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 현재의 탄생 - 오늘의 세계를 만든 결정적 1년의 기록
엘리사베트 오스브링크 지음, 김수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9월
평점 :
절판


에이모 토울스의 [우아한 연인]을 읽은 직후라 어떤 시대가 전해주는 '낭만'에 깊이 젖어 있었다. 1947년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이 시대가 주는 분위기는 과연 얼마나 깊은 풍미를 지니고 있을 것인가. 그러나 잊고 있었다. 1947이라는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온 세상이 다시 일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던 시기였음을. 누군가는 살아남은 것에 감사는 커녕 지옥같은 경험이 뇌리에 각인된 채 주어진 시간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경악하고 있었다는 것도. 아차 싶었다.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낭만이나 찾고 있었다니. 개인의, 집단의 비극을 마주하며 다시 겸허한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다.

 

[1947 현재의 탄생]은 역사책이다. 독특하게도 한 해를 월별로 나누어 기록했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시간은 '현재'를 향해 돌아가지만 변화는 순식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조금씩 조금씩, 자잘한 변화들이 모여 훗날의 큰 사건들을 구성한다. 사람들은 사라진 집과 가족을 찾아 떠돌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한 발자국씩 움직이고 있던 시대. 전범 재판에 대한 관심은 시들고 냉전의 열기는 타오르며 자동소총 AK-47이 등장하고,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뉴룩'을 선보였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미국에서 새로운 연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제2의 성]을 집필했으며 CIA가 창설된다. 이집트 시계공의 아들은 오늘날까지 이어질 지하드를 선포하고 이스라엘 건국을 목전에 두고 UN 위원회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 외 등장하는 빌리 홀리데이, 조지 오웰, 프리모 레비. 마치 커다란 종이를 길게 늘어놓고 그 위에 사건을 기록한 것처럼 다양한 사건이, 여러 인물이 지면 위를 스쳐 지나간다.

 

이 중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제노사이드', 인종말살을 명명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1944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영어 단어로 이 단어는 홀로코스트 이후 라파엘 렘킨에 의해 만들어졌다. 당시에는 한 사람을 살해한 죄로는 형벌을 받을 수 있었지만 한 집단 전체를 전멸시킨 죄로는 벌을 받지 않았다. 1941년 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고 두 달뒤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우리는 지금 '이름 없는 범죄'에 직면하고 있다'는 연설을 한다. 그 연설을 듣던 렘킨. 그는 국제법 전문 변호사로 당시 나치를 피해 폴란드에서 달아나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트레블린카 수용소에서 살해당해 렘킨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름 없는 범죄'에 '이름'을 붙이기로 결심한 그의 끈질긴 노력으로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국제군사재판에서 '제노사이드'라는 표현이 처음으로 언급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나치 친위대 SS대원들은 석방되었고 최종 뉘른베르크 재판 결과 판결문에는 제노사이드에 대해 단 한 마디의 언급도 없었다고 한다. 그 후 렘킨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제노사이드를 국제범죄로 인정받기 위한 힘겨운 투쟁을 시작한다. UN이 마침내 채택한 제노사이드 조약은 허술했고, 렘킨은 노벨평화상 후보에 10번이나 올랐지만 단 한 번도 수상하지 못했으며, 결국 자신의 자서전 원고가 든 가방을 든 채 버스 정류장에서 돌연사했다.

 

그 후로도 얼마나 많은 제노사이드가 자행되었는지. 세상은 '절대로 다시는'을 반복하지만 무자비한 참상은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현재에도 여전히 계속된다. 다양한 인물과 사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나는 유독 이 렘킨의 이야기가 도드라져 보였다. 인류가 현재를 복원하기 위해 내딛은 발자국들은,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가 없었다면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홀로 분투하며 인종말살에 대한 정의를 부르짖었던 그의 이야기가 마치 한 편의 소설처럼 다가왔다.

 

1947년이라는 시간을 각자 나름대로 의미있게 살아온 사람들. 그리고 '절대로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졌던 한 사람. 그 어떤 역사책보다 깊은 울림을 전달하는 이 책은 전 세계 19개국에 번역 출간되었고, 잉글리시 펜 어워드를 수상했으며, NPR 선정 최고의 논픽션으로 꼽힌다. 오늘의 세계를 만든 결정적인 1년의 기록, 정치와 사회, 문화 부분에서 오늘날 전 세계 사람들의 삶을 지배할 힘들이 처음 등장한 기록이 마치 영화처럼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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