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필요한 순간 - 삶의 의미를 되찾는 10가지 생각
스벤 브링크만 지음, 강경이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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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가끔 가족들로부터 '책을 왜 읽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친구는 물론 가족 중에도 저처럼 책을 읽는 사람이 없어서, 늘 무언가 읽을거리를 옆에 끼고 사는 제가 신기한가봐요. 제 대답은 '재미있으니까'입니다. 당연하잖아요. 재미있으니까 책을 읽지, 누가 재미도 없는데 책을 읽나요. 육아하기에도, 아이를 낳은 후 늘 부족했던 잠을 보충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에 말이에요. 심지어 아이들을 재우면서 같이 잠들었다가도 새벽에 눈 비비며 일어나 책을 읽는데, 그게 말이 쉽지 자다 깨서 책을 펼치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렇게 힘든 일을 재미도 없는데 계속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그 다음 뒤따르는 질문은 '책을 그렇게 읽어서 어디다 쓰냐'입니다. 책을 읽어서 어디다 쓰냐니, 그런 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이야기를 읽고 무언가를 생각하고 느끼는 그 자체가 소중한데 독서가 꼭 어딘가에 쓰여야 하는 건가요. 이렇게 대답하면 '그럼 쓸 데 없이 책을 왜 읽냐'는 본래의 질문으로 다시 되돌아오는데, 말씀드렸잖아요! 재미있으니까 읽는다고요!

저자 스벤 브링크만은 인문학에 대해서도 똑같이 이야기합니다. 인문학을 포함한 많은 학문은 그 쓸모없음 덕택에 쓸모가 있는 것으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쓸모만 따져서는 안된다고 해요. 놀거나, 사랑을 하거나, 어려움에 처한 이를 돕는 것은 그런 행동을 통해 다른 이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있는 것들이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이 사랑을 통해 나는 무언가를 얻어야해!'라고 생각하지는 않잖아요. 아이들을 사랑하면서 '이 아이들에게 사랑을 나눠주면 나는 무엇을 얻을까'를 생각하지는 않죠. 우리 삶에 진짜 알맹이가 되는 것, 의미를 주는 것은 요즘에는 쓸모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것들, 인문학은 바로 이러한 현상을 다루기에 중요합니다. 스벤은 책 전반을 통해 상황을 통해 바뀔 수도 있는 '진정한 자신'을 찾는 데 몰두하기보다,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합니다. 윤리적 가치로서 선은 그 자체가 목적이지만,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은 보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수단이니까요. 비도구화, 그것이 핵심입니다.

 

본격적인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 스벤은 이렇게 쓸모 없는 것의 쓸 데 있음을 역설하면서 선에 대해 이야기하는데요, 그런 그의 소개글은 자연스럽게 제1장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일이 우리에게 있는가>로 연결됩니다. 위대한 반도구주의 사상가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 모든 것을 이득을 재는 저울로만 측정해서는 안되며, 이득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가 '해야만 하는'일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세상에는 그 자체로 목적이면서 선한 것들이 있다고요.

우리는 선이란 무엇인가 고민하면서 우리 삶을 이끄는 관점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선한 것은 그걸로 이익을 얻거나, 단순히 그걸 좋아하기 때문에 선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선하다는 이유 그 자체 때문에 선을 좋아하는 법을 배워야하고,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내내 단단히 지켜야 할 실존적 관점입니다.

 

이 책에 소개된 다른 철학자들의 문구에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제가 유독 이 첫 장에 집착하게 된 이유는 바로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내용 때문입니다. 나의 발자취가 우리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이 요즘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이거든요. 우리 아이들이 나와 남편의 무엇을 보고 자라나게 될까, 무엇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이 삶을 살아가게 될까와 관련된 고민은 지금까지 제가 부딪쳐왔던 문제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어요. 부담감, 중압감. 그 고민에 대한 해답을 이 책을 통해 얻은 것 같습니다. 선하다는 이유 자체로 선을 좋아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그렇게 하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것. 깊은 울림을 주는 깨달음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외에 아홉 명의 철학자가 더 출현합니다. 그 자체로 가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기댈 만한 단단하고 기본적인 토대가 되어주는 10가지 생각들. 여기에 그들과 그들의 신념을 소개해봅니다.

