 하는 삶, 이를테면 수집가로서의 자신, 가족에 대한 단상, 이베이와 관련된 일화 등이 간결하고도 유머있게 쓰여 있습니다. 마치 나는 쓸테다, 읽으려면 읽든지-같은 느낌이랄까요. 흐흐.

 

거의 마지막 부분은 은서가 대학을 가기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되어 있습니다. 은서도 은서지만 작가의 아내분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딸을 따라가는 것을 마뜩치 않게 생각하는 엄마라니, 아마 저였다면 안절부절 걱정이 태산이라 말린다고 해도 따라갔을지도요. 아이에게 무엇을 어디까지 해줄 것인가, 어떤 삶의 지표를 제시해줄 것인가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볼 수 있었던 부분이었어요.

 

은서가 떠난 후 가족들은 태평양의 섬으로 떠나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 곳에서 일 년 정도 머물 예정이라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에요. 만약 짝꿍이 저에게 지금 떠나자고 한다면 전 훌쩍 따라나설 수 있을까요. 그 언젠가를 한 번, 아직은 포기하지 못하겠습니다.

모든 것엔 끝이 있다.

끝이 있으니 우린 즐기며 살 수 있다.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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