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남
슈노 마사유키 지음, 정경진 옮김 / 스핑크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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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위남은 세 번째 희생자를 찾고 있었다. 이미 두 명의 소녀를 목졸라 죽이고 숨진 사체에 가위를 찔러넣은 가위남. 그의 타겟은 정해졌다. 고등학교 2학년 다루미야 유키코. 그녀를 죽이기 전에 사전조사를 하고 적당한 때를 노리던 중, 다루미야 유키코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 심지어 범행수법은 가위남, 그 자체. 누구지? 누가 그 아이를 죽인 거지? 분명 나는 죽이지 않았는데. 다루미야 유키코는 왜 가위남의 수법으로 살해당한 것인가. 아무 죄의식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가위남이 자신의 모방범을 찾아나선다.

 

가위남의 정체도 궁금했지만 모방범이 누구인지도 궁금했다. 왜 그의 범행수법을 따라한 것인가. 가위남을 열렬히 숭배하는 정신이상자인가, 우연한 살인을 가위남의 소행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인가. 살인자가 또 다른 살인자를 찾아나선다는 설정이 아이러니하게도 여겨졌지만 과연 이 둘의 대결(?)이 어떤 결말을 맞을지 호기심이 생겼다. 초반에 묘사되는 가위남의 외모는 뚱뚱하고 인기가 없을 것 같은 타입이다. 오타쿠의 부정적인 이미지 같았다고 할까. 타인에게 관심이 없고 마음이 꽁꽁 숨겨져 있으나 비교적 맡은 일을 잘 해내고 똑똑한 스타일. 이 외모에 대한 묘사마저 작가의 트릭이었음을 후반부에 가서야 알 수 있었다.

 

이 가위남은 인격 장애를 안고 있다. 진짜 자신 이외의 '의사'라고 지칭하는 또 다른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눈다. 이미 여러 번 자살을 시도한 가위남은 또 한 번의 죽음을 준비하고, 깨어나자마자 의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정말 죽고 싶은 게 아니기 때문에 죽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의사. 이후 작품의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의사와 가위남의 대화는 흥미진진하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 가위남의 내면이 어떠한지 유추할 수 있다. 미치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은 인간. 그 자체가 광기이고 병인 인물. 지나칠 정도로 강해서 왜 소녀들을 죽이는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어떻게 죽일지만 생각하는 가위남. 가위남은 두 번째 희생자가 영어를 잘 한다는 정보를 얻고 영어를 잘 하는 혀는 어떻게 생겼는지 보기 위해 그녀의 뺨을 도려낸다. 그들의 대화를 듣다보면 이 의사가 본래의 인격이고 가위남이 다른 인격이 아닌가 의심스러워지기도 하는데 결국 의사 인격이 모방범과 대치하며 그의 살인 동기와 수법을 간파해낸다.

 

