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1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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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나'의 직업은 계산사. 단순히 숫자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수치를 우뇌에 입력해서 전혀 다른 기호로 전환한 다음 좌뇌로 옮기고, 좌뇌로 옮긴 것을 처음 숫자와 전혀 다른 숫자로 꺼내서, 그걸 용지에 타이핑'하는 브레인 워시와 '세계의 끝'이라는 드라마를 불러내면 의식이 카오스로 침잠해 그 안에서 수치를 셔플하는 셔플링이라는 것을 하는 사람이다. 처음 등장부터 이 인물의 머리 쓰는 폼이 예사롭지 않다. 자신에게 일을 의뢰한 과학자를 만나러 가는 길, 양손을 좌우 주머니에 집어넣어 오른손으로는 100엔짜리와 500엔짜리 동전의 금액을 계산하고, 동시에 왼손으로는 50엔과 10엔짜리 동전의 금액을 계산하는 그를 묘사하는 문장을 읽고있자니 머리가 멍해졌다. 인간으로서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나는 한 손은 도형을 그리고 한 손은 위아래를 휘젓는 동작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데! 그렇게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니 그가 속한 조직을 통하지 않고 의뢰가 들어온 것이겠지-라고 납득하려는데, 이 과학자가 하는 일도 신기하지 그지 없다. 두개골에 숨겨진 신호를 듣는 연구를 진행하는 그의 설명에 따르면 뼈에서 기억을 수집할 수도, 주변의 소리를 뽑아내거나 심는 일도 할 수 가능하단다.

 

과학자의 연구실에서 브레인 워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 곧이어 과학자로부터 일각수의 두개골이 선물로 도착한다. 같이 동봉된 스테인리스 부젓가락으로 이마 부분을 가볍게 두드려보니 들려오는 '구웅'하는 소리. 그런 그의 집에 침입자가 들어온다. 한 명은 꼬마, 한 명은 덩치. 너무나 자연스럽게 문을 부수고 들어와 자신들은 '나'가 속한 조직이나, 계산사들과 대립하는 기호사가 속한 '공장'과는 다른 단체의 일원으로 ''나'는 모르는 무언가를 자신들은 알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나'의 집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조직'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방편으로 배까지 찔린 '나'의 앞에 과학자의 오동통한 손녀가 찾아와 당장 할아버지를 구하러 가야 한다고 재촉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계가 끝날 것이라면서. 앞뒤 상황 자세히 모르겠고, 영문도 알 수 없지만 과학자를 구하지 않으면 곤욕을 치르는 것은 자신이 될 것 같은 예감에 결국 그녀의 뒤를 따라 일을 의뢰받았던 연구실로 향한다.

 

한편 <세계의 끝>의 '나'는 어째서 이 세계로 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벽으로 둘러싸인 마을로 들어오기 전 자신의 그림자와는 이별해야했고, 이제 그는 눈에 '꿈 읽기'의 표식을 새기고 도서관에 보관된 일각수의 두개골을 통해 오래된 꿈을 읽으며 지낸다. 일각수들은 낮에는 높고 굳건한 벽에 있는 문을 통해 마을로 들어오고, 밤이 되면 다시 그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 잠을 잔다. '나'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마음이 없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아직 마음을 가지고 있는 '나'는 그림자가 죽으면 역시 마음이 없는 상태로 바뀌어버리는 것인가. 그 어느 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도서관 사서 여자에게서 아련한 그리움만을 느끼는 '나'의 생활은,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나'와는 달리 고요하고 무겁다.

 

1권을 다 읽었는데도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다른 두 가지 스토리를 병행해 번갈아 써 나간다. 그리고 두 이야기가 마지막에 합체된다-그런 의도였는데 그 두 이야기가 어떻게 합체되는지는 써나가면서도 알 수 없었다'고 하니, 읽는 독자인 내가 내용파악에 난항을 겪고 있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 아닌가 싶기도. 2권까지 읽다보면 두 이야기가 절묘하게 하나가 되는 지점을 발견하게 될 거라고 막연히는 생각하고 있지만 조금 답답하기는 하다.