 

1. 우리가 그 자체를 위해 하는 것이 선이다(아리스토텔레스)

2. 존엄성은 가격으로 따질 수도 없고 대체될 수도 없다(칸트)

3. 인간은 약속하는 동물이다(니체)

4. 자기란 관계 그 자체와 관계하는 관계다(키르케고르)

5. 진리가 존재하지 않더라고 인간은 진실할 수 있다(아렌트)

6.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일은 그의 삶 무언가를 손에 쥐는 일이다(로이스트루프)

7. 사랑은 우리 자신 외에 다른 무언가가 실제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가능한 무척 어려운 깨달음이다(머독)

8. 용서는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일이다(데리다)

9. 자유는 특권이 아니라 책임으로 이루어진다(카뮈)

10. 죽는 법을 배운 사람은 노예가 되는 법을 잊는다(몽테뉴)

 

삶에 있어 효용성을 최대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이 읽는다면, 단 1초만에 책을 던져버릴지도 모를 내용들입니다. 스벤이 되도록 쉽게 설명하고자 노력한 흔적은 엿보이지만, 하나의 사상을 설명하는 데 쉬울 수만은 없는 노릇이라 때로는 문장을 여러 번 읽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문장을 읽는 자체로 행복하다고 할까요. 오랜만에 철학과 삶에 대해 진중하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마음이 벅찼습니다. 갈수록 그 가치가 희석되는 도덕적이고 가치있는 삶에 대한 증명. 삶의 공허함을 물리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10명의 사상가의 이야기들을 통해 나에게 삶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가치를 지니는가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스벤은 감사의 말을 '제가 단단히 딛고 서기로 선택한 관점의 모든 원천이 된 부모님께 이 책을 바칩니다'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데요, 이 부모님도, 스벤도 정말 멋지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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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소설 - 당신의 이야기가 소설입니다
마리애비 외 지음, 바이트 기획 / 에이치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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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바이트(BITE). 짧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한 앱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짧은 글을 누구나 쓰고 읽을 수 있다고 한다. 끼가 넘치는 30여 명의 대표작가들과 함께 짧은 글로 할 수 있는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는데, 그 중 누군가의 고민을 짧은 소설로 풀어주는 '소설처방'은 작가와 독자가 만나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특별한 프로젝트이다. 나의 이야기가 소설이 될 수 있다니. 부끄러울 것 같기도 하고 신기할 것 같기도 해서 읽게 된 책. 3분 소설이라더니 각각의 이야기들이 정말 그리 길지 않다!

이 서비스는 지난 6월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다. 5일간 지속된 행사에서는 네 명의 작가가 화장실도 못 가고 소설을 써야할 정도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고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만들기 위해 사연을 풀어놓는 사람들. 그들에게 소설은 어떤 의미였을까. 어떤 주문자는 가출한 중학생 딸을 둔 어머니였는데 인스타그램으로 행사 소식을 접하고 찾아왔다. 딸에게 언제나 너를 믿고 지지하며 언제든 집으로 돌아와달라는 사연을 들려주었던 그 어머니의 마음은 이제 조금은 홀가분해졌을까. 딸이 그녀의 진심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어떤 직장인은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인 VJ가 되는 소설을 써달라고 주문했는데 이후 용기를 내어 직장을 그만두고 VJ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고도 한다.

오히려 가까운 이에게 꺼내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더 쉽게 털어놓을 수 있는 속 이야기.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만들어달라고 주문한 사람들의 마음이 그와 비슷한 심정이지 않았을까. 마음 속에 꽁꽁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풀어내 조금은 억울하고 약간은 분한 마음을 털어내고 새로운 내일을 향해 내딛을 수 있는 한걸음을 얻은 사람들. 그 처방이 소설이면, 허구면 어떠랴. 그것이 지금 나를 위로해주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미치오 슈스케의 [투명 카멜레온]이 생각났다. 일상을 각색해 진짜가 아닌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그 투명한 허구의 세계에서 위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렇게 보면 이야기란, 상처받고 외로운 사람들의 가슴을 가장 따스하게 보듬어주는 최고의 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장르로 구성되어 있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로맨스, SF, 드라마, 복수극까지. 기승전결을 보여주는 이야기도, 다짜고짜 결말을 제시하는 이야기도 있다.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작가의 말이 짧은 메모 형식으로 실려 있는데 어떤 의도로 이런 이야기를 지었는지 그 의도를 살짝 엿볼 수 있다.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마음이 훈훈해진다. 세상에 나 혼자가 아닌 것 같은 기분. 이 책을 매개로 나의 세상과 다른 사람들의 세상이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 바로 바이트 앱을 설치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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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남
슈노 마사유키 지음, 정경진 옮김 / 스핑크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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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남은 세 번째 희생자를 찾고 있었다. 이미 두 명의 소녀를 목졸라 죽이고 숨진 사체에 가위를 찔러넣은 가위남. 그의 타겟은 정해졌다. 고등학교 2학년 다루미야 유키코. 그녀를 죽이기 전에 사전조사를 하고 적당한 때를 노리던 중, 다루미야 유키코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 심지어 범행수법은 가위남, 그 자체. 누구지? 누가 그 아이를 죽인 거지? 분명 나는 죽이지 않았는데. 다루미야 유키코는 왜 가위남의 수법으로 살해당한 것인가. 아무 죄의식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가위남이 자신의 모방범을 찾아나선다.