으아.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단순히 어두운 욕망에 물든 오타쿠 남성의 광기에 사로잡힌 살인행각이라 생각했다. 의사의 인격이 등장했을 때도 좀 독특하다고 여겼지 작가가 만들어놓은 트릭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는데, 이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그의 덫에 걸려들지 않았을까. 거의 100%가 아닐까 싶다. 조금 주의를 기울인다면 아주 사소한 사항 하나로 어쩌면 그 트릭을 간파해냈을 수도 있지만, 선입견이라는 것이 참 무서운 것이다. 진실이 밝혀진 후부터 아주 그냥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설마 표지가 스포인가. 아니 이것도 선입견인가. 내가 지금 뭘 읽은 거지. 그리고 뒷통수를 맞았을 때 늘 그랬던 것처럼 처음부터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제13회 메피스토 상 수상작, 2000년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0' 2위라는 명성에 어울리는 작품이다. 2007년에 국내에 소개되었고 12년만에 복간된 [가위남]. 싹둑, 싹둑, 싹둑이라는 홍보문구에 소름이 돋아 대체 얼마나 잔인하건가 부들부들 떨었지만 범행수법보다 가위남의 심리를 들여다보는 과정이 더 섬뜩한 소설이었다. 어떻게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는가. 2013년 타계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천재 작가의 작품을 많이 읽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조만간 스핑크스 출판사에서 [거울 속은 일요일]이라는 작품이 출간된다고 하니 절대 놓쳐서는 안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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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가락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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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야에코, 아들 나오미,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함께 사는 마에하라 아키오. 어느 날, 빨리 집에 돌아오라는 아내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무슨 일인가 싶어 귀가한 그의 앞에 어린 소녀의 시체 한 구가 놓여있다. 범인은 그의 아들 나오미. 평소 참을성이 부족하고 폭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아들이 이런 큰 범죄를 저지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키오는 당장 경찰에 자수하자고 아내를 설득하지만 그녀는 아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절대 그럴 수 없다며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반대한다. 결국 소녀의 시체를 근처 공원 화장실에 유기한 아키오. 소녀의 옷에 묻어있던 그의 정원의 잔디들을 다 떼어내지 못하고 돌아온 아키오는 언젠가 경찰이 분명히 자신의 집에 찾아올 것을 예감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태연히 밥을 먹고 게임에만 몰두하는 아들을 바라보는 심정은 참담하지만, 나오미는 물론 자신과 가족들의 평판까지 생각할 때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했다. 구부정한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소름끼치는 한 가지 생각. 이 일이 성공하더라도 그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평생을 죄책감과 고통 속에 살아야할 것이다. 하지만 일단은 상황을 벗어나는 것만 생각하자. 그래서 그는 결심한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 형사 '가가 교이치로'가 10년만에 귀환했다. 현대문학에서 '가가 형사' 시리즈의 전면 개정판이 출간되었고, 또 다른 출판사에서는 이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 출간된다. 실로 히가시노 게이고, 아니 '가가 형사' 시대의 도래라고 할 수 있을만큼 돌아온 그에 대한 관심과 인기가 엄청나다. 나도 구판을 전부 소장하고 있지만 개정된 책을 보고 있노라니 어찌 구매하지 않을 수 있을까. 책을 좋아하고 히가시노 게이고를 좋아한다면 저절로 손이 갈 수밖에 없는 시리즈. 그 중에서도 부모로서, 딸로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붉은 손가락]을 먼저 만났다.

작품을 다 읽고난 마음은 참담하고 슬프다. 과연 부모로서, 아들로서 아키오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그것 뿐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그런 그의 모습을 마주하며 나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만약 우리 아들들이 어떤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 죄 앞에서 절대 도망치지 말자고. 밤에 누웠을 때 발 뻗고 자지 못할 일은 하지 말자고. 자식들도 한 인간인만큼 어떤 상황에서의 선택은 온전히 그들의 몫이다. 하지만 그 선택이 잘못된 결과를 불러오거나 범죄에 가담하게 된 경우에는, 부모인 이상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나눌 수밖에 없다. 시즈쿠이 슈스케 작가가 [염원]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지금까지의 평온한 시간과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앞으로의 삶을 자식과 함께 속죄하는 시간으로 채울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자식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그들로부터 속죄할 기회를 빼앗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답은 나온다. 진심으로 자식을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아키오와 야에코인가, 아니면 그의 어머니인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 [나이먀 잡화점의 기적]을 최고로 꼽는다. 미스터리하면서도 인간과 삶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붉은 손가락]을 읽고 나니 어째서 수많은 독자들이 '가가 형사'에 열광했는지 알 것 같다. 사건에 대해 통찰력이 있고 날카롭게 분석하면서도, 진실을 드러내는 과정에서는 결코 인간미를 잃지 않는다. 탐문수사를 펼치면서도 억울한 소문에 휘말리지 않도록 배려하고, 아키오가 그 자신을 위해 스스로 죄를 실토할 수 있도록 모든 상황을 설계한다. 그런 그가 어째서 죽음을 앞둔 아버지의 병상에는 찾아가지 않는 것인가, 의아했다. 그의 가족도 아프고 괴로운 사정이 숨어 있을 거라 감히 짐작했는데, 결말을 읽고 나니 그제서야 이해가 된다. 그는 정말 지독하게도 타인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려는 남자다.

