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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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친한 친구와 이 작품의 영화를 보러 갔다가 <트랜스포머 3> 군단에 밀려 결국 그냥 돌아왔습니다. 너무 강력한 군단 탓일까요, 아니면 저희의 게으름(?) 탓일까요? 엄밀히 말하자면 게으름은 아니었습니다. 저희가 맞출 수 있는 시간은 오늘 뿐이었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영화명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팬더와 그의 친구들+ 로보트들만이 온 극장가를 차지하고 있더이다. 뒤늦게 다른 곳에서는 아직 상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움직이기에는 우린 너무 지쳐있었답니다. 책을 읽고 그 희열에 몸을 부르르 떨었던 저로서는 로보트군단도 흥미롭긴 했지만 어쩌면 좋은 영화 한 편을 놓친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영화는 확실히 극장에서 보는 맛과 집에서 DVD로 감상하는 맛이 다르다는 것이 저의 생각.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지만 제가 이 책을 읽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읽고 나서 또 '아구, 안 읽었으면 아까워서 어쩔 뻔 했어!'를 외칠 거라는 것도요. 작품에 대해 아무 정보도 없었지만 표지가 주는 첫인상만 보고 제 맘대로(그야말로 제 맘대로!)  '으흥, 마피아나 갱단이 나오는 소설 아냐? 이런 건 관심없어!'라며 일찍부터 한 구석으로 치워두었기 때문이죠. 그건 어쩌면 주인공 탓인지도 모릅니다. (에헴!) LA의 뒷골목 범죄자들을 주로 변호하면서 그들의 너저분한 돈을 받아 부를 챙기려는 변호사 미키 할러가 등장하기 때문이죠. 죄를 정말 지었는지 어쨌는지는 관심없고 오로지 어떤 판결을 받느냐에만 온 관심을 쏟아붓는 그에게, 어느 날 일생일대의 사건이 등장합니다.

 

역시나 거대 돈을 찾아 오늘도 눈을 희번득하던 미키 할러 앞에 할리우드의 초거대 부동산 업자 루이스 룰레가 찾아옵니다. 여성을 강간, 폭행했다는 이유로 붙잡힌 그는 미키에게 변호를 요청해요. 또 역시나 그가 했는지 어쨌는지는 둘째고 그가 가진 부를 통해 한밑천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미키는 증거를 모아 재판준비를 합니다. 그런 그 앞에 드러난 과거 어느 사건의 진실. 어쨌거나 법정소설인만큼 다른 스릴러에 비해 액션은 조금 약한 편이지만 법정에서 '치고 빠지기' 전술을 구사하는 상황은, 가슴이 두근두근할만큼 긴장감 있었습니다. 과연 무엇으로 범인을 무릎꿇게 만들고 이 상황을 타개할 것인가도 중점이 되겠지만, 빠른 속도로 읽히는 재판장면은 정말 재밌었어요.

 

미키 할러는 깨끗한 변호사는 아니에요. 법과 정의보다 자신이 벌어들일 수 있는 돈과 현재 살고 있는 집에 집착하는 속물 중의 속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말 죄를 지었는지 아닌지에도 별로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얄미운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죠. 하지만 어쩌면 그와 같은 변호사도 세상에는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약간은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게 하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변호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악하지 않아, 매기. 유죄이긴 하지만 그래도 악한 건 아니라고. 무슨 뜻인지 알지? 차이가 있어. 그 친구들의 말을 듣고 노래를 들으면,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해야 했는지 이해하게 돼. 그 사람들은 그저 살아가려고 한 것뿐이야. 주어진 환경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거라고. 그 중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이 태어난 치들도 있고.    -p274

정확히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대목을 보는 순간, 어쩌면 미키 할러도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 지금같은 변호사의 모습을 설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키 할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고한 의뢰인, 그리고 그 무고한 의뢰인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못한 자신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가 변호해온 주 고객은 가볍든 무겁든 죄를 저지른 사람이었어요. 뒷골목 범죄자들. 그런 그들에게서 검은 돈을 받아냄으로써 무고한 의뢰인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봉쇄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또한 마음 한 구석에서는 더러운 돈을 받는 자신의 모습과 그들의 모습을 비교하며 어떻게든 삶을 살아내려 하는 인간의 본질에 눈뜬 것일지도 모르죠. 돈에 눈이 멀어 받아들인 루이스 룰레 사건도 있었지만. 그가 실제인물이 아니니 뭐라고 할 수는 없으나, 그에 대한 저의 생각은 이러했답니다.