 

이 와중에 섹스와 그 외 성적인 이야기는 왜 그리 자주 나오는 것인가. 내가 볼 때는 전혀 그런 이야기가 나올 상황이 아닌데도 아-주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과학자를 만나러 그의 연구실로 향할 때, 길을 안내하는 과학자의 손녀-분홍 슈트를 입고 오동통한-를 바라보면서도 살찐 여자와의 잠자리를 생각한다거나, 일각수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도서관 사서에게 부탁한 책을 그녀가 직접 가지고 나타났는데 갑자기 침대로 향한다거나 하는 다소 어이없는 상황들이 등장한다고 할까.

 

그런데 문제는. 이 소설의 방향이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자꾸 등장하는 성적인 이야기가 그리 달갑지는 않으면서도 이야기가 재미있다는 것. 그러니 계속 읽어나갔을테지만 이것이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가 가진 힘인가,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도서관 사서와 <세계의 끝>의 도서관 사서는 연관이 있는 것인가, 양쪽 세계의 '나'는 윤회인가 그렇지 않으면 한쪽이 다른 한쪽의 꿈같은 존재인가, 혹시 <세계의 끝>의 '나'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나'의 무의식인 걸까. 그리고 일각수가 이야기하는 꿈은 과연 무엇인지 너무너무 궁금하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나'가 그야말로 하드보일드한 상황 속에서도 덤덤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거대한 태풍 앞에서도 심드렁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는 한편, <세계의 끝>에서의 '나'는 조용하고 침묵이 덮인 마을에서 홀로 흔들리는 태도를 보이는 대비도 뭔가 의미있는 것처럼 다가온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대학 다닐 때 하도 분석하면서 읽어서인지 그동안 에세이에 집중하고 소설은 등한시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역시 재미있다. 2권에서 드러날 비밀을 기대하며,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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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비웃는 숙녀 비웃는 숙녀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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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아버지의 죽음, 은행원이었던 동창의 죽음, 사촌 일가의 죽음, 실직한 가장의 죽음 등을 뒤에서 조종하며 생각지도 못한 반전을 선사했던 [비웃는 숙녀]의 가모우 미치루가 다시 돌아왔다! 학교 폭력과 친족 성폭행, 사치와 횡령, 존속살해, 보험금 살해 등 단어만으로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자극적인 소재로 진행되는 '이야미스'. <비웃는 숙녀> 시리즈는 인간의 어두운 심리를 주요 소재로 삼는 일본 추리소설 장르 중 하나인 이 이야미스 세계 속에서 나카야마 시치리가 창조한 '가모우 미치루'라는 여성이 종횡무진 활약(?)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시치리 월드 중 하필 제일 처음 만난 작품이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였는데, 이 작품을 읽고 내 다시는 이 작가 책을 읽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정도로 무척 역겹고 잔인한 이미지가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비웃는 숙녀>는 그 작품보다 수위가 조금 낮기는 하지만, 인간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어두운 욕망과 그 욕망을 간파해내 상대를 파탄으로 몰고 간다는 설정 자체가 피부에 벌레가 달라붙는 것 같은 감각으로 나를 괴롭혔다.

 

[다시 비웃는 숙녀]에서는 전편에서 새로운 신분으로 태어난 가모우 미치루가, 3년 후 노노미야 쿄코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타나 국회의원인 야나이 고이치로를 과녁 삼아 화살을 쏘는 이야기를 다룬다. 국회의원 자금단체인 비영리법인의 사무국장, 신자를 모아 재산을 노리는 종교 법인의 부관장, 야나이를 후원하는 모임의 후원회장, 그리고 그의 충실한 비서까지 노노미야 쿄코의 거미줄에 걸려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타인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빼앗아가면서도 시종일관 담담한 느낌으로 등장했던 미치루인데, 대체 무슨 원한이 있기에 야나이를 상대로 이런 계략을 꾸미는 것인가. 여기에 야나이에게 원한을 가지고 미치루와 함께 움직이는 남자와 미치루에게 충성을 바치는 여자까지 등장, 이들이 이제는 그들만의 왕국을 건설하는구나 하는 찰나에 또다시 일어나는 반전!

 

가모우 미치루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녀가 히어로인 줄 알았다. 친부에게 학대를 당한 상처와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세상의 악을 처단하는 멋진 영웅. 이 될 거라 기대했는데, 내 기준에 그녀는 악녀다. 자신의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지 않고 다른 사람이 상대를 끌어내리거나 죽이는 것을 보며 순수하게 기뻐한다. 그 욕망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고, 그 욕망에 몸을 맡긴 채 파괴할 대상을 발견하면 희열을 느낀다. 타고난 명석함과 교활함, 감정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 무쇠로 만들어진 심장. 미치루의 존재와 그녀가 벌이고 있는 일을 알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는 경찰들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낄 정도다.

