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생활 풍경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모스 오즈 지음, 최정수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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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 오즈의 작품은 처음이지만 이 작품집은 '세계의 다른 한편에서 알레고리로 읽히곤 하는' 그런 소설이 아닙니다. 작가가 원하는대로 일반적인 사람들의 각양각색의 모습이 그려져 있죠. 그는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던 듯 하지만 저는 이 작품집에서 메세지보다 분위기에 흠뻑 매료되었답니다. 밝고 희망적인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어째서인지 저는 한 편 한 편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알퐁스 도데의 작품 <별>이 떠올랐어요. 이 [시골 생활 풍경]은 '서정미'로 정리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작가는 가공의 마을 텔일란을 배경으로 마을 사람들의 평온한 삶 뒤에 숨겨진 비밀과 사랑, 쓸쓸함, 균열 등을 안정되고 침착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번 이야기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 누군가는 또 다른 어딘가에서 주변인물로 그려지며 하나의 가공된 세상을 이루고 있지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기보다 독립적 개체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기에 굳이 해석을 더해보자면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삶의 고민, 사랑, 갈등은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며 그것을 극복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은 결국 혼자만의 과제라는 메세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합니다.

 

총 여덟 편의 에피소드입니다. 누군가는 낯선 이의 방문을 받고, 누군가는 오기로 약속한 조카의 당도가 늦어짐을 기다리죠. 어떤 이는 딸과 함께 노년을 보내고 또 어떤 이는 쪽지를 남기고 나가 돌아오지 않는 아내를 기다려요. 연상의 여인을 사랑하는 소년도 있고 십대 아들을 자살로 잃은 부부가 아무렇지 않게 살아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 다루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제가 감탄한 점은 이 모든 이야기의 소재와 감정은 제각각이지만 '서정성'이 작품 전체에 퍼져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한 편의 미스터리 같은 이야기도 소년의 격정적인 짝사랑도 미스터리와 격정적인 사랑보다는 감미롭게 다가온다고 해야 할까요. 결론을 내지 않고 물 흐르듯 계속되는 듯한 분위기도 서정성을 한층 진하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젊은 작가는 이런 책을 쓸 수 없을 겁니다'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죠. 시간이 흘러야만 알게 되는 감정이 있고 오랜 세월을 통해 만들어지는 삶에 대한 통찰이라는 것도 있으니까요. 젊은 작가들이 드러내는 삶에 대한 격정, 로맨스, 활기참도 좋지만 노작가가 그려낸 은은하면서도 고요한 삶의 풍경도 괜찮다는 생각이 듭니다. 2010 지중해 문학상 외국문학상 수상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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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의 고치 작가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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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색 연구]로 급관심을 가지게 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아리스 시리즈> 입니다. 솔직히 내용도 궁금하긴 했지만 저의 주된 관심사는 작가 아리스와 탐정 히무라 콤비의 알콩달콩 애정(?)행각이었답니다. 두 사람에게 애인이 생기는 것은 절대 허락할 수 없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갖게 할 정도로 이 콤비들, 정말 사랑스러워요. 과거의 무슨 일로 인해 상처를 갖게 된 듯 사람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 범죄 수사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히무라와, 그런 그의 곁에서 개인적인 사정을 캐묻지 않고 묵묵히, 때로는 구박을 당하며 히무라의 뒤를 서포트해 주는 아리스는 이상적인 친구 관계이자 이상적인 연인관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에헹.

 

[주홍색 연구]리뷰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이 <아리스 시리즈>의 차근차근 행보가 마음에 듭니다. 저는 작품 안에서 사용된 트릭이나 사건의 경위들을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작가를 선호하는 편인데요, 그런 점에서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저의 워너비 작가라고나 할까요. 게다가 500페이지에 육박하는 결코 가볍지 않은 두께임에도 가독성이 있어 슉슉 읽히는 데다 문장 하나하나가 저를 흡입하는 것 같은 느낌은, 캬! 이것이야말로 책과 내가 혼연일체가 되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무아지경, 누구나가 추구하는 독서의 시간 아니겠습니까. 작가가 문장을 유려하게 쓴 것인지, 옮긴이가 적절하게 번역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오홋.

 

이번 사건의 피해자는 예술가 살바도르 달리의 신봉자이자 연매출 100억 엔대의 주얼리 브랜드 사장 도조 슈이치입니다. 그는 살바도르 달리를 너무나도 추앙한 나머지 달리의 트레이드 마크인 기이한 수염마저 따라하는 사람이었는데요, 고치로 표현되는 프로트 캡슐 안에서 시체로 발견됩니다. 게다가 그의 수염은 잘려나간 상태. 언뜻 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 현장을 조사하고 주변 인물들을 차례로 탐색한 결과 누군가가 용의자로 지목됩니다. 겉으로는 당당하고 자신감에 차 보였던 도조 슈이치의 숨겨진 가족사와 그의 사랑이 사건 속에서 어떻게 밝혀지는 지 페이지를 넘길수록 흥미진진, 두근두근해져요.