 

매튜 매커너히가 등장한 영화는 많이 보지 못했지만 이 영화만큼은 나중에 DVD로라도 꼭 보고 싶습니다. 처음엔 원래 라이언 필립에 쪼콤 더 관심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과연 매튜가 검은 돈을 받는 미키 할러의 뺀질함과 법정에서의 멋진 장면을 어떻게 연기했을지 확인해보고 싶어요. 더불어 그가 집착해 마지 않던 그의 저택. 그의 저택 앞에서 보이는 장관 또한 어떻게 묘사했을지 궁금합니다. 어쨌거나저쨌거나! 무더운 여름을 개시하는 작품으로 손색이 없는 재미를 선사해주었습니다. 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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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내지 않고 핀란드까지 - 스무 살 때는 알 수 없었던 여행의 의미
박정석 지음 / 시공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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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느끼면서 새삼스레 깨달은 한 가지가 있다면, 여행서에 관한 평점은 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읽는 사람이 어디를 가고 싶어하는 지, 읽을 때의 심리는 어떠한 지, 손에 든 여행서의 내용 중에서 무엇을 가치 있는 것으로 판단할 것인 지 등이 그 여행서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책장의 두 칸을 꽉 채울 정도로 수많은 여행서를 읽어왔지만, 그 중에서 평점으로 별 다섯을 준 여행서는 손에 꼽을 정도다. 맛집이나 유명 관광지 정도만 나열되어 있어서도 안 되고, 너무 자신의 감상에 젖어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부담을 느껴서도 안 되며, 그렇다고 또 너무 딱딱한 여행서도 읽고 싶지 않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 책을 읽을 때, 나는 딱 동유럽에 까무러칠 정도로 가고 싶었지만 여행계획의 틀어짐으로 2년 후에나 가게 될 것 같은 상황에 불만 가득한 상태였다. 또한 10일동안 터키로 여행을 떠나신 부모님 대신 집을 지키며 다소 불안한 심리상태까지 보이고 있었다고 할까. 이 여행서에서 무엇을 가치있는 것으로 판단했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가고 싶던 폴란드, 터키, 거기에 발트 3국과 핀란드까지 둘러볼 수 있으니 이보다 훌륭한 책이 어디 있으랴. 너무 감상적이지도 않고 너무 쿨하지도 않게 담담한 서술방식도 마음에 들었고, 남자라 생각했던 저자가 (표지에서 가방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남잔지 여잔지 알 수 없는 상태인 데다 저자의 이름을 보고 처음부터 여자라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을까;;) 사실은 여자라는 점도 확 와 닿았으니 저 평점은 '개인'적인 '만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으시라.

 

동해안의 시골 마을에 집을 짓고 산 지 1년 반. 점점 식물화되어 가는 모습에 염증을 느낀 그녀, 터키에서 시작하고 핀란드로 끝내는 여행을 시작한다. 내가 이 책을 특히 마음에 들어한 이유 또 한 가지는 여행을 떠나기 전 그녀의 심리상태가 나와 무척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만만하게 세상을 정복할 듯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그토록 갈망하고 원했음에도 자신이 있던 공간이 어느 순간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해 보이는 탓에 쉽게 발을 내디딜 수 없는 여행.

 


 터키, 동유럽, 핀란드, 모두 까마득하다. 지루하던 마당일이 갑자기 할 만하게 느껴지고 밥 주기 귀찮던 닭들도 새삼 통통하고 장해 보였다. 밤이 되어 침대에 누울 때마다 이런 아늑한 곳이 세상에 또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My sweet, sweet home...     -p25

그러나 그대로 정체되어 있을 수는 없는 법. '구구거리는 닭들을 뒤로한 채' (구구거리는 건 비둘기가 아니었나;;) 이스탄불로 날아간다. 친절한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 스무 살 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여유로움을 가지고 시작한 여행. 루마니아에서 만난 친구 줄리안과의 즐거운 추억과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당한 강도사건. 아름다운 발트 3국과 고요한 호수와 오두막의 나라 핀란드에서 접한 아름다운 자연 경관들은 내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어느 새 머릿속으로 여행 경로를 짜보는 것이다. 나는 두 달은 시간을 낼 수 없으니 한 달로 계획한다면 어디를 갈 수 있을까, 영어를 못해도 충분히 갈 수 있을 것 같아, 짐은 많이 필요없고 강도의 위험이 있으니 카메라는 잘 가지고 다녀야지.