출간된 지 10년이 넘었음에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시대를 뛰어넘는 멋진 작품이다.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이름이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가 될만하다고 다시 한 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장에 꽂힌 구판 도서들에게는 약간 미안하지만, 역시 예전에 읽지 않고 남겨두길 잘했다. 아직 읽을 수 있는 '가가 형사' 시리즈가 남아있음에 무척 기쁘다. 너무 기뻐서 춤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 한 권씩 개정판으로 읽어나가면서 가가 형사의 매력에 풍덩 빠져들어가보겠다. 그의 유혹을, 더 이상 마다하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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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 카멜레온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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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차한 택시기사가 신기한 생물이라도 본 듯 두 눈을 딱 멈추고 순간 무심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얼버무리듯이 헛기침을 하는 얼굴. 마실 것을 사러 들어간 편의점 점원에게서 미소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얼굴. 그런 얼굴, 아주 '못난' 얼굴의 소유자가 바로 기리하타 교타로다. 그러나 이 못난 얼굴의 교짱의 직업은 <IUP 라이프>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라디오 DJ.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멋진 목소리로 월요일부터 토요일, 밤 10시부터 새벽 1시까지 청취자들의 귀를 사로잡는다. 매일 일상에서 일어난 사소한 일들을 각색해 방송하고, 방송이 끝나면 거의 매일 찾는 바 if에서 나이를 초월한 단골손님들과 담소를 나눈다. 그러던 어느 날, 웬 여성이 바에 들어와 '죽였다'라고 중얼거리고 돌아간다. 수수께끼의 그녀 미카지 케이는 다음 날 다시 찾아오고, 교짱은 그녀에게 자신의 정체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가 난감한 상황에 처한다. 사과를 빌미로 교짱과 그 친구들의 협력을 요구하는 케이. 그녀의 요구대로 행동하지만 온갖 소동에 휘말리는 교짱과 친구들. 미카지 케이의 목표는 무엇이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못난 얼굴에 멋진 목소리를 가진 라디오 DJ 교짱과 다양한 성격을 가진 if의 친구들. 유명한 업소에서 제일 잘 나가는 호스티스지만 유부남의 아이를 갖기 위해 양배추를 열심히 먹어대는 모모카 씨, 해수 및 해충을 구제하는 사업장을 운영하면서 만성 치질에 시달리는 이시노자키 씨, if 근처 게이바에서 일하는 호스티스 레이카 씨(심지어 그는 키가 훤칠하게 크고 다리도 길며 코가 높고 눈도 커서 만화에 나오는 미남같은 느낌이다), 아사쿠사 길에 위치한 '시게불단'의 7대 점주인 일흔 살의 시게마쓰 씨, 그리고 if의 미녀 마담 데루미 씨. 교짱은 그들의 이야기도 각색해서 라디오에서 들려주었고, 연령은 다양하지만 그들은 모두 교짱의 친구다. 교짱은 중학교 때 병으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살았지만, 여동생이 출산을 위해 어머니와 외가로 가면서 지금은 혼자 지내는 중. 그런 생활 중에 미카지 케이가 불쑥 그의 삶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상황이나 대사들이 읽기에 무겁지 않고 엉뚱해서 명랑활극이라 여겼다. 하지만 미카지 케이와 연관된 사건이 일단락되고 밝혀진 사실 앞에서, 나는 한밤중에 책을 읽다 엉엉 울어버렸다. 동시에 어째서 '투명 카멜레온'이 이 작품이 제목이 되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투명 카멜레온은 교짱이 초등학교 때 어떤 친구집에 놀러갔다가 들은 이야기다. 그 친구는 다른 동급생들이 멀리하는 아이였는데 어느 날 자신이 카멜레온을 키우고 있다면서 놀러오라고 한다. 그 말에 카멜레온이 궁금해진 교짱은 친구를 따라 그 아이 집으로 갔는데, 친구는 어떤 공간을 가리키며 저기 카멜레온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어쩐지 투명한 카멜레온이 보이는 것 같은 기분에 교짱도 실제로 그 곳에 카멜레온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다. 교짱의 라디오가 친구들에게 해 준 일은 그런 것이었다. 약간의 거짓말과 염원을 담은, 당신만을 위한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세계라고 해도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에게만 느껴지는 세게를 선사해 준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를 선사해 준 교짱에게 친구들도 최선을 다해 교짱을 위로한다.