 

'이야미스' 장르는 그 동안 의식적으로 피해왔는데,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이라 너무 궁금해 그만 읽고 말았다. 뒷맛이 매우 안좋다. 누구에게도 이렇게 타인의 삶을 조종하고 파괴할 권리는 존재하지 않을텐데, 이 이야기를 읽고 미치루를 경외하거나 따라하고 싶어할 사람들이 생길까봐 걱정스러울 정도. 과연 이 악녀가 꼬리를 잡히는 일이 일어나기는 할까. 그런 날이 과연 오려나. 드물게도 주인공이 응징을 당하게 되기를 기대하게 되는 작품이다. 역자의 말에 의하면 시치리 월드의 한 명과 맞붙게 된다는데 그 인물이 누구일지 무척 기대된다. 혹시..미코시바 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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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지나가다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3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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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사로 일하다 만난 종우와의 결혼이 취소된 후 부동산중개소 사무실에서 일하게 된 민. 그녀는 가끔, 어쩌면 자주, 버려진 가구점 안으로 들어가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손수 준비해 간 물품으로 인스턴트커피도 끓여 마시고, 진열된 침대에 누워 남몰래 눈물 흘리는 민. 누군가에게는 다소 무섭고 이질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그 가구점 안에서, 민은 그 가구들을 만든 목수의 따스한 손길과 섬세함을 느끼며 위로받는다. 누군가의 죽음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가정, 어쩌면 확신. 원래 있던 자신의 세계에서 더 버틸 수 없어 선택한 지금의 세상에서 민이 새롭게 가지게 된 취미는, 부동산중개소에 매물로 등록된 집들을 찾아가 누군가의 인생을 조용히 맛보는 것이었다. 승무원, 대학생, 헤어 디자이너, 요가 강사, 호프집 주인, 대형 마트 계산원 등. '목적 없이 태어나 아픔 없이 죽을 수 있는 공간'에서 30분짜리 생애를 지나면서 민은 정처없이 삶이라는 길을 걷고 있다. 그런 그녀 앞에 목수의 아들 수호가 나타난다.

 

아버지의 가구점 안에 흔적을 남기는 그녀는 누구인가. 수호는 궁금하다. 여자는 이 가구점 안에서 대체 무엇을 하는가. 궁금하지만 그녀가 누구인지 굳이 밝히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기에 지금 그는 매우 지쳐 있었으니까. 아버지가 가구점을 시작하면서 지게 된 빚으로 온 가족이 생활고에 시달렸고, 그 또한 신용불량자로 변변한 아르바이트 자리 하나 구하지 못했다. 그런 그의 앞에 떨어진 '박선우'라는 낯선 이름. 우연히 줍게 된 지갑 속 신분증으로 수호는 박선우라는 가면을 쓰고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아이들을 위해 쇼핑센터 옥상 위에 마련된 작은 놀이동산. 그 곳에서 그는 피에로 분장을 한 채 웃는 듯 울음을, 우는 듯 웃음을 연기한다. 그 곳에서 만난 연주. 누구보다 열심히 살지만 누구나 그녀의 노력을 알아봐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 연주에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수호는 가구점 안에서 마침내 민과 조우한다.

살아있는 것 같아. 민은 속으로 말했다. 사는 게 진짜 같고 아무것도 부끄럽지 않아, 너를 돌보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이.

p 157

본업 대신 다른 일을 하면서 30분짜리 생애를 이어가는 민은, 자신의 진짜 삶에 머무르지 못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누구도 될 수 있지만 '자신'만은 될 수 없는, 그 방황과 고독의 상처를 감기로 앓는 수호를 돌보며 조금씩 핥아나간다. 그녀가 진정으로 돌보고 있는 상대는 누구였을까. 자신이 막지 못했던 죽음, 보람연립에 살고 있는 은희 할머니, 같은 건물 1층에 사는 동욱. 모두 도움이 필요했고, 민 또한 기꺼이 그 손길을 내밀 수 있었지만 한계가 있었던 사람들. 그로 인해 가슴에 또 다른 생채기를 만들 수 밖에 없었던 그들 대신, 도움의 경계가 확실한 수호를 만나면서 민은 비로소 실체가 있는 자신의 삶으로 조금씩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온전히는 아닐지라도.

