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아들은 처음이라 - 첫 아들을 키우는 엄마를 위한 심리학 수업
안정현 지음 / 꼼지락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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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든 딸이든 나름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굳이 '아들'이 강조되는 책을 찾아 읽지는 않았었다. 게다가 나는 아들만 둘. 딸이 없으니 애초에 비교대상이 없는 관계로 아들이기 때문에 이렇다, 저렇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이 아들들이 너무 어려서. 허허. 그래도 가끔 이렇게 '아들'이 들어가는 책을 읽어보기는 하는데, 그 이유는 무섭기 때문이다. 지금은 나만 졸졸 쫓아다니는 이 강아지들이 나중에는 나를 모른 척 하면 어쩌나, 잘 때도 껌딱지처럼 꼭 붙어자는 곰돌군들이 사춘기 들어서서 방문 꼭 닫고 나랑은 말도 안 하면 어쩌나 하는 막연한 불안감들. 시간이 지나 아이들이 크면 분명 갈등 상황이 생길텐데 그 때 당황하지 않도록 미리미리 준비를 해두어야겠다는 결심이랄까.

 

제목은 [엄마도 아들은 처음이라] 지만 읽어보면 모든 아이에게 보편적으로 해당하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딸이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순간은 있을 것이며, 아이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고, 최고보다는 차별화 전략을 세우고, 멘토가 될 어른을 찾는 것. 어떤 아이에게든 필요한 일 아닌가. 어느 날 갑자기 딸도 변할 수 있는 것이고,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하는 것은 딸, 아들 마찬가지.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하지 않는 딸, 아들 수두룩하고 아이들의 관심사에 귀기울여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엄마의 감정이 아이에게 전이되어 엄청난 파급력을 자랑(?)하는 것은, 육아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모두 공감할 것이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나름 다양한 아이들을 봐왔다는 생각에서인지 이 책의 내용들이 아들에게만 해당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례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보편적인 내용보다 구체적인 문제행동과 현실적인 대안들, 인터뷰 같은 내용이 좀 더 많이 실려있다면 좋았을 것 같다.

 

한 가지 새삼 깨달은 것은 아이들 앞에서 아빠 흉은 보지 말자는 것. 아무리 부부 사이가 나빠도 엄마와 아들의 관계가 지나치게 밀착되면 아이가 정서적인 짐을 짊어질 수밖에 없다. 어머니와 아버지 두 뿌리에서 나온 아들이 부부 사이와는 관계없이 건강하게 성장하게 하려면 절대 아이 앞에서 아빠 흉을 봐서는 안된다고 한다. 게다가 남자인 아들이 롤모델로 삼을 사람은 역시 아빠. 임상심리학 박사 롤로 메이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없다면 동일시할 남성상이 없어 목적의식을 가지지 못하고 아버지가 외부 세계에서 들여왔어야 하는 체계를 구축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자신을 이끌고 반대되는 것에 저항할 가치관도 갖지 못한다고 하니 아들에게 아빠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품에 낀 아들이 아니라 남자로서 성장하기 위해서 아들들은 엄마 품을 떠나야 한다는 문장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으아. 오늘도 첫째 곰돌군에게 엄청 짜증냈는데 언젠가 이런 일상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오지 않을까 두렵다. 일단 나의 심리도 잘 관리하고 아이들의 기질을 잘 살펴서 윈윈하는 육아를 해야지. 복직까지 남은 시간, 나와 곰돌군들과의 관계, 가족들 관계에 더 투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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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개자리 빌리암 비스팅 시리즈
예른 리르 호르스트 지음, 이동윤 옮김 / 엘릭시르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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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전 세실리아 린데라는 여성이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아버지는 패션 회사를 운영하는 사업가였고, 세실리아 본인은 그 회사 브랜드의 모델로 활동하고 있었던 데다 그녀가 실종되기 전에는 린데 가문이 부유한 가문 아홉 번째로 꼽히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돈을 목적으로 한 범죄라 생각했지만 몸값을 요구하는 전화는 오지 않았고, 결국 그녀는 나체 상태로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범인으로 형을 받은 자는 루돌프 하글룬. 당시 수사 책임자였던 빌리암 비스팅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사건 수사를 지휘했고, 증거품과 목격자 증언 등을 토대로 그를 체포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사건의 증거가 조작되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수사 책임자였던 비스팅은 정직 처분을 받게 된다. 과거의 행적을 다시 뒤쫓으며 자신이 실수한 것은 없었는지, 과연 루돌프 하글룬이 범인이 아닌 가능성이 있는지, 증거를 조작한 사람은 과연 누구인지 개인적인 조사를 시작한 비스팅.