 

스무 살 때는 알 수 없었던 여행의 의미-라는 부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든, 나는 이 문구에서 경제적인 여유로움을 느꼈다. 저자의 다른 책들은 읽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어떤 독자도 그녀의 다른 책에서 비슷한 점을 느꼈던 듯 하다. 그녀가 돈이 많은 사람일 것 같다, 비싼 호텔에서 편히 자고 쉬엄쉬엄 여행하는 사람인 것 같다-는 느낌을 나도 받았지만 그런 그녀의 여행도 크라쿠프에서 카메라를 도난당함과 동시에 막을 내린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도 여행의 묘미?!

 

그녀의 여행 자체도 부럽지만 그 여행동안 만난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 가장 부러웠다. 여행에서 새로운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것. 이것보다 더 멋진 일이 있을까. 친절하든 친절하지 않든 나와 얼굴을 마주대하고 대화를 나눈 사람이 있다는 것. 생각만해도 가슴이 부르르 떨린다. 그런데 이런 인연들에 더해 '두리틀'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사람과의 관계도 참 궁금하다. 단순한 친구? 아니면 조금 애매모호한 관계? 푸헤.

 

오랜만에 마음에 든 여행서를 읽어 기쁘기도 하지만 지나온 시간동안 나는 무엇을 했나 싶어 알싸해지기도 한다. 나에게 다시 혼자 떠날 기회가 찾아올까. 그 때 나는 두려움에 주춤하지는 않으려나. 그 혼자 떠난 여행에서 소중한 인연을 맺을 수 있을까. 그 때가 되면 나도 저자처럼 나의 집을 가장 달콤한 공간으로 여기며 미적거릴지도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떠날 마음이 있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 나는 사진으로만 보던 바로 그 곳에 그림처럼 서 있을 자신이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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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잠 재의 꿈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0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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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의 이름은 무라노 젠조. 통칭 무라젠이라 불리는 그는 특종꾼이다. 사건의 냄새를 맡고 자료를 모으고 진실을 파악하는 희열을 사랑하는 열정적인 남자. 기리노 나쓰오 여사의 <미로 시리즈>에 푹 빠져 있는 사람이라면 '무라노'라는 성만 등장해도 그가 누구인지 아마 눈치챘을 것이다. 시크한 듯, 쿨한 듯 자신을 포장하고 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 외로움을 간직한 서늘한 그녀, 미로의 아버지 되시겠다. [얼굴에 흩날리는 비] 와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을 통해 살짝살짝 얼굴만 내밀어주시던 그가, 드디어 딸인 미로를 제치고 전면에 나섰다. 그럴 수밖에. 이 작품에서 미로는 아직 한 살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그 동안의 살짝살짝 등장으로 무라젠의 성격이나 정체를 궁금해하던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라도 하겠다는 양, 무라젠의 사건해결과 미로와의 인연맺기가 공개된다.

 

올림픽을 앞둔 도쿄. 전쟁 중 심각한 타격을 입었지만 어느 새 도시는 복구되어가고 휘황찬란한 불빛과 함께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그런 도시에서 소카 지로라는 남자가 폭발물을 설치하거나 사람들을 저격하는 사건들이 벌어지고 특종꾼인 무라젠은 진실과 범인을 알아내기 위해 오늘도 여기저기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다. 그 와중에 가출한 조카 다쿠야를 데리러 문학계에서 유명한 사카이데 가(家)를 찾게 되고 그 곳에서 만난 소녀 다키의 살해 용의자로 몰린다. 오랜 세월 같이 일하던 군단이 와해되는 가운데 소카 지로 사건과 다키 살해사건을 해결하려는 무라젠. 화려함을 가장한 어둠 속에서 발견한 진실은 그를 미로가 있는 곳으로 이끈다.

 

여러 사건들이 얽히고 설킨 작품이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소카 지로 사건, 사카이데 가에서 우연히 만났을 뿐인 소녀 다키의 살인 사건, 오랫동안 몸담아 일하던 군단의 와해. 과연 이 모든 사건들이 어떻게 해결될 지 주목하게 되지만 읽고 나면 진실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된다. 사건의 진실이라는 것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추악한 데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조금 억지 설정이 아닌가 싶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순간순간 긴박함을 느낄 수는 있지만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에서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로 중반 이후까지도 조금 느리게 전개되다가 후반부에 갑자기 달려가는 느낌이, 조금 용두사미처럼 보이기도 한다. 개연성의 부족함이랄까.