이 작품에 대한 감상을 정말 멋지게 적고 싶은데 가슴이 너무 먹먹해서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소설의 매력을 전부 드러내기에 내가 가진 능력이 너무 비루해서 안타까울 지경이다. 다만, 이 한 가지는 말할 수 있겠다. 그 동안 미치오 슈스케의 작품을 꽤 많이 읽어왔지만 이 [투명 카멜레온]이야말로 나에게는 그의 대표작이 될 것이며, 내 인생작 리스트에 올라갈 것이라고. 웃음과 미스터리와 눈물을 모두 안겨 준 정말 훌륭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훌륭함은 읽지 않으면 진정 알 수 없다. 그러니 부디 읽어주시라. 놓쳤으면 아까울 이 작품을, 제발 당신도 놓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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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맥베스 부인
니콜라이 레스코프 지음, 이상훈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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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이자 가장 마지막으로 발표된 [맥베스]. 스코틀랜드의 두 장군 맥베스와 뱅코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던 중 정체불명 세 명의 마녀와 마주친다. 그녀들은 맥베스가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예언을 남기고, 이 예언을 바탕으로 맥베스는 왕위에 대한 야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편지로 먼저 이 내용을 전해들은 맥베스의 아내는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덩컨 왕을 암살하기 위한 계략을 세우고, 맥베스는 그래도 암살 앞에서 주저한다. 그런 맥베스의 나약함을 꾸짖는 레이디 맥베스. 결국 맥베스는 덩컨 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왕위에 올랐음에도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으로 망령을 보는 등 괴로워하던 맥베스는 폭정을 일삼으며 국민들의 원성을 사고, 뱅코의 자손이 훗날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예언에 뱅코까지 암살한다. 레이디 맥베스 또한 몽유병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다 결국 세상을 떠나고, 그녀의 죽음 후 맥베스는 점점 나락으로 떨어져간다. (네이버 참조)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의 카테리나 리보브나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의 나락의 길을 고스란히 따라가는 인물이다. 상인 집안에 시집와 남편과 애정없는 결혼생활을 이어가던 그녀. 남편이 사업으로 인해 집을 비운 사이 하인인 세르게이와 은밀한 사이로 발전한다. 대담하게 침실에까지 그를 끌어들여 농밀한 시간을 보내는 두 사람. 카테리나 리보브나와 세르게이는 두 사람의 사이를 알아챈 시아버지를 살해하고, 일을 마무리짓고 돌아온 그녀의 남편마저 저 세상으로 보내버린다. 마침내 두 사람의 세상을 열게 되었다고 생각한 카테리나 리보브나. 그러나 그런 그녀 앞에 예상치 못한 상속자가 나타나고, 어린 아이에 불과한 그 상속자마저 처리하는 순간, 살인의 현장이 발각된다.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지게 된 현실 앞에서도 카테리나는 오직 사랑만을, 세르게이와 함께 하는 순간만을 생각하지만, 이제 남자의 마음은 그녀를 떠났다. 다른 여자의 품에서 카테리나를 비웃는 세르게이.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질투에 사로잡힌, 엄청난 모욕을 당한 여자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 이 가련한 여인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비록 세 명이나 살해한 잔혹한 여인이지만, 나조차도 하품이 나올만큼 권태로운 시간을 보내던 여인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애정 없는 결혼 생활, 좀처럼 생기지 않는 아이, 자유분방한 성정을 숨기고 고고한 척 할 수밖에 없는 현실. 온 신경을 쏟을 아이도 없고 독서도 좋아하지 않는 그녀에게 세르게이라는 독약은 분명 자극제였을 것이다. 그녀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알고 있지 않았을까. 이 관계가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이고, 언젠가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될 것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멈출 수 없었던 것이다. 작품에서 그녀의 심리가 섬세하게 드러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 또한 맥베스처럼 두려웠던 게 아닐까. 지금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권태로운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어떻게든 세르게이라는 왕좌를 움켜쥐고 나락으로 떨어진다 해도 함께 있고 싶어했던 마음. 어쩌면 나는 그 마음을 평생을 가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러시아 문학은 왠지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과연 이 작품은 어떤 분위기일까 궁금했다. 그래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가 생각나 조금은 친근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작품 해설을 보니 역시 약간은 어렵다. 나에게는 가학적이고 야수성을 지닌 레이디 맥베스의 모습보다, 삶에 어떤 의미도 두지 않던 여인이 유혹에 빠져 죄를 짓고 끝내 파멸하고야 마는 잔인한 운명의 모습이 두드러졌던 탓일까. 영화에서는 어떻게 표현했을지 한 번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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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365 - 소곤소곤 들려주면, 새록새록 꿈꾸는 아이
장지혜.최이정 지음, 제딧 그림 / 서사원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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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2019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보고 그 크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텀블벅 펀딩 진행할 때부터 관심 가지던 책이라 실물이 궁금해 보러 갔었거든요. 두껍고, 크고, 제가 좋아하는 요소는 전부 갖춘 이야기책이라고 할까요. 흐흐. 첫째 곰돌군과 함께 그림책을 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오히려 제가 그림책에 흠뻑 빠져서 이런저런 책들을 사들이느라 집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인데요, 여러 이야기가 한 권의 책에 담겨 있다니 또 궁금할 수밖에요. 교과서에 실린 전래 동화, 세계 명작, 세계 동화, 전래 동화, 세계 옛날 이야기, 전래동요, 전기 등 다양한 분야의 갖가지 이야기들이 다채롭게 실려 있다는 점이 특장점이에요!

