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장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7
나가오카 히로키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작년 여름 홋카이도에 갔을 때 저의 발목을 많이 붙잡았던 곳 중 하나는 서점이었습니다. 마음만큼 책을 사가봤자 분명히 쌓아놓기만 하고 제대로 읽을 시간도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자꾸 욕심이 생기는 거에요. 여러 가지 먹거리도 사야 하고, 정해진 무게를 넘으면 추가요금을 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마음을 다잡았지만 결국 가방 여기저기에 책을 꾹꾹 눌러 넣는 형국이 되었답니다. 그렇게 몇 권의 책을 고르기 위해 서점을 휩쓸고 다니던 그 때, 나가오카 히로키의 [교장]도 서점 한쪽 면을 차지하고 있었어요. 무척 인기 있는 도서를 소개하는 코너 같은 곳에서요. 그 때 구입했던 책들도 1년쯤 지나자 한국어판이 나오기 시작했고, 제 기억 속 아스라이 존재하던 [교장]도 요렇게 만나게 됐네요.

사실 나가오카 히로키라는 작가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귀동냥]을 통해서였는데, -지난 20년간 최고의 걸작-이라는 호평을 받은 작품치고 저는 그저 그렇다는 인상을 받았었거든요. 그래서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읽었는데 웬걸, [귀동냥]보다 훨씬 재미있었어요! 급박한 사건이나 롤러코스터에 비유할 수 있는 스릴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내면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에피소드들이 흥미로웠습니다. 그 중에는 제가 개인적으로 품고 있는, 어쩐지 이건 일본작가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일본이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분위기와 사건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이야기들도 있어서 조금 섬뜩함을 느끼기도 했지만요.

6편의 에피소드에 에필로그까지, 총 7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배경은 경찰학교지만 경찰을 꿈꾸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청춘소설이 아니라, 마치 그 내부를 고발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다소 음울한 작품이었어요. 생도들 사이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경쟁의식, 그로 인해 비롯되는 고발과 복수, 부적절한 거래 등. 우리나라에서 경찰학교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나온다면 그 안에서 맞게 되는 위기를 뛰어넘고 누구와 누구는 우정으로, 누구와 누구는 사랑으로 이어지는 내용이 전개되겠지만, 나가오카 히로키가 보여주는 경찰학교의 내부는, 마치 이런 저런 음울한 사회가 있다는 것, 졸업하고 현장에 뛰어들면 이보다 더 가혹한 세계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니 각오를 단단히 하고 사회 속으로 나아가라는 메시지도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이 감탄스러웠던 것 같아요. 작가 자신이 어중간한 마음으로는 계속할 수 없는 일이 바로 경찰이라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습니다

각각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도 잘 살아있지만 역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가자마 기미치카일 겁니다. 보고 있는 것 같지만 보고 있다는 느낌이 잘 나지 않는, 그러면서도 상대를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을 가진 백발의 남자. 그의 교육법은 뭐랄까, 상당히 과격한 편입니다. 물리적인 힘을 가한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그는 생도들이 어디까지 행동을 취하는지, 그리고 그 행동을 통해 무엇을 느끼는지를 관찰합니다. 극한의 위기의 순간에도요. 그런 그를 의식하게 된 생도들은 그를 존경하기도, 두려워하기도 하지만 결국 나름대로 무언가를 느끼고 얻게 되죠. 다른 작품들에서 보기 쉽지 않은, 정말 독특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작품은 연작단편집이지만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한 장편도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나가오카 히로키가 쓴 장편. 단편과는 다른 어떤 맛을 낼지 궁금합니다. 그 작품에 이 가자마 기미치카가 등장한다면 더 반가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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