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지나가다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3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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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사로 일하다 만난 종우와의 결혼이 취소된 후 부동산중개소 사무실에서 일하게 된 민. 그녀는 가끔, 어쩌면 자주, 버려진 가구점 안으로 들어가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손수 준비해 간 물품으로 인스턴트커피도 끓여 마시고, 진열된 침대에 누워 남몰래 눈물 흘리는 민. 누군가에게는 다소 무섭고 이질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그 가구점 안에서, 민은 그 가구들을 만든 목수의 따스한 손길과 섬세함을 느끼며 위로받는다. 누군가의 죽음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가정, 어쩌면 확신. 원래 있던 자신의 세계에서 더 버틸 수 없어 선택한 지금의 세상에서 민이 새롭게 가지게 된 취미는, 부동산중개소에 매물로 등록된 집들을 찾아가 누군가의 인생을 조용히 맛보는 것이었다. 승무원, 대학생, 헤어 디자이너, 요가 강사, 호프집 주인, 대형 마트 계산원 등. '목적 없이 태어나 아픔 없이 죽을 수 있는 공간'에서 30분짜리 생애를 지나면서 민은 정처없이 삶이라는 길을 걷고 있다. 그런 그녀 앞에 목수의 아들 수호가 나타난다.

 

아버지의 가구점 안에 흔적을 남기는 그녀는 누구인가. 수호는 궁금하다. 여자는 이 가구점 안에서 대체 무엇을 하는가. 궁금하지만 그녀가 누구인지 굳이 밝히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기에 지금 그는 매우 지쳐 있었으니까. 아버지가 가구점을 시작하면서 지게 된 빚으로 온 가족이 생활고에 시달렸고, 그 또한 신용불량자로 변변한 아르바이트 자리 하나 구하지 못했다. 그런 그의 앞에 떨어진 '박선우'라는 낯선 이름. 우연히 줍게 된 지갑 속 신분증으로 수호는 박선우라는 가면을 쓰고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아이들을 위해 쇼핑센터 옥상 위에 마련된 작은 놀이동산. 그 곳에서 그는 피에로 분장을 한 채 웃는 듯 울음을, 우는 듯 웃음을 연기한다. 그 곳에서 만난 연주. 누구보다 열심히 살지만 누구나 그녀의 노력을 알아봐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 연주에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수호는 가구점 안에서 마침내 민과 조우한다.

살아있는 것 같아. 민은 속으로 말했다. 사는 게 진짜 같고 아무것도 부끄럽지 않아, 너를 돌보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이.

p 157

본업 대신 다른 일을 하면서 30분짜리 생애를 이어가는 민은, 자신의 진짜 삶에 머무르지 못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누구도 될 수 있지만 '자신'만은 될 수 없는, 그 방황과 고독의 상처를 감기로 앓는 수호를 돌보며 조금씩 핥아나간다. 그녀가 진정으로 돌보고 있는 상대는 누구였을까. 자신이 막지 못했던 죽음, 보람연립에 살고 있는 은희 할머니, 같은 건물 1층에 사는 동욱. 모두 도움이 필요했고, 민 또한 기꺼이 그 손길을 내밀 수 있었지만 한계가 있었던 사람들. 그로 인해 가슴에 또 다른 생채기를 만들 수 밖에 없었던 그들 대신, 도움의 경계가 확실한 수호를 만나면서 민은 비로소 실체가 있는 자신의 삶으로 조금씩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온전히는 아닐지라도.

그 문을 통과하기 전, 그때껏 돌아가고 있는 회전목마를 민은 한 번 더 돌아봤다. 저곳에 앉아 있으면 세상은 끊임없이 돌아가는 작은 원처럼 보일까. 문득 그것이 궁금해졌다. 아이가 어른이 되고 어른은 노인이 되는 동안 결핍은 보완되고 상처는 치유되는 것, 혹은 삶이란 둥근 테두리 안에서 부드럽게 합쳐지고 공평하게 섞이는 것이므로 아픈 것도 없고 억울할 것도 없는 것, 그런 환상이 가능할까.

p 188

삶에 '완성'이라는 말을 쓸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의 '안정'으로 이 삶이라는 기차에 무사히 탑승하고 있다는 확신을 얻고 싶다. 수호가 연주에게 입힌 상처처럼 우리 삶에 있어 고통과 후회는 계속되겠지만, 그럼에도 그가 마침내 아버지와 마주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일단락'이라는 매듭은 지을 수 있지 않을까. 결핍과 상처, 위안과 배려가 돌고 도는 것. 그것이 세상이라고, 지금 당장 내 불안에 잠식당할 것 같아도 누군가 내미는 손으로 자그마한 희망을 보게 되는 것이라고 작가가 속삭이는 듯 하다.

 

작렬하는 뜨거운 태양을 연상하게 하는 '여름'. 그 여름의 한가운데 서 있는 인물들인데 분위기와 내가 느낀 체감 계절은 결코 여름이 아니었다. 마치 겉은 뜨겁고 속은 추위로 가득한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 등장인물들의 마음 속에 불고 있는 바람에 내 몸과 마음이 모두 움츠러들었다. 외면하고 싶지만,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생의 한계절, 여름. 읽어내려가기에 결코 쉽지 않은 작품이었지만, 서로에게 내미는 손길의 빛줄기를 분명히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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