그런 그의 곁에는 든든한 지원군이자 딸인 리네가 있다. 신문사에서 기자로 활동하는 그녀는 비스팅의 기사가 자신이 일하는 신문사의 1면 기사로 나가는 것을 막아보고자 한 살인사건 현장에 출동한다. 피해자는 두부를 가격당해 살해당한 중년의 남성. 발빠르게 움직여 그의 정보를 알아내 주거지를 찾아간 리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에게 공격당하면서 더 깊게 사건의 중심부로 들어간다. 살인사건에 관한 정보를 모으면서도 아버지가 처한 상황을 돕기 위해 비스팅에게 적극적으로 가담, 그가 보지 못하고 넘어가는 세세한 부분에 주목하며 사건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조사가 계속될수록 드러나는 과거와 현재의 연관성. 과연 이들이 쫓고 있는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지 책장을 넘기는 재미가 쏠쏠하다.

예른 리르 호르스트의 <빌리암 비스팅 시리즈>는 이번에 처음 접했는데 찾아보니 이미 [추락하는 새]로 국내에 첫 선을 보인 적이 있다. 경찰소설의 주인공들에게서 엿볼 수 있는 자신의 일에 대한 고뇌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강직하고 올곧게 맡은 바 임무를 다하는 형사 아버지와, 어떤 일이 벌어져도 겁먹지 않고 오히려 더 당당하고 주도적으로 사건에 맞서며 수사에 일조하는 딸의 콜라보레이션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북유럽 스릴러에서 볼 수 있는 음울한 분위기가 아예 읽히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만큼은 아니며, 주인공의 고뇌 또한 그보다는 깊지 않다. 해리 홀레와는 달리 빌리암 비스팅은 과거에 잠겨 상처입기보다, 어떻게든 두 주먹 불끈 쥐고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 달리는 이미지라고 할까. 그 옆을 냉철하고 객관적인 판단력과 용기를 겸비한 딸인 리네가 함께 달려주고 있으니 든든할 수밖에.

작가인 예른 리르 호르스트는 1995년부터 라르비크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하다 2004년 <빌리암 비스팅 시리즈>를 출간하며 작가로 데뷔했다. 수사 책임자로 일했던 경험을 작품에 녹여낸 덕분에 그의 이 시리즈는 사건 수사 현장의 긴장감과 속도감을 그대로 재현해냈다는 평을 들으며 노르웨이 북셀러상, 노르웨이 최고의 범죄소설에 수여하는 리베르톤상, 북유럽 최고의 범죄소설에 수여하는 유리열쇠상, 스웨덴 범죄소설 작가 아카데미에서 최고의 범죄소설에 수여하는 마르틴 베크상을 휩쓸었다. 영미스릴러에서 보여지는 엄청난 속도감을 맛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발한발 밟아나가는 탄탄한 수사 전개 과정을 자랑하는 것이 이 작품의 장점이 아닐까 싶다. 이 아버지와 부녀의 조합, 앞으로도 계속 지켜볼 수 있게 되기를. 우선은 [추락하는 새]부터 먼저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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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빠 웅진 세계그림책 192
앤서니 브라운 글.그림, 공경희 옮김 / 웅진주니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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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돌아가신 아버지의 잠옷을 보았습니다.

아버지의 냄새가 남아 있는 그 잠옷은 단숨에 저를 작은 아이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아빠>는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입니다.

-앤서니 브라운

그림책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이 앤서니 브라운을 모르는 독자는 없을 겁니다.

저는 한동안 모르고 지내다가 얼마 전에서야 이 작가를 알게 되었는데요,

앤서니 브라운 베스트를 들인 후 아주 푹 빠져 지내는 요즘이에요.

70세가 넘는 지금도 그림책 짓기에 여념이 없는 작가 앤서니 브라운.

바로 얼마 전까지 <앤서니 브라운 전시회>도 열렸었고, 방한해서 많은 독자들과 즐거운 만남을 가졌죠.

[우리 아빠]는 기존 출간되었던 책의 개정판이에요.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표지를 장식한 아빠.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따로 말씀 안드려도 짐작이 가실 거에요. ^^

약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빠.

'우리 아빠는 대단해요'라는 문장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는 아빠.

크고 심술궂은 늑대가 나타나도 손가락 하나로 집 밖으로 내쫓을 수 있어요.

고릴라만큼 힘이 세고

하마처럼 늘 기분 좋게 웃고 있는 정말 멋진 우리 아빠입니다.

 

아빠는 때로는 달도 훌쩍 넘을 만큼 높이 뛰기도 하고, 외줄도 거뜬히 타며

거인과 힘을 겨뤄도, 운동회날 다른 아빠들과 달리기 시함을 해도 가뿐히 이길 거라 믿습니다.