그 문을 통과하기 전, 그때껏 돌아가고 있는 회전목마를 민은 한 번 더 돌아봤다. 저곳에 앉아 있으면 세상은 끊임없이 돌아가는 작은 원처럼 보일까. 문득 그것이 궁금해졌다. 아이가 어른이 되고 어른은 노인이 되는 동안 결핍은 보완되고 상처는 치유되는 것, 혹은 삶이란 둥근 테두리 안에서 부드럽게 합쳐지고 공평하게 섞이는 것이므로 아픈 것도 없고 억울할 것도 없는 것, 그런 환상이 가능할까.

p 188

삶에 '완성'이라는 말을 쓸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의 '안정'으로 이 삶이라는 기차에 무사히 탑승하고 있다는 확신을 얻고 싶다. 수호가 연주에게 입힌 상처처럼 우리 삶에 있어 고통과 후회는 계속되겠지만, 그럼에도 그가 마침내 아버지와 마주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일단락'이라는 매듭은 지을 수 있지 않을까. 결핍과 상처, 위안과 배려가 돌고 도는 것. 그것이 세상이라고, 지금 당장 내 불안에 잠식당할 것 같아도 누군가 내미는 손으로 자그마한 희망을 보게 되는 것이라고 작가가 속삭이는 듯 하다.

 

작렬하는 뜨거운 태양을 연상하게 하는 '여름'. 그 여름의 한가운데 서 있는 인물들인데 분위기와 내가 느낀 체감 계절은 결코 여름이 아니었다. 마치 겉은 뜨겁고 속은 추위로 가득한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 등장인물들의 마음 속에 불고 있는 바람에 내 몸과 마음이 모두 움츠러들었다. 외면하고 싶지만,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생의 한계절, 여름. 읽어내려가기에 결코 쉽지 않은 작품이었지만, 서로에게 내미는 손길의 빛줄기를 분명히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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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지않아 이별입니다
나가쓰키 아마네 지음, 이선희 옮김 / 해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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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했던 취업활동이 뜻대로 되지 않자 의기소침해 있는 시미즈 미소라는 예전 아르바이트 장소인 반도회관에서 급하게 일손을 빌려달라는 연락을 받는다. 반도회관은 도쿄 스카이트리 근처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미소라의 아버지 친구인 반도씨가 운영해 연이 닿았던 곳. 둔한 면이 있는 데다 화려한 장소를 싫어하고 집과 학교가 세상의 전부인 미소라였던만큼, 경험의 폭도 넓혀보자는 취지에 꽤 높은 시급도 반도회관에서의 아르바이트 시작에 한몫했었다. 그렇게 반년만에 다시 찾은 반도회관에서 우연히 마주친 우루시바라라는 남자 직원. 사고나 사건으로 사망한 장례식을 주로 맡아 처리하는 그와, 우루시바라의 친구이자 고쇼지라는 절의 스님인 사토미 도쇼는 미소라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녀에게 우루시바라가 담당하는 장례식 일을 도와줄 것을 청한다.

 