 

이 작품은 책 표지 뒷면에 쓰인 것처럼 연애소설로도 추리소설로도 손색이 없는 데다, 인간의 추악한 욕망이 안타깝게도 슬프게도 그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뉴스나 신문에서 접하면 무섭게 느껴질만한 사건이지만, 인물의 심리가 어느 정도 이해되기도 해요. 사랑이란, 참 아름다우면서도 지독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이랄까요. 여기에 하나의 수확이 있었다면, 화가 살바도르 달리를 알게 되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야기 속에 그의 작품 제목이 등장하기도 하여 궁금증에 찾아보기도 했는데, 저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세계였지만, 그 수염 하나만은 확실히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무튼 접할수록 사랑스러워지고 흥미로워지는 아리스와 히무라 콤비입니다. 히무라가 -사람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언제였는지, 그 때의 일과 관련된 사건을 다루는 작품은 언제쯤 만나볼 수 있나 벌써부터 조바심이 생겨요. 혹시 이미 출간되었는데 제가 모르고 있는 것이라면, 이 글을 읽어주신 어떤 분, 부디 은총을 베풀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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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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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내 친구들에게 '여름 눈 송아지(나쓰=여름, 메=눈, 소세키는 그냥 한국어 발음대로의 의미)'씨로 불리던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문학을 공부한 사람에게는 문학계의 거장이라 불리는 사람이다. 대학 다닐 때 한 교수님은 '일본 가서 생활할 때 필요한 말은 스미마셍, 도우모, 도우조+나쓰메 소세키야' 라고 말씀하셨었는데 이 여름 눈 송아지씨는 일본 사람들에게 있어 절대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듯 하다. 할 말이 없어지면 나쓰메 소세키를 소재로 삼아 이야기의 운을 띄워 보라고, 그럼 그 일본 사람이 너를 대단한 사람이라 여길 거라던 이야기들은 자연스럽게 -대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작가길래-라는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직결되었다. 근대 문학의 아버지이자 일본작가 중 대다수가 자신의 문학적 영혼의 근거로 들고 있는 나쓰메 소세키. 대학 때는 그의 작품을 원서로 읽으며 문장 하나하나의 의미와 행간의 여운까지도 곱씹었었는데, 맙소사! 그게 대체 몇 년 전이람!

 

[그 후], [산시로]와 함께 나쓰메 소세키 전기 3부작이라 불리는 [문]은 임용고시 문제에도 출제된다 하여, 기계적으로 열심히 외웠었다. 하지만 직접 작품을 만나 볼 기회도 없었고 어쩐지 시험 문제용 작품같아 약간 거리를 두고 있던 참에 이렇게 접하게 되니 반가운 마음 그지 없다 할까나. 많은 수는 아니지만 여름 눈 송아지씨의 작품을 몇 편 읽어본 경험으로는 꽤 의미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아 약간 기대를 했는데, 그 동안 읽은 작품들에 비해 큰 재미를 얻지는 못한 것 같다. 작품의 분위기가 굴곡이 없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 또한 작가의 의도였는지도 모르지만.

 

주인공은 소스케. 아내와 함께 조용하고 한적한 삶을 이어가는 평범한 남자다. 큰 소리 한 번 내는 일 없이 하루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쉬고, 다시 일어나 일을 나가며 휴일에는 뒹굴뒹굴 늦게까지 잠을 자는 것으로 휴일을 즐기는 별 특징없는 사람이라고 할까. 그의 아내 오요네도 조용한 여인으로 때 되면 밥 하고 집안일하고 직장 갔다 돌아오는 남편을 맞이하는 것이 일상인 평범한 주부. 그런 그들의 삶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소스케의 동생 고로쿠다. 사실 고로쿠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청춘으로 그가 상상했던 삶과 실제로 지내는 삶의 간극이 너무 커서 방황하고 있는 입장이지만, 아무리 그런 점을 감안하고 본다고 해도 동생인 그의 눈에도 소스케는 참으로 우유부단하고 생기없는 남자인 것이다.