 

가위남의 정체도 궁금했지만 모방범이 누구인지도 궁금했다. 왜 그의 범행수법을 따라한 것인가. 가위남을 열렬히 숭배하는 정신이상자인가, 우연한 살인을 가위남의 소행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인가. 살인자가 또 다른 살인자를 찾아나선다는 설정이 아이러니하게도 여겨졌지만 과연 이 둘의 대결(?)이 어떤 결말을 맞을지 호기심이 생겼다. 초반에 묘사되는 가위남의 외모는 뚱뚱하고 인기가 없을 것 같은 타입이다. 오타쿠의 부정적인 이미지 같았다고 할까. 타인에게 관심이 없고 마음이 꽁꽁 숨겨져 있으나 비교적 맡은 일을 잘 해내고 똑똑한 스타일. 이 외모에 대한 묘사마저 작가의 트릭이었음을 후반부에 가서야 알 수 있었다.

 

이 가위남은 인격 장애를 안고 있다. 진짜 자신 이외의 '의사'라고 지칭하는 또 다른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눈다. 이미 여러 번 자살을 시도한 가위남은 또 한 번의 죽음을 준비하고, 깨어나자마자 의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정말 죽고 싶은 게 아니기 때문에 죽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의사. 이후 작품의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의사와 가위남의 대화는 흥미진진하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 가위남의 내면이 어떠한지 유추할 수 있다. 미치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은 인간. 그 자체가 광기이고 병인 인물. 지나칠 정도로 강해서 왜 소녀들을 죽이는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어떻게 죽일지만 생각하는 가위남. 가위남은 두 번째 희생자가 영어를 잘 한다는 정보를 얻고 영어를 잘 하는 혀는 어떻게 생겼는지 보기 위해 그녀의 뺨을 도려낸다. 그들의 대화를 듣다보면 이 의사가 본래의 인격이고 가위남이 다른 인격이 아닌가 의심스러워지기도 하는데 결국 의사 인격이 모방범과 대치하며 그의 살인 동기와 수법을 간파해낸다.

 

