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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다크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평점 :
[어둠 속을 걸어, 어둠 너머로]
오랜만에 읽는, 얇지만 뭔가 형용할 수 없는 묵직함이 느껴지는 하루키의 작품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이 책이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을 때 한 번 읽었던 적이 있는 것 같아요. 그 때는 어리기도 했고 하루키의 글에서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터라 훌렁훌렁 책장을 넘기는 데 의의를 두었었는데 시간이 흘러 다시 읽으니 새로운 느낌이 나긴 합니다. 전 하루키의 소설보다는 에세이를 더 선호하는 편이라 사실 이 [애프터 다크]도 조금 어렵게 다가왔어요. 과연 소설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일까,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거에요. 그러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작가는 우리 모두, 각자가 걷고 있는 어둠을 마리와 에리, 주변인물들을 통해 형상화하려 했던 게 아닐까. 그 어둠을 벗어나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 어둠이란 고민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삶의 무게, 혹은 마음 속 깊은 곳 숨어있는 악의도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프터 다크]에서 작가가 보여준 서술방식은 촬영 카메라 같았어요. ‘보이는 것은 도시의 모습이다’로 시작하는 문체는 담담히,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인물들을 관찰합니다.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절대 알 수 없어요. 한밤중에 식당에 홀로 앉아 책을 읽는 마리가 있습니다. 그런 그녀 곁을 우연히 스쳐지나가는, 예전에 한 번 어울린 적이 있는 다카하시가 있죠. 일상대화 같으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헤어지고, 마리는 의도치 않게 ‘알파빌’이라는 모텔에서 온 연락을 받으며 새로운 인물들과 마주합니다. 밤을 보내는 사람들, 밤을 걷는 사람들과. 그 와중에 사이사이에 잠들어있는 마리의 언니 에리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녀에게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암시하죠.
처음 몇 장을 읽었을 때는 말 그대로 ‘우와, 이게 뭔가’ 했어요. 알쏭달쏭, 하루키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 보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끝으로 갈수록 메말라있던 부분에서 감정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에리와 마리의 관계도 생각해보면서 조금씩 서정적인 부분도 느껴집니다.
시간을 들여서 자기 세계 같은 걸 조금씩 만들어왔다는 자각은 있어요. 혼자서 거기 들어가 있으면 어느 정도 마음이 놓여요. 하지만 그런 세계를 구태여 만들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제가 상처받기 쉬운 약한 인간이란 뜻 아닌가요? 게다가 그 세계란 것도 다른 사람들이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보잘것없는 세계라고요. 종이 상자로 지은 집처럼 조금만 센 바람이 불면 어디론가 날려갈 것 같은...
이도저도 다 떠나서 저는 이 문장들에 마음을 뺏겼습니다. 마치 제 마음을 그대로 글로 옮겨놓은 것 같아서요. 저는 매우 방어적이고 겁도 많고, 확실하게 저만의 세계가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으니까요. 나만 그런 게 아닐까 라는 두려움은 더 강하게 저를 저만의 방 안에 앉혀놓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마리가 몰랐던 에리의 고민이 있듯이, 누구에게나 각자의 삶의 무게와 어둠이 있듯이 저만 아니라 모두가 각자의 세계, 각자의 방이 있는 게 아닐까요. 하루키의 이 문장들을 보는 순간, 어째서인지 안도감이 밀려왔다고 한다면 저는 약한 인간인 걸까요. 잠들었던 에리가 이쪽으로 징표를 보이는 것처럼 우리의 어둠을 희미하게 만들어줄 계기를 발견한다면 행복하겠죠. 하루키는 ‘어둠’이라는 소재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절망’보다는 ‘희망’을 더 말하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모차르트 <마술피리>의 시련처럼 얼마간의 고통을 직접 겪으면서 스스로 공포를 헤쳐나가지 않으면 진짜 성장이란 없을 겁니다. 진짜 어른이 될 수 없습니다.
아하. 그래서 마리와 에리, 그리고 마리가 도와준 중국인 소녀의 나이가 열아홉이었던 걸까요. 어른과 아이의 모호한 경계를 이루는 나이.
여담이지만 속표지가 정말 예쁘네요. 이사한 지 꽤 되었는데도 노트북 설정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사진을 올릴 수 없는 점이 꽤 안타까울 정도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