하지만 다른 그림책들과 비교해 글밥이 엄청 많은 편이라 글자를 줄줄 읽기만 하면 아이들은 금방 코~꿈나라로 가버리고, 부모님 혼자 책을 읽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제가 읽어보고, 아이와 함께 읽어보니 이 책은 부모님들의 이야기 구성능력이 살짝쿵 필요합니다. 그러니 아이에게 읽어주시기 전에 미리 준비할 시간이 약간 필요해요. 먼저 읽어보고 어떤 부분을 강조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들려줄지' 생각하실 시간이요. 아이들과 함께 오랫동안 책을 읽어오신 분이라면 아이가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고 어떻게 하면 흥미있게 듣는지 대강 파악하고 계시겠지만, 혹 그 시간이 오래되지 않는다고 해도 각 이야기들이 어른에게는 그리 긴 편이 아니라 준비하는 데 큰 부담을 느끼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한 장르의 365가지 이야기가 하루에 한 편 읽을 수 있게 되어 있다는 점일텐데요, 또 요렇게 읽다가 아이가 궁금해하면 더 길게 나와있는 책을 찾아볼 수도 있고, 비슷한 이야기를 찾아보면서 발전시켜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루에 한 편씩이라고 정해진 것도 아니니 아이와 즐겁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앞뒤로 뒤적이면서 읽어나갈 수도 있고요. 저의 경우에는 아이가 뒤적뒤적 하다가 그림만 보고 '엄마, 이거! 엄마 이것도!' 해서 앉은 자리에서 여러 편 같이 봤는데, 책은 반복해서 보는 경우가 많으니 굳이 '하루에 한 편!'이라고 정해두시지 않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책은 지금은 아이보다 제가 더 좋아해요. 읽다보면 계속 읽게 된다니까요! 제법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몰랐던 이야기를 읽으면 재미있고, 알고 있는 이야기를 읽으면 반갑고 해서 제가 더 신나게 읽고 있습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면서 볼 수 있는 이야기책이라고 할까요. 약간 사전같은 느낌도 들지만, 한 번 펼치면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이야기의 세계로 초대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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