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과 다른 사람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4
세스 노터봄 지음, 지명숙 옮김 / 민음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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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필립과 알렉산더 삼촌과의 만남이 담긴 1장은 정말이지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무척 아름다운 부분이다. 내가 읽은 책 중 '가장 아름다운 부분' 하면 바로 이 필립과 알렉산더 삼촌과의 만남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린 필립의 눈에 이상하게만 보이는 칠순 노인인 알렉산더 삼촌, 아아 내게도 이런 삼촌이 있었다면!

네가 필립이냐? 빈손으로 왔어? 우리 축하 파티를 할까? 네가 즐겨하는 게 뭐냐?

저녁 늦게 아니면 한밤중에 버스 타고 다니는 거, 물가에 가 앉아 있는 거, 비 맞고 쏘다니는 거, 누군가와 뽀뽀하는 거 좋아한다는 필립을 위해 알렉산더 삼촌이 마련한 축하 파티는,

버스를 타고 먼저 루넌으로 갔다가 다시 로스드레흐트로 되돌아오자꾸나. 거기서 호숫가에 가 앉아 있다가 뭘 좀 마시든지 하고, 그런 다음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자, 이다.

그렇게 들른 호숫가에서 칠순의 삼촌이 운다. 우는 게 아니라고 말하지만, 삼촌은 울고 있다.

왜 결혼 하지 않았느냐는 필립의 질문에 삼촌은 이렇게 대답한다.

"난 나 스스로하고 결혼한 셈이지. 원래 그대로의 나 자신이 아니라, 나로 변신해 버린 추억하고 말이야.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니?"

필립도 나도 무슨 말인지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삼촌의 그 말은 왠지 굉장히 멋있게 들렸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서도 축하파티는 끝나지 않았다. 삼촌은 필립을 다해 열정적으로 피아노 연주를 해준다. 아아, 알렉산더 삼촌! 내게도 이런 삼촌이 있었다면! (나는 정말이지, 칠순의 알렉산더 삼촌에게 반해버렸다!)

그리고 알렉산더 삼촌과 그의 꼬마 친구 폴 스웨일로의 이야기...

 

책 전체 분량의 1/5도 안 되는 이 장면에 완전히 반해버려 나는 이 책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졌다.

 

책의 나머지 부분은 필립이 중국인 소녀를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 이야기이다. 제목 그대로, 필립과 다른 사람들.

사실 훨씬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이 이야기들은 내게 그렇게 큰 감흥을 안겨주지 못 했다. 그 누구와의 만남도 알렉산더 삼촌과의 만남만큼 와 닿지 않았다. 그 분위기를 잔뜩 기대하고 읽어나간지라 조금쯤 아쉬운 마음이 든 게 사실이다.

 

다음에는 알렉산더 삼촌만 좋아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 이야기에도 좀 더 관심을 기울여줘야지.

아아, 이 아름다운 앞부분을 얼른 다시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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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밭의 고독 속에서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4
베르나르마리 콜테스 지음, 임수현 옮김 / 민음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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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와 '숲에 이르기 직전의 방' 두 작품이 실려 있다.

처음에는 두 작품인 줄 모르고 1막, 2막의 개념인 줄 알고 읽다가 한참을 어리둥절해 했다.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는 단 두 명만의 인물이 긴 대사를 주고 받고, '숲에 이르기 직전의 방'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마침표가 없다) 독백이다.

이처럼 독백이나 독백에 가까운 대사로 이루어진 희곡이 많은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읽은 몇 권 안되는 희곡 중에서는 처음인지라 무척 신선하고 색다른 느낌이었다.

내용 자체는 좀 심오하고 어려워서 잘 읽어내지 못 했지만, 독백의 분위기도 무척 마음에 들고, 밑줄 그은 문장도 많았다.(앞의 책에서는 밑줄 그은 문장이 별로 없었다고 투덜댔는데, 이게 바로 내 '취향'이다. 나는 밑줄 긋게 만드는 문장이 많은 책을 좋아한다. 아무리 재미있어도 밑줄 그은 문장이 적으면 '건진 게 없다'며 허전해지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건진 게 많은, 만족스러운 책이 되겠다.)

 

두 작품 중 나는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가 더 마음에 들었는데, 손님이 원하는 게 뭔지는 몰라도 그걸 가지고 있으니 팔 수 있다는 딜러와, 스스로도 원하는 게 뭔지 모르므로 그걸 팔 수 있을 리 없다는 손님 사이에 펼쳐지는 자기 주장이 무척 흥미로웠다.

 

사실 이 책을 읽을 때, 나는 다른 일에 완전히 정신이 팔려 책 속에 온전히 집중할 수가 없었는데, 그럼에도 자기 전에는 꼭 책을 읽어야 하는 습관을 버리지도 못 해 딴 생각과 책장 사이를 오가며 읽느라, 읽으며 책에게도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딴 데 정신 팔며 너를 읽으며 안 되는데, 이렇게 멋진 문장들이 내 눈과 마음을 호강 시켜 주고 있는데, 내가 이렇게 허술하게 너를 읽다니...

 

이 책 역시 다시 읽을 책 목록에 올려두었다. 그때는 좀 더 맑고 깨끗한 정신으로 만나야지.

 

 

_ 나는 하늘을 바라보면 회상에 젖고, 땅에 시선을 고정시키면 슬퍼집니다.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아쉬워하는 것과 그 무엇을 갖지조차 못했음을 회상하는 것은 모두 똑같이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니 발이 잠시 머물게 된 위치가 어디건 간에, 그 높이에서 자기 앞을 똑바로 바라봐야만 합니다.(28)

 

_ 정말로 끔찍하고 잔인한 건 한 인간이나 짐승이 다른 인간이나 짐승을 미완성의 상태로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마치 말줄임표가 문장을 한가운데서 중단시키듯, 누군가를 보자마자 고개를 돌려버리듯, 짐승이나 인간을 잘못 쳐다본 것, 잘못 판단한 것, 하나의 실수로 만들어버리듯, 쓰기 시작한 편지를 날짜까지 쓰고 나서 갑자기 구겨버리듯이 말입니다.(40~41)

 

_ 생각이 마음껏 방랑하는 걸 보는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적절한 감각을 잃을 때까지 내버려두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요.(46)

 

_ 저녁은 망각과, 혼란과, 너무나 