우리 아빠는 최고라고 믿는 아이의 예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때로는 히힝 말로도, 때로는 물고기로도, 올빼미로도, 곰인형으로도 표현되는 우리 아빠는

아이에게 있어 못하는 것이 없는 만능 아빠에요.

가장 잘 하는 것은 나를 웃게 해주는 것.

아이는 아빠에 대한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아빠도 자신을 사랑할 것임을 전혀 의심하지 않죠!

 

이 책을 아이와 읽으면서 제가 울컥해서 울고 말았네요.

사실 아빠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이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읽는 동안 우리 아빠가 생각났거든요.

 

항상 가족을 먼저 생각해주시는 아빠.

건강하게 오래오래 우리 곁에 함께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은 따뜻하면서도 동화적인 상상력을 자극시켜줘요.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는 겁니다.

이 책과 함께 [우리 엄마], [우리 형]도 있는데요, 우리 두찌를 위해 [우리 동생]도 나오면 좋겠네요 ^ㅠ^

 

세상의 모든 아이들과 모든 아빠들을 위한 책.

잠들기 전 아빠가 읽어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따스한 목소리와 격한 포옹으로 아이에게 사랑을 전달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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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길을 잃었어 I LOVE 그림책
조쉬 펑크 지음, 스티비 루이스 그림, 마술연필 옮김 / 보물창고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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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창고에서 출간되는 따뜻한 그림책들을 무척 애정합니다.

전 첫째 곰돌군이 태어났을 때부터 보물창고에서 출간된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시리즈로

그림책의 세계에 빠져들었어요.

믿고 보는 보물창고의 그림책.

이번에는 책덕후이자 북홀릭인 저에게 딱 맞춤인 듯한 책.

도서관에서 길을 잃은 내용입니다.

 

그림으로 그려진 책.

저 표지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나요!

책장 사이로 빼콤 고개를 내민 사자라니, 맞아요, 도서관에서 길을 잃은 건 바로 요 사자 녀석입니다!

 

중간 표지에도 이렇게 사랑스러운 책 그림이 가득해요.

 

어느 새벽, 먼동이 트면서 밤이 물러갑니다.

하품을 하면서 잠에서 깨어난 돌사자 '용기'는 자신의 짝꿍인 '인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려요.

어젯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도서관의 웅장한 미로 속으로 들어간 '인내'.

'용기'는 한 번도 제 자리를 떠난 적이 없었지만 '인내'가 돌아오지 않으니 조바심이 나서

결국 애스터 홀의 문 안으로 훌쩍 뛰어들어갑니다.

 

 

도서관 안에서 작은 조각상을 만나고

이 조각상으로부터 '인내'가 어디 있는지 단서를 포착한 '용기'!

조각상이 가르쳐 준 로즈 메인 열람실로 가보지만 거기에도 '인내'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동쪽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발걸음을 옮기죠.

그 곳에서 만난 벽에 걸린 초상화들.

그들이 대화에서 빠져나오길 바라며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인내'의 행방을 묻습니다.

하지만 심술궂은 노인에게 꾸중을 듣고 말아요.

 

 

풀이 죽은 '용기'는 '인내'와의 만남을 떠올립니다.

첫만남은 어색했지만 시간이 흘러 두 사자 사이에 싹튼 우정.

'인내'는 '용기'를 위해 항상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용기'는 그 이야기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생각해왔습니다.

다시 '인내'를 찾아나선 '용기'는 작은 청동 사자로부터 지도를 이용하라는 조언을 얻죠.

 

지도를 들여다보며 도서관의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는 '용기'

 

 

그리고 마침내 찾아낸 '인내'!

'인내'는 왜 저렇게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 걸까요.

'인내'가 '용기'에게 들려준 그 이유를 듣고 저는 가슴 한 쪽이 시큰거렸어요.

흑, 멋지구나, 우리 '인내'!

 

이 책에서 소개된 도서관은 뉴욕공공도서관이에요.

'인내'와 '용기'는 그 도서관을 지키는 돌사자들로

1911년 처음 자리를 잡았고

1930년대 뉴욕 시장인 피오엘로 라과디아가 시민들이 대공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 자질을

이름 붙인 것이라 합니다.

책 속에 등장한

애스터 홀, '장난기 있는 소녀' 조각상, '로즈 메인 열람실' 등에 대한 설명도 뒷부분에 자세히 실려 있어요.

 

한 사자가 친구를 찾기 위해 도서관에서 길을 잃은 이야기.

이 이야기는 사자들의 우정을 그린 따뜻한 동화이기도 하고

실제로 존재하는 뉴욕공공도서관을 그림으로나마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재미도 있고 의미있기도 해요.