 

아직 젊은데도 노부부같은 일상을 이어나가는 데다, 작품이 풍기는 분위기로 볼 때 아이의 존재도 느껴지지 않는 그들의 삶은 흘러가는 물처럼 그저 고요할 뿐이다. 초반을 거쳐 중반으로 이어지는 부분까지 계속되는 그런 분위기에 슬쩍 의아함을 느끼기는 했으나 그런 분위기는 작가가 의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스케와 오요네의 관계가 불륜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일까. 친구의 부인이었던 오요네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된 소스케의 가정에는 어찌 된 일인지 아이가 허락되지 않는다. 그것을 업보라 여기며 소스케와 오요네는 조용한 삶을 자청해왔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소스케에게 '문'이란 소스케 내면의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죄의식과도 같은 것이다. 오요네를 얻은 대가로 자신의 죄를 늘 의식하면서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한 삶을 이어나가는 것. 그 문은 결코 그냥 통과할 수도 사라져 버리게 할 수도 없이 오롯이 그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삶의 표식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마음]에서도 친구의 신의를 배신한 주인공을 내세워 그것을 인간의 존재와 결부시켜 표현했었는데 [문]을 읽고보니 작가는 그런 인간의 비겁한 마음들을 소재로 한 번의 잘못된 선택들이 그 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에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박하게 시작된 작품은 소박하게 끝이 난다. 오요네가 봄의 기운을 느끼고 기뻐하자 소스케는 금방 또 겨울이 올 거라며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예전 배신했던 야스이와의 예기치 않은 만남을 한 번은 피할 수 있었지만 다시 그런 상황이 올 수도 있음을 염려하는 목소리같기도 하다. 결국 자신과 오요네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들은, 지금까지 어떤 모습으로든 보여져왔으며 지금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또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들의 인생의 굴곡에 걸맞지 않게 단조롭게 쓰여진 작품이라 -재미있다-고 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여운이 느껴지고, 그 여운에 자꾸만 빠져들게 되는 그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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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삼촌 브루스 리 1
천명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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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 작가의 [고래]는 문학동네 수상작들 중에서도 전설이라 전해진다고 합니다. 저도 지인의 강력한 추천 덕에 무척 재미있게 읽었었는데요, 처음 작품이 강렬하면 할수록 그 뒤에 나오는 작품들에 기대를 거는 건 당연한 일인 것 같아요. 저는 [고래] 이외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지 않아서 천명관 작가의 그 동안의 필력과 판매추이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각자의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바람에 실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고래]의 존재가 오히려 작가에게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나의 삼촌 브루스 리]는 이소룡을 너무나 사랑하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이름은 권도운, 이름에서조차 무도인의 기운이 묻어나는 그는 이소룡을 우상으로 삼아 낙이 없는 하루하루를 버텨가는 사람이에요. 서자로 태어났으나 이렇다 할 구박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출생으로부터 비롯된 기죽음은 그를 위축된 말더듬이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꿈이라고 한다면 오직 이소룡같은 무도인이 되는 것이라고 할까요. 그러나 순박하고 물정 모르는 그에게 운명은 가혹한 장난을 서슴치 않네요. 1권에서 그려지는 그의 삶은 정에 굶주려 만난 여자친구의 원하지 않은 임신, 도주, 홍콩 밀항, 삼청교육대에서의 혹독한 날들, 살인 현장의 목격자로 끊임없는 고난과 시련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희대의 이야기꾼이라 칭송받던 그답게 에피소드가 한없이 펼쳐집니다. 장면 하나하나를 묘사하는 문장도 맛깔나요. 얼씨구절씨구 쿵덕쿵덕-의 느낌이라고 하면 너무 애매~할까요! 심각한 상황임에도 웃음이 터지거나 분명 슬픈 상황임에도 권도운, 그이기 때문에 그다지 슬프게 느껴지지 않는 듯한 해학적인 장면들도 있어요. 저는 그런 모든 상황들 속에서도 '삼촌'이 할머니, 아버지의 본부인, 즉 큰어머니라 불리는 여인의 죽음 앞에서 서럽게 울던 장면이 유독 기억에 남아요. 비록 핏줄로 연결된 것은 아니었고 눈에 띄게 살갑게 대해준 것도 아니었으나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오롯이 받아들여준 '어머니'였기에 그의 슬픔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런 에피소드들이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고 할까요. 자꾸만 꼬여가는 그의 인생이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는 점에서 이 작품에 대한 기대감이 점점 낮아진다고 해야할까요. 결국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2권에서 판가름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금은 뻔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들을 어떻게 정리해서 색다른 감동과 기적을 보여줄 지 궁금하네요. 지금으로서는 아무리 소설 속 가상의 인물이라 해도 이소룡을 너무나 사랑하고 오직 그처럼 살아가는 것만이 인생의 꿈인 '삼촌'이 이제는 행복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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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계곡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10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0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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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읽은 후 그 후의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다른 책들은 한 쪽에 밀어둔 채 [시인의 계곡]을 펼쳤습니다. [시인]이라는 엄청난 작품을 만난 후였기에 -에이, 그만한 작품을 금방 또 만날 수 있겠어?-하는 의심과, -그래도 마이클 코넬리'님이니까-라는 신뢰를 반반씩 안은 상태였는데요, 역시 [시인]의 후유증이 너무 컸나 봅니다, 흑흑. 범인이 FBI 요원인 레이철과 과연 어떤 대결을 펼칠 지 기대했건만. 이 작품에는 전작의 잭 매커보이 기자 대신 마이클 코넬리'님'의 다른 시리즈의 주인공 히에로니무스 보슈, 일명 해리 보슈가 등장합니다. 짜잔!