으아.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단순히 어두운 욕망에 물든 오타쿠 남성의 광기에 사로잡힌 살인행각이라 생각했다. 의사의 인격이 등장했을 때도 좀 독특하다고 여겼지 작가가 만들어놓은 트릭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는데, 이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그의 덫에 걸려들지 않았을까. 거의 100%가 아닐까 싶다. 조금 주의를 기울인다면 아주 사소한 사항 하나로 어쩌면 그 트릭을 간파해냈을 수도 있지만, 선입견이라는 것이 참 무서운 것이다. 진실이 밝혀진 후부터 아주 그냥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설마 표지가 스포인가. 아니 이것도 선입견인가. 내가 지금 뭘 읽은 거지. 그리고 뒷통수를 맞았을 때 늘 그랬던 것처럼 처음부터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제13회 메피스토 상 수상작, 2000년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0' 2위라는 명성에 어울리는 작품이다. 2007년에 국내에 소개되었고 12년만에 복간된 [가위남]. 싹둑, 싹둑, 싹둑이라는 홍보문구에 소름이 돋아 대체 얼마나 잔인하건가 부들부들 떨었지만 범행수법보다 가위남의 심리를 들여다보는 과정이 더 섬뜩한 소설이었다. 어떻게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는가. 2013년 타계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천재 작가의 작품을 많이 읽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조만간 스핑크스 출판사에서 [거울 속은 일요일]이라는 작품이 출간된다고 하니 절대 놓쳐서는 안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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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가락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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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야에코, 아들 나오미,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함께 사는 마에하라 아키오. 어느 날, 빨리 집에 돌아오라는 아내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무슨 일인가 싶어 귀가한 그의 앞에 어린 소녀의 시체 한 구가 놓여있다. 범인은 그의 아들 나오미. 평소 참을성이 부족하고 폭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아들이 이런 큰 범죄를 저지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키오는 당장 경찰에 자수하자고 아내를 설득하지만 그녀는 아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절대 그럴 수 없다며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반대한다. 결국 소녀의 시체를 근처 공원 화장실에 유기한 아키오. 소녀의 옷에 묻어있던 그의 정원의 잔디들을 다 떼어내지 못하고 돌아온 아키오는 언젠가 경찰이 분명히 자신의 집에 찾아올 것을 예감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태연히 밥을 먹고 게임에만 몰두하는 아들을 바라보는 심정은 참담하지만, 나오미는 물론 자신과 가족들의 평판까지 생각할 때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했다. 구부정한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소름끼치는 한 가지 생각. 이 일이 성공하더라도 그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평생을 죄책감과 고통 속에 살아야할 것이다. 하지만 일단은 상황을 벗어나는 것만 생각하자. 그래서 그는 결심한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 형사 '가가 교이치로'가 10년만에 귀환했다. 현대문학에서 '가가 형사' 시리즈의 전면 개정판이 출간되었고, 또 다른 출판사에서는 이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 출간된다. 실로 히가시노 게이고, 아니 '가가 형사' 시대의 도래라고 할 수 있을만큼 돌아온 그에 대한 관심과 인기가 엄청나다. 나도 구판을 전부 소장하고 있지만 개정된 책을 보고 있노라니 어찌 구매하지 않을 수 있을까. 책을 좋아하고 히가시노 게이고를 좋아한다면 저절로 손이 갈 수밖에 없는 시리즈. 그 중에서도 부모로서, 딸로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붉은 손가락]을 먼저 만났다.

작품을 다 읽고난 마음은 참담하고 슬프다. 과연 부모로서, 아들로서 아키오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그것 뿐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그런 그의 모습을 마주하며 나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만약 우리 아들들이 어떤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 죄 앞에서 절대 도망치지 말자고. 밤에 누웠을 때 발 뻗고 자지 못할 일은 하지 말자고. 자식들도 한 인간인만큼 어떤 상황에서의 선택은 온전히 그들의 몫이다. 하지만 그 선택이 잘못된 결과를 불러오거나 범죄에 가담하게 된 경우에는, 부모인 이상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나눌 수밖에 없다. 시즈쿠이 슈스케 작가가 [염원]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지금까지의 평온한 시간과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앞으로의 삶을 자식과 함께 속죄하는 시간으로 채울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자식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그들로부터 속죄할 기회를 빼앗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답은 나온다. 진심으로 자식을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아키오와 야에코인가, 아니면 그의 어머니인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 [나이먀 잡화점의 기적]을 최고로 꼽는다. 미스터리하면서도 인간과 삶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붉은 손가락]을 읽고 나니 어째서 수많은 독자들이 '가가 형사'에 열광했는지 알 것 같다. 사건에 대해 통찰력이 있고 날카롭게 분석하면서도, 진실을 드러내는 과정에서는 결코 인간미를 잃지 않는다. 탐문수사를 펼치면서도 억울한 소문에 휘말리지 않도록 배려하고, 아키오가 그 자신을 위해 스스로 죄를 실토할 수 있도록 모든 상황을 설계한다. 그런 그가 어째서 죽음을 앞둔 아버지의 병상에는 찾아가지 않는 것인가, 의아했다. 그의 가족도 아프고 괴로운 사정이 숨어 있을 거라 감히 짐작했는데, 결말을 읽고 나니 그제서야 이해가 된다. 그는 정말 지독하게도 타인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려는 남자다.