'죽음'이라는 소재를 장례식장에서 다루는 이야기. 평소 장례식장이라고 하면 조금은 무서운 곳, 어쩐지 다가가기 꺼려지는 곳이라는 생각이 강했었는데 이 책에서 다루는 반도회관은 마음 아프면서도 따뜻한 장소다. 그저 형식적으로 장례 절차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고인과 유족의 이별을 누구보다 아파하며 정성을 다해 마지막을 준비하는 직원들의 모습에서 작중 등장하는 '장례 디렉터'는 굉장히 의미있는 직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남들보다 '기'가 발달해 고인의 모습이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미소라라니, 그녀보다 장례식장 직원에 더 적임자인 인물이 어디 있으랴. 사토미는 미소라가 가진 이 독특한 능력은 바로 그녀가 태어나기 전날 사고로 세상을 떠난 언니 미도리 덕분이라고 이야기한다. 자신 곁에 있는 미도리의 존재를 은연 중에 느끼고 있었으면서도 언니의 꿈을 꾸고나면 괴이한 일이 생겨 애써 외면해왔던 미소라는, 우루시바라와 사토미와의 만남을 계기로 반도회관의 일이 갖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인만큼 각각의 에피소드 모두 무척 가슴 아팠다. 실수로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남편만 남겨둔 채 아기와 함께 세상을 떠나고 만 만삭의 임산부, 병으로 너무 일찍 숨을 거둔 아주 어린 소녀,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을 잊지 못해 결국 자신을 망쳐버린 여인. 사토미와 미소라는 행복한 미래를 꿈꾸었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애석하게 세상을 떠난 그 억울한 마음을 쓰다듬어준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 평생을 손녀를 잃은 자책감에 괴로워했을 할머니에게, 그것은 할머니의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이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었던 미도리의 이야기도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사실 미소라는 이 작품에서 아직 풋내기에 불과하다. 자신이 가진 특별한 능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고, 순수하고 맑으며 영혼들을 볼 줄 아는 사토미의 곁에서 감탄할 뿐 아직 많이 부족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타인의 고통을 모른 척 하지 않고 어떻게든 위로해주려는 따스한 마음이 있다. 우루시바라도 그녀의 특별한 능력과 더불어 그런 마음을 알았기에 미소라에게 자신의 장례 업무를 도와달라 청한 것이다. 은근히 이 둘의 로맨스를 기대하기도 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기미만 보일랑말랑. 일본에서는 속편인 [머지않아 이별입니다 : 각자의 등불]이 출간된 듯 한데 여기에서는 이 둘의 다정한 모습도 보게 되기를 기대한다. '장례식장'이라는 장소와 '장례 디렉터'라는 직업에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해 준 작품. 과연 일본 서점 직원들의 극찬을 받을만하다.

 

덧) 저자의 필명은 남편의 기일이자 음력 9월을 뜻하는 '나가쓰키'와 하늘의 소리를 뜻하는 '아마네'를 합쳐 만든 것이라고 한다. 필명의 유래를 알고나니 더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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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옛길 사용설명서 - 서울 옛길, 600년 문화도시를 만나다
한국청소년역사문화홍보단 지음 / 창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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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아들고 그냥 버릴 뻔했다. 나름은 무척 호화롭고 멋진 책장정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물로 영접한 책은 주택공사의 브로셔 같기도. 편집을 흉보는 것이 아니라, 평소 제목도 보지 않고 버리는데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제목을 눈으로 슥 훑은 덕분에 다행히 버리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

 

아이가 커갈수록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나에게는 그저 삶의 터전인 이 곳이 아이에게는 해가 갈수록 새로운 놀이가 가득한 장소로 여겨지는지 이것저것 질문이 늘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내가 서울에 대해 아는 것이 무엇이 있나 싶다. 조선의 도읍인 한양이었던 곳. 600년의 역사를 간직한 곳. 예전에는 아이를 낳으면 어릴 때부터 여행을 떠나 세상을 보는 눈을 길러줘야지 결심했었는데, 막상 아이를 낳고 보니 굳이 먼 곳을 찾아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잘 모르는 이 곳, 서울에서부터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에 펼쳐들게 된 책.

 

[서울 옛길 사용설명서]는 서울자유시민대학의 제2차 민간연계시민대학 운영 사업인 '서울 옛길 문화콘텐츠 발굴과 활용'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저술작업에 참여한 시민들은 2019년 역사인문 지식공유 활동을 통해 옛길 12경을 답사하고, 곳곳에 스며 있는 문화콘텐츠를 발굴하였다. 그 노력의 결실 이 바로 이 [서울 옛길 사용설명서]인 것이다. 예쁜 책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소올직히! 이 책이 별로 예뻐보이지 않는다. 굳이 만들거면 좀 더 호화롭게 사진도 다채로운 컬러로 뽑아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내용에 불만은 없다. 아니, 불만을 가질 수 있을 리가! 이런 책, 나느 어디 가서 발견하고 소장하기 쉽지 않았다.

 

한양도성 자체와 내사산, 옥류동천길, 삼청동천길, 안국동천길, 제생동천길, 북영천길, 흥덕동천길, 정릉동천길, 남산동천길, 필동천길, 묵사동천길, 진고개길, 구리개길-서울 옛길의 이름을 중심으로 중요 장소와 역사에 대해 설명되어 있다. 책 내용 전부를 한 번에 꿰차기는 어렵겠지만 아이가 좀 더 자라 함께 서울 구석구석을 살펴볼 수 있게 되면 그 전에 한 번찍 정독하고 길을 나서도 좋을 것 같다. 생각만으로도 설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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