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잠 재의 꿈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0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그의 이름은 무라노 젠조. 통칭 무라젠이라 불리는 그는 특종꾼이다. 사건의 냄새를 맡고 자료를 모으고 진실을 파악하는 희열을 사랑하는 열정적인 남자. 기리노 나쓰오 여사의 <미로 시리즈>에 푹 빠져 있는 사람이라면 '무라노'라는 성만 등장해도 그가 누구인지 아마 눈치챘을 것이다. 시크한 듯, 쿨한 듯 자신을 포장하고 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 외로움을 간직한 서늘한 그녀, 미로의 아버지 되시겠다. [얼굴에 흩날리는 비] 와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을 통해 살짝살짝 얼굴만 내밀어주시던 그가, 드디어 딸인 미로를 제치고 전면에 나섰다. 그럴 수밖에. 이 작품에서 미로는 아직 한 살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그 동안의 살짝살짝 등장으로 무라젠의 성격이나 정체를 궁금해하던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라도 하겠다는 양, 무라젠의 사건해결과 미로와의 인연맺기가 공개된다.

 

올림픽을 앞둔 도쿄. 전쟁 중 심각한 타격을 입었지만 어느 새 도시는 복구되어가고 휘황찬란한 불빛과 함께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그런 도시에서 소카 지로라는 남자가 폭발물을 설치하거나 사람들을 저격하는 사건들이 벌어지고 특종꾼인 무라젠은 진실과 범인을 알아내기 위해 오늘도 여기저기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다. 그 와중에 가출한 조카 다쿠야를 데리러 문학계에서 유명한 사카이데 가(家)를 찾게 되고 그 곳에서 만난 소녀 다키의 살해 용의자로 몰린다. 오랜 세월 같이 일하던 군단이 와해되는 가운데 소카 지로 사건과 다키 살해사건을 해결하려는 무라젠. 화려함을 가장한 어둠 속에서 발견한 진실은 그를 미로가 있는 곳으로 이끈다.

 

여러 사건들이 얽히고 설킨 작품이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소카 지로 사건, 사카이데 가에서 우연히 만났을 뿐인 소녀 다키의 살인 사건, 오랫동안 몸담아 일하던 군단의 와해. 과연 이 모든 사건들이 어떻게 해결될 지 주목하게 되지만 읽고 나면 진실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된다. 사건의 진실이라는 것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추악한 데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조금 억지 설정이 아닌가 싶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순간순간 긴박함을 느낄 수는 있지만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에서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로 중반 이후까지도 조금 느리게 전개되다가 후반부에 갑자기 달려가는 느낌이, 조금 용두사미처럼 보이기도 한다. 개연성의 부족함이랄까.

 

이 작품의 매력은 사건해결이나 줄거리가 아니라 무라젠이라는 인물 자체가 풍기는 분위기다. 미로의 아버지로서 베일에 쌓여 있던 그가 베일 밖으로 몸을 드러낸 순간, 그는 독자의 기대를 한껏 받으며 활동을 시작한다. 누구보다 능력있고 누구보다 열정적이지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듯 보이는 그의 분위기는 딸인 미로와 닮아 있다. 누군가에게 협박당해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진실을 파헤치는 모습은 정의라기보다 그저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안타까움마저 느끼게 한다. 그가 지니고 있는 근원적인 쓸쓸함 때문일까.

 

기억을 더듬어보지만 무라젠과 미로, 그녀의 어머니 사이의 자세한 내용은 알 길이 없다. 시리즈들 중에서 가장 먼저 출간된 [다크] 를 보면 알 수 있으려나. 다만, 미로 보다는 무라젠 쪽이 좀 더 활동적이고 뭔가 더 탐정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훨씬 마음에 든다. 하고 싶은 일만 받아들이는 자존심 강한 능력자 무라젠. 그와 미로,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더 쓰여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슬쓸한 분위기로 끝없이 질주하는 이 남자,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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