출간된 지 10년이 넘었음에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시대를 뛰어넘는 멋진 작품이다.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이름이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가 될만하다고 다시 한 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장에 꽂힌 구판 도서들에게는 약간 미안하지만, 역시 예전에 읽지 않고 남겨두길 잘했다. 아직 읽을 수 있는 '가가 형사' 시리즈가 남아있음에 무척 기쁘다. 너무 기뻐서 춤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 한 권씩 개정판으로 읽어나가면서 가가 형사의 매력에 풍덩 빠져들어가보겠다. 그의 유혹을, 더 이상 마다하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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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 카멜레온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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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차한 택시기사가 신기한 생물이라도 본 듯 두 눈을 딱 멈추고 순간 무심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얼버무리듯이 헛기침을 하는 얼굴. 마실 것을 사러 들어간 편의점 점원에게서 미소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얼굴. 그런 얼굴, 아주 '못난' 얼굴의 소유자가 바로 기리하타 교타로다. 그러나 이 못난 얼굴의 교짱의 직업은 <IUP 라이프>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라디오 DJ.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멋진 목소리로 월요일부터 토요일, 밤 10시부터 새벽 1시까지 청취자들의 귀를 사로잡는다. 매일 일상에서 일어난 사소한 일들을 각색해 방송하고, 방송이 끝나면 거의 매일 찾는 바 if에서 나이를 초월한 단골손님들과 담소를 나눈다. 그러던 어느 날, 웬 여성이 바에 들어와 '죽였다'라고 중얼거리고 돌아간다. 수수께끼의 그녀 미카지 케이는 다음 날 다시 찾아오고, 교짱은 그녀에게 자신의 정체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가 난감한 상황에 처한다. 사과를 빌미로 교짱과 그 친구들의 협력을 요구하는 케이. 그녀의 요구대로 행동하지만 온갖 소동에 휘말리는 교짱과 친구들. 미카지 케이의 목표는 무엇이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못난 얼굴에 멋진 목소리를 가진 라디오 DJ 교짱과 다양한 성격을 가진 if의 친구들. 유명한 업소에서 제일 잘 나가는 호스티스지만 유부남의 아이를 갖기 위해 양배추를 열심히 먹어대는 모모카 씨, 해수 및 해충을 구제하는 사업장을 운영하면서 만성 치질에 시달리는 이시노자키 씨, if 근처 게이바에서 일하는 호스티스 레이카 씨(심지어 그는 키가 훤칠하게 크고 다리도 길며 코가 높고 눈도 커서 만화에 나오는 미남같은 느낌이다), 아사쿠사 길에 위치한 '시게불단'의 7대 점주인 일흔 살의 시게마쓰 씨, 그리고 if의 미녀 마담 데루미 씨. 교짱은 그들의 이야기도 각색해서 라디오에서 들려주었고, 연령은 다양하지만 그들은 모두 교짱의 친구다. 교짱은 중학교 때 병으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살았지만, 여동생이 출산을 위해 어머니와 외가로 가면서 지금은 혼자 지내는 중. 그런 생활 중에 미카지 케이가 불쑥 그의 삶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상황이나 대사들이 읽기에 무겁지 않고 엉뚱해서 명랑활극이라 여겼다. 하지만 미카지 케이와 연관된 사건이 일단락되고 밝혀진 사실 앞에서, 나는 한밤중에 책을 읽다 엉엉 울어버렸다. 동시에 어째서 '투명 카멜레온'이 이 작품이 제목이 되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투명 카멜레온은 교짱이 초등학교 때 어떤 친구집에 놀러갔다가 들은 이야기다. 그 친구는 다른 동급생들이 멀리하는 아이였는데 어느 날 자신이 카멜레온을 키우고 있다면서 놀러오라고 한다. 그 말에 카멜레온이 궁금해진 교짱은 친구를 따라 그 아이 집으로 갔는데, 친구는 어떤 공간을 가리키며 저기 카멜레온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어쩐지 투명한 카멜레온이 보이는 것 같은 기분에 교짱도 실제로 그 곳에 카멜레온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다. 교짱의 라디오가 친구들에게 해 준 일은 그런 것이었다. 약간의 거짓말과 염원을 담은, 당신만을 위한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세계라고 해도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에게만 느껴지는 세게를 선사해 준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를 선사해 준 교짱에게 친구들도 최선을 다해 교짱을 위로한다.

이 작품에 대한 감상을 정말 멋지게 적고 싶은데 가슴이 너무 먹먹해서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소설의 매력을 전부 드러내기에 내가 가진 능력이 너무 비루해서 안타까울 지경이다. 다만, 이 한 가지는 말할 수 있겠다. 그 동안 미치오 슈스케의 작품을 꽤 많이 읽어왔지만 이 [투명 카멜레온]이야말로 나에게는 그의 대표작이 될 것이며, 내 인생작 리스트에 올라갈 것이라고. 웃음과 미스터리와 눈물을 모두 안겨 준 정말 훌륭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훌륭함은 읽지 않으면 진정 알 수 없다. 그러니 부디 읽어주시라. 놓쳤으면 아까울 이 작품을, 제발 당신도 놓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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