 

이 작품의 매력은 사건해결이나 줄거리가 아니라 무라젠이라는 인물 자체가 풍기는 분위기다. 미로의 아버지로서 베일에 쌓여 있던 그가 베일 밖으로 몸을 드러낸 순간, 그는 독자의 기대를 한껏 받으며 활동을 시작한다. 누구보다 능력있고 누구보다 열정적이지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듯 보이는 그의 분위기는 딸인 미로와 닮아 있다. 누군가에게 협박당해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진실을 파헤치는 모습은 정의라기보다 그저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안타까움마저 느끼게 한다. 그가 지니고 있는 근원적인 쓸쓸함 때문일까.

 

기억을 더듬어보지만 무라젠과 미로, 그녀의 어머니 사이의 자세한 내용은 알 길이 없다. 시리즈들 중에서 가장 먼저 출간된 [다크] 를 보면 알 수 있으려나. 다만, 미로 보다는 무라젠 쪽이 좀 더 활동적이고 뭔가 더 탐정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훨씬 마음에 든다. 하고 싶은 일만 받아들이는 자존심 강한 능력자 무라젠. 그와 미로,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더 쓰여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슬쓸한 분위기로 끝없이 질주하는 이 남자,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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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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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나는 열일곱이 되었다. 사람들은 내가 지금까지 산 것이 기적이라 말한다. 나 역시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와 비슷한 사람 중 열일곱을 넘긴 이는 매우 드물다. 하지만 나는 더 큰 기적은 항상 보통 속에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다. 보통의 삶을 살다 보통의 나이에 죽는 것, 나는 언제나 그런 것이 기적이라 믿어왔다. 내가 보기에 기적은 내 눈앞의 두 분, 어머니와 아버지였다. 외삼촌과 외숙모였다. 이웃 아주머니와 아저씨였다. 한여름과 한겨울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p47

제가 생각하기에도 저의 삶은 평범한 편입니다. 중간중간 힘든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저의 생활만으로도 저는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부모님 다 계시고, 동생도 있고, 받을 수 있는 교육도 받았고, 제가 목표로 했던 것도 이룰 수 있었으니까요. 앞으로 저의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자신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이런 평범함이, 이런 보통의 삶이 부디 오래도록 지속되었으면 하는 것 뿐입니다. 그런 저의 모습에 엄마는 가끔 '너는 너무 모험정신이 없는 것 같다, 도전을 좀 해봐라' 타박을 하시곤 합니다. 딸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좀 더 특별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저는 그 때마다 마음 속으로 '엄마, 나는 지금도 충분히 행복해. 이런 평범함 속에서 살 수 있어서, 그리고 그런 평범함에 감사할 수 있어서'라고 중얼거리곤 합니다.

 

어떤 강렬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그저 어느 순간 '평범함'이, 최상이 아닌 '보통'의 삶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깨달았을 뿐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아름이의 이야기에 끌렸던 건지도. 아름이는 열 일곱, 어린 나이지만 보통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얼마나 기적과도 같은 일인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아름이의 부모님은 열 일곱에 아름이를 낳았고, 아름이는 현재 열 일곱이지만 부모님의 열 일곱 시절과 아름이의 열 일곱 시절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조로증. 한 시간이 한 달과 비례하고, 한 달이 일 년과 맞먹는 세월. 그 시간 속에서 아름이는 남보다 더 아파했고 그만큼 더 성숙해졌습니다. 엄마의 심장 소리를 들으면서 두근두근 세상에 터져나온 그는, 다시 아빠의 심장 소리를 들으면서 두근두근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합니다.

 

쉽지 않은 소재입니다. 독자의 감성을 건드리면서도 유치하게 눈물바람만 나게 해서도 안 되고, 억지 감동을 전달해서도, 지금의 삶의 소중함을 인위적으로 느끼게 해서도 안 될 것 같은 작품이거든요. 하지만 작가는 아름이의 힘든 현실을 담담하게, 때로는 소소한 재미를 섞어 객관적으로 묘사합니다. '불쌍해'라는 감정이 아닌, 우리 주위에 이런 삶도 있구나-를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고 할까요. 무엇보다 '한아름'이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이죠. 나이 든 어린 영혼의 순수함과 성숙함에 매료되고 그의 아픔이 나의 아픔처럼 느껴지는 순간, 작품이 마음으로 들어옵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어요. 김애란 작가의 글은 처음 접했는데요, '깊이'는 느껴지지 않는다고 할까요. 어쩌면 단순한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소재의 무거움과 캐릭터의 매력에 비해 작가의 문장이 보여주는 깊이는 얕은 느낌입니다. 또 뭔가 더 할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것을 꺼내지 못하고 표면만 건드린 것 같다는 기분도 들고요. 이것저것 생각할거리를 던져주고 소소한 감동도 있었지만, 뭔가가 모자란 기분입니다.