 

어째서 '인내'가 동이 트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이 따스하고 멋진 그림책, 손에 잡으면 한 번 읽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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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현재의 탄생 - 오늘의 세계를 만든 결정적 1년의 기록
엘리사베트 오스브링크 지음, 김수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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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모 토울스의 [우아한 연인]을 읽은 직후라 어떤 시대가 전해주는 '낭만'에 깊이 젖어 있었다. 1947년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이 시대가 주는 분위기는 과연 얼마나 깊은 풍미를 지니고 있을 것인가. 그러나 잊고 있었다. 1947이라는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온 세상이 다시 일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던 시기였음을. 누군가는 살아남은 것에 감사는 커녕 지옥같은 경험이 뇌리에 각인된 채 주어진 시간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경악하고 있었다는 것도. 아차 싶었다.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낭만이나 찾고 있었다니. 개인의, 집단의 비극을 마주하며 다시 겸허한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다.

 

[1947 현재의 탄생]은 역사책이다. 독특하게도 한 해를 월별로 나누어 기록했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시간은 '현재'를 향해 돌아가지만 변화는 순식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조금씩 조금씩, 자잘한 변화들이 모여 훗날의 큰 사건들을 구성한다. 사람들은 사라진 집과 가족을 찾아 떠돌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한 발자국씩 움직이고 있던 시대. 전범 재판에 대한 관심은 시들고 냉전의 열기는 타오르며 자동소총 AK-47이 등장하고,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뉴룩'을 선보였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미국에서 새로운 연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제2의 성]을 집필했으며 CIA가 창설된다. 이집트 시계공의 아들은 오늘날까지 이어질 지하드를 선포하고 이스라엘 건국을 목전에 두고 UN 위원회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 외 등장하는 빌리 홀리데이, 조지 오웰, 프리모 레비. 마치 커다란 종이를 길게 늘어놓고 그 위에 사건을 기록한 것처럼 다양한 사건이, 여러 인물이 지면 위를 스쳐 지나간다.

 

이 중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제노사이드', 인종말살을 명명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1944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영어 단어로 이 단어는 홀로코스트 이후 라파엘 렘킨에 의해 만들어졌다. 당시에는 한 사람을 살해한 죄로는 형벌을 받을 수 있었지만 한 집단 전체를 전멸시킨 죄로는 벌을 받지 않았다. 1941년 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고 두 달뒤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우리는 지금 '이름 없는 범죄'에 직면하고 있다'는 연설을 한다. 그 연설을 듣던 렘킨. 그는 국제법 전문 변호사로 당시 나치를 피해 폴란드에서 달아나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트레블린카 수용소에서 살해당해 렘킨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름 없는 범죄'에 '이름'을 붙이기로 결심한 그의 끈질긴 노력으로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국제군사재판에서 '제노사이드'라는 표현이 처음으로 언급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나치 친위대 SS대원들은 석방되었고 최종 뉘른베르크 재판 결과 판결문에는 제노사이드에 대해 단 한 마디의 언급도 없었다고 한다. 그 후 렘킨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제노사이드를 국제범죄로 인정받기 위한 힘겨운 투쟁을 시작한다. UN이 마침내 채택한 제노사이드 조약은 허술했고, 렘킨은 노벨평화상 후보에 10번이나 올랐지만 단 한 번도 수상하지 못했으며, 결국 자신의 자서전 원고가 든 가방을 든 채 버스 정류장에서 돌연사했다.

 

그 후로도 얼마나 많은 제노사이드가 자행되었는지. 세상은 '절대로 다시는'을 반복하지만 무자비한 참상은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현재에도 여전히 계속된다. 다양한 인물과 사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나는 유독 이 렘킨의 이야기가 도드라져 보였다. 인류가 현재를 복원하기 위해 내딛은 발자국들은,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가 없었다면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홀로 분투하며 인종말살에 대한 정의를 부르짖었던 그의 이야기가 마치 한 편의 소설처럼 다가왔다.

 

1947년이라는 시간을 각자 나름대로 의미있게 살아온 사람들. 그리고 '절대로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졌던 한 사람. 그 어떤 역사책보다 깊은 울림을 전달하는 이 책은 전 세계 19개국에 번역 출간되었고, 잉글리시 펜 어워드를 수상했으며, NPR 선정 최고의 논픽션으로 꼽힌다. 오늘의 세계를 만든 결정적인 1년의 기록, 정치와 사회, 문화 부분에서 오늘날 전 세계 사람들의 삶을 지배할 힘들이 처음 등장한 기록이 마치 영화처럼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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