 

개인적으로는 잭 매커보이와 레이철의 관계에 아직은 마침표가 찍어지지 않았다 믿고 싶었기 때문에 해리 보슈 대신 잭 매커보이가 등장해주기를 기대했다죠. 해리 보슈는 전직 형사라서 그런지 잭 매커보이보다 마초의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으흠. 대충 나이를 계산해보면 50대 정도인 듯 한데, 우리나라의 아저씨가 아니라 로맨스 그레이, 혹은 듬직한 미남형의 이미지가 그려지는 왜일까요. 으훗.

 

이야기는 작가의 다른 스탠드 얼론 작품이었던 [블러드 워크]의 주인공 테리 매컬렙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제가 처음 접한 작가의 작품이 바로 [블러드 워크]였는데요, 그래도 나름 주인공의 자리를 꿰차고 있었던 테리가 죽음을 맞았다는 것에서 1차 쇼크, [블러드 워크]에서 만나 사랑을 이룬 그래시엘라와 결혼까지 했는데도 그 생활이 해피하지만은 않았던 데서 2차 쇼크를 받았습니다. 아무리 결혼은 현실이라지만 테리는 소설 속 주인공, 현실과는 달리 행복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단 말입니까! 작가님의 잔혹한(?) 처분에 -너무해!-를 외치고 말았답니다. 어쨌든 그 테리의 죽음을 수상히 여긴 그의 부인 그래시엘라의 부탁으로 해리는 테리의 죽음에 대해 조사해 나가기 시작하는데요, 그 접점에 '시인'을 잊지 못하고 기다리는 레이철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범인은 공개된 상태에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처음부터 범인이 등장한다고 해서 무조건 긴장감이 떨어지라는 법은 없지만, 어쩐지 이 [시인의 계곡]에서는 무지무지 긴장감이 떨어지고 말았다는 느낌입니다. 범인은 이미 알고 있고, 그가 어떤 상태로든 (죽든 살든) 해리 보슈와 레이철에게 잡힐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어쩌면 그 과정에서 레이철이 죽는다고 해도(해리는 시리즈를 이끌어 가야 하니까 절대 죽을 수 없겠죠!) 더 이상 충격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시인]과 같은 반전을 맛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이 작품은 다른 작가들의 베스트셀러가 아닌 바로 동일한 작가의 [시인]이 오히려 경쟁자가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님도 [시인]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생각에 엄청 괴로워했을 것 같아요.

 

또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조금 세심한 배려가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었어요. 테리는 [블러드 워크]에 등장했고 [시인의 계곡]에서는 [블러드 워크]가 영화화 된 것을 책 속에서도 차용하고 있는데요, 그 외에 테리와 해리가 함께 겪었던 일, 해리와 그의 전처에 관한 일 등이 그저 암시로만 그쳐 아직 해리 보슈가 등장하는 다른 작품을 읽어보지 못한 저로서는 굉장히 답답했어요. 혹시 [블러드 워크]에 등장했던 일이었나 싶어서 도중에 그 책을 들춰보기도 하는 통에 몰입도가 조금 낮아지고 말았습니다.

 

또또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왜! 어째서! 해리와 레이철이 므훗한 관계가 되고야 말았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러고나서 레이철은 또 훌쩍 떠나버리잖아요. 마치 할리우드 영화 시리즈에서 매번 다른 여자주인공들과 하나같이 므훗한 관계가 되고 마는 남자 배우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해리 보슈도 다른 이야기들에서는 매번 다른 여자들과 므훗한 사이가 되는 걸까요. 켁. 그러고보니 잠깐 등장했다 사라진 '제인'이라는 비밀의 그 여인은 다른 시리즈에 등장하는 것일까요.

 

뭐 그럼에도 작가님의 다른 작품들에 대한 기대는 변함이 없습니다. [시인의 계곡]은 [시인]과 대결해야 한다는 핸디캡도 안고 있었고, 범인이 이미 밝혀진 상태였으므로 과장된 반전을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고 생각하니까요. 시인은 저 멀리 보내버리고 이제부터는 이 히에로니무스 보슈가 간직하고 있는 마력에 빠져보겠사옵니다, 푸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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