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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1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20년 7월
평점 :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나'의 직업은 계산사. 단순히 숫자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수치를 우뇌에 입력해서 전혀 다른 기호로 전환한 다음 좌뇌로 옮기고, 좌뇌로 옮긴 것을 처음 숫자와 전혀 다른 숫자로 꺼내서, 그걸 용지에 타이핑'하는 브레인 워시와 '세계의 끝'이라는 드라마를 불러내면 의식이 카오스로 침잠해 그 안에서 수치를 셔플하는 셔플링이라는 것을 하는 사람이다. 처음 등장부터 이 인물의 머리 쓰는 폼이 예사롭지 않다. 자신에게 일을 의뢰한 과학자를 만나러 가는 길, 양손을 좌우 주머니에 집어넣어 오른손으로는 100엔짜리와 500엔짜리 동전의 금액을 계산하고, 동시에 왼손으로는 50엔과 10엔짜리 동전의 금액을 계산하는 그를 묘사하는 문장을 읽고있자니 머리가 멍해졌다. 인간으로서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나는 한 손은 도형을 그리고 한 손은 위아래를 휘젓는 동작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데! 그렇게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니 그가 속한 조직을 통하지 않고 의뢰가 들어온 것이겠지-라고 납득하려는데, 이 과학자가 하는 일도 신기하지 그지 없다. 두개골에 숨겨진 신호를 듣는 연구를 진행하는 그의 설명에 따르면 뼈에서 기억을 수집할 수도, 주변의 소리를 뽑아내거나 심는 일도 할 수 가능하단다.
과학자의 연구실에서 브레인 워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 곧이어 과학자로부터 일각수의 두개골이 선물로 도착한다. 같이 동봉된 스테인리스 부젓가락으로 이마 부분을 가볍게 두드려보니 들려오는 '구웅'하는 소리. 그런 그의 집에 침입자가 들어온다. 한 명은 꼬마, 한 명은 덩치. 너무나 자연스럽게 문을 부수고 들어와 자신들은 '나'가 속한 조직이나, 계산사들과 대립하는 기호사가 속한 '공장'과는 다른 단체의 일원으로 ''나'는 모르는 무언가를 자신들은 알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나'의 집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조직'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방편으로 배까지 찔린 '나'의 앞에 과학자의 오동통한 손녀가 찾아와 당장 할아버지를 구하러 가야 한다고 재촉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계가 끝날 것이라면서. 앞뒤 상황 자세히 모르겠고, 영문도 알 수 없지만 과학자를 구하지 않으면 곤욕을 치르는 것은 자신이 될 것 같은 예감에 결국 그녀의 뒤를 따라 일을 의뢰받았던 연구실로 향한다.
한편 <세계의 끝>의 '나'는 어째서 이 세계로 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벽으로 둘러싸인 마을로 들어오기 전 자신의 그림자와는 이별해야했고, 이제 그는 눈에 '꿈 읽기'의 표식을 새기고 도서관에 보관된 일각수의 두개골을 통해 오래된 꿈을 읽으며 지낸다. 일각수들은 낮에는 높고 굳건한 벽에 있는 문을 통해 마을로 들어오고, 밤이 되면 다시 그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 잠을 잔다. '나'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마음이 없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아직 마음을 가지고 있는 '나'는 그림자가 죽으면 역시 마음이 없는 상태로 바뀌어버리는 것인가. 그 어느 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도서관 사서 여자에게서 아련한 그리움만을 느끼는 '나'의 생활은,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나'와는 달리 고요하고 무겁다.
1권을 다 읽었는데도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다른 두 가지 스토리를 병행해 번갈아 써 나간다. 그리고 두 이야기가 마지막에 합체된다-그런 의도였는데 그 두 이야기가 어떻게 합체되는지는 써나가면서도 알 수 없었다'고 하니, 읽는 독자인 내가 내용파악에 난항을 겪고 있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 아닌가 싶기도. 2권까지 읽다보면 두 이야기가 절묘하게 하나가 되는 지점을 발견하게 될 거라고 막연히는 생각하고 있지만 조금 답답하기는 하다.
이 와중에 섹스와 그 외 성적인 이야기는 왜 그리 자주 나오는 것인가. 내가 볼 때는 전혀 그런 이야기가 나올 상황이 아닌데도 아-주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과학자를 만나러 그의 연구실로 향할 때, 길을 안내하는 과학자의 손녀-분홍 슈트를 입고 오동통한-를 바라보면서도 살찐 여자와의 잠자리를 생각한다거나, 일각수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도서관 사서에게 부탁한 책을 그녀가 직접 가지고 나타났는데 갑자기 침대로 향한다거나 하는 다소 어이없는 상황들이 등장한다고 할까.
그런데 문제는. 이 소설의 방향이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자꾸 등장하는 성적인 이야기가 그리 달갑지는 않으면서도 이야기가 재미있다는 것. 그러니 계속 읽어나갔을테지만 이것이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가 가진 힘인가,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도서관 사서와 <세계의 끝>의 도서관 사서는 연관이 있는 것인가, 양쪽 세계의 '나'는 윤회인가 그렇지 않으면 한쪽이 다른 한쪽의 꿈같은 존재인가, 혹시 <세계의 끝>의 '나'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나'의 무의식인 걸까. 그리고 일각수가 이야기하는 꿈은 과연 무엇인지 너무너무 궁금하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나'가 그야말로 하드보일드한 상황 속에서도 덤덤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거대한 태풍 앞에서도 심드렁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는 한편, <세계의 끝>에서의 '나'는 조용하고 침묵이 덮인 마을에서 홀로 흔들리는 태도를 보이는 대비도 뭔가 의미있는 것처럼 다가온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대학 다닐 때 하도 분석하면서 읽어서인지 그동안 에세이에 집중하고 소설은 등한시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역시 재미있다. 2권에서 드러날 비밀을 기대하며, 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