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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내지 않고 핀란드까지 - 스무 살 때는 알 수 없었던 여행의 의미
박정석 지음 / 시공사 / 2011년 5월
평점 :
이 책을 느끼면서 새삼스레 깨달은 한 가지가 있다면, 여행서에 관한 평점은 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읽는 사람이 어디를 가고 싶어하는 지, 읽을 때의 심리는 어떠한 지, 손에 든 여행서의 내용 중에서 무엇을 가치 있는 것으로 판단할 것인 지 등이 그 여행서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책장의 두 칸을 꽉 채울 정도로 수많은 여행서를 읽어왔지만, 그 중에서 평점으로 별 다섯을 준 여행서는 손에 꼽을 정도다. 맛집이나 유명 관광지 정도만 나열되어 있어서도 안 되고, 너무 자신의 감상에 젖어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부담을 느껴서도 안 되며, 그렇다고 또 너무 딱딱한 여행서도 읽고 싶지 않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 책을 읽을 때, 나는 딱 동유럽에 까무러칠 정도로 가고 싶었지만 여행계획의 틀어짐으로 2년 후에나 가게 될 것 같은 상황에 불만 가득한 상태였다. 또한 10일동안 터키로 여행을 떠나신 부모님 대신 집을 지키며 다소 불안한 심리상태까지 보이고 있었다고 할까. 이 여행서에서 무엇을 가치있는 것으로 판단했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가고 싶던 폴란드, 터키, 거기에 발트 3국과 핀란드까지 둘러볼 수 있으니 이보다 훌륭한 책이 어디 있으랴. 너무 감상적이지도 않고 너무 쿨하지도 않게 담담한 서술방식도 마음에 들었고, 남자라 생각했던 저자가 (표지에서 가방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남잔지 여잔지 알 수 없는 상태인 데다 저자의 이름을 보고 처음부터 여자라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을까;;) 사실은 여자라는 점도 확 와 닿았으니 저 평점은 '개인'적인 '만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으시라.
동해안의 시골 마을에 집을 짓고 산 지 1년 반. 점점 식물화되어 가는 모습에 염증을 느낀 그녀, 터키에서 시작하고 핀란드로 끝내는 여행을 시작한다. 내가 이 책을 특히 마음에 들어한 이유 또 한 가지는 여행을 떠나기 전 그녀의 심리상태가 나와 무척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만만하게 세상을 정복할 듯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그토록 갈망하고 원했음에도 자신이 있던 공간이 어느 순간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해 보이는 탓에 쉽게 발을 내디딜 수 없는 여행.
터키, 동유럽, 핀란드, 모두 까마득하다. 지루하던 마당일이 갑자기 할 만하게 느껴지고 밥 주기 귀찮던 닭들도 새삼 통통하고 장해 보였다. 밤이 되어 침대에 누울 때마다 이런 아늑한 곳이 세상에 또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My sweet, sweet home... -p25
그러나 그대로 정체되어 있을 수는 없는 법. '구구거리는 닭들을 뒤로한 채' (구구거리는 건 비둘기가 아니었나;;) 이스탄불로 날아간다. 친절한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 스무 살 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여유로움을 가지고 시작한 여행. 루마니아에서 만난 친구 줄리안과의 즐거운 추억과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당한 강도사건. 아름다운 발트 3국과 고요한 호수와 오두막의 나라 핀란드에서 접한 아름다운 자연 경관들은 내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어느 새 머릿속으로 여행 경로를 짜보는 것이다. 나는 두 달은 시간을 낼 수 없으니 한 달로 계획한다면 어디를 갈 수 있을까, 영어를 못해도 충분히 갈 수 있을 것 같아, 짐은 많이 필요없고 강도의 위험이 있으니 카메라는 잘 가지고 다녀야지.
스무 살 때는 알 수 없었던 여행의 의미-라는 부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든, 나는 이 문구에서 경제적인 여유로움을 느꼈다. 저자의 다른 책들은 읽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어떤 독자도 그녀의 다른 책에서 비슷한 점을 느꼈던 듯 하다. 그녀가 돈이 많은 사람일 것 같다, 비싼 호텔에서 편히 자고 쉬엄쉬엄 여행하는 사람인 것 같다-는 느낌을 나도 받았지만 그런 그녀의 여행도 크라쿠프에서 카메라를 도난당함과 동시에 막을 내린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도 여행의 묘미?!
그녀의 여행 자체도 부럽지만 그 여행동안 만난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 가장 부러웠다. 여행에서 새로운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것. 이것보다 더 멋진 일이 있을까. 친절하든 친절하지 않든 나와 얼굴을 마주대하고 대화를 나눈 사람이 있다는 것. 생각만해도 가슴이 부르르 떨린다. 그런데 이런 인연들에 더해 '두리틀'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사람과의 관계도 참 궁금하다. 단순한 친구? 아니면 조금 애매모호한 관계? 푸헤.
오랜만에 마음에 든 여행서를 읽어 기쁘기도 하지만 지나온 시간동안 나는 무엇을 했나 싶어 알싸해지기도 한다. 나에게 다시 혼자 떠날 기회가 찾아올까. 그 때 나는 두려움에 주춤하지는 않으려나. 그 혼자 떠난 여행에서 소중한 인연을 맺을 수 있을까. 그 때가 되면 나도 저자처럼 나의 집을 가장 달콤한 공간으로 여기며 미적거릴지도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떠날 마음이 있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 나는 사진으로만 보던 바로 그 곳에 그림처럼 서 있을 자신이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