 

아름이의 입장도 입장이지만 아름이의 부모님들도 자꾸 눈에 밟힙니다. 미안해하는 아름이에게 미안해 하지 말라며,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쁘다며 웃는 그의 아버지를 보면서 부모란 무엇일까, 새삼 생각해보게 돼요. 그리고. 언젠가 만나게 될 나의 아이와 내가 부디 '평범함' 속에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욕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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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바이, 블랙버드
이사카 고타로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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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현실이라면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한 남자가 있습니다. '어쩌다보니' 다섯 명의 여자와 사귀게 된 호시노 가즈히코군. 양다리도 아니고 다섯다리나 걸치고 있는 호시노군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생긴 돈 문제로 2주 뒤에는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런 그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은 거구의 여성 마유미. 남의 고통을 즐기는 마유미는, 앞으로 남은 2주 동안 다섯 명의 여자와 제대로 된 이별을 하고 싶다는 호시노군과 함께 그녀들을 방문하죠. 단순히 그녀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싶다는 가학적인 즐거움을 위해서요. 절대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들 콤비를 맞이한 다섯 명의 여자들.

 

이별을 선언한 호시노군과 마유미 앞에서 그와 처음 만난 날의 추억들을 떠올리며 '그것도 거짓말이었어?'를 내뱉고야 마는 그녀들은 나이도 직업도 환경도 다양합니다. 오랜 불륜에 시달리다 이제야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났다는 생각에 행복했다는 그녀1, 혼자 몸으로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그녀2, 도둑 흉내내기라는 괴상한 취미를 가진 그녀3, 이비인후과에서 처음 만난 숫자에 집착하는 그녀4, 유명 여배우인 그녀5 까지 모두 호시노군의 이별 선언 앞에서 황망하기 그지없습니다. 게다가 키와 몸무게가 모두 180은 되어보이는 마유미까지 데리고 나타났으니 말이죠. 그렇게 이별을 선언하며 돌아다니는 동안 운명의 그 날은 다가오고, 호시노군은 지금 버스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유미와 함께.

 

책소개에도 나와있는 것처럼 이 책은 소설을 독자들이 우편으로 받아보는 '우편소설'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기획으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작가에게 직접 편지를 받는다'는 형식은 저처럼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죠. 총 6화로 구성된 작품 중 5화를 1화씩 독자에게 발송하고 나머지 1화를 합쳐 발행된 것이 이 작품. 과연 작가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전해받은 그 독자가 누구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합니다. 그 작가가 이사카씨니까요! 던지는 이야기마다 매번 색다른 매력을 선사하는 작가가 바로 이 이사카씨인데요,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코믹하게 영역을 넘나들며 재미를 선사합니다. 제가 단편을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이기도 해요.

 

호시노군과 마유미, 그녀들과의 아기자기한 이야기들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은 캐릭터의 힘이 큽니다. 마유미라는 존재는 아마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 거에요. 엄청난 거구이면서도 날렵하고, 늘 사전을 들고 다니며 자신의 사전에는 동정이라느니, 배려라느니 하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다는 걸 직접 보여주는 괴상한 여자입니다. 그녀들이 이별 앞에서 상처받는 모습을 즐기며 그 상처를 더 후비는 데 한 몫 하기도 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굉장한 배려심(?)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정의에 불탄다기보다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이들에게 주먹과 거친 입담으로 대응하는 마유미의 과거가 정말 궁금했지만, 그녀에 관한 단서는 그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흥미로운 듯.

 

호시노군은 이제 버스를 탑니다. 마유미가 평소에는 보여주지도 않던 동정심을 발휘해 한 가지 방법을 알려주지만 미련스러울 정도로 착하고 섬세한 이 남자, '남들에게 폐를 끼칠 수 없다'면서 버스에 오릅니다. 호시노군은 어디로 가게 될까요. '버스'의 정체는 뭘까요.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 마유미의 행동에 따스한 여운을 남겨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인 '바이바이 블랙버드'는 노래 제목으로 '너와 헤어져 이제부터 행복해진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호시노군은 마유미와 헤어져 행복해질까요, 불행해질까요. 아니, 헤어지기는 할까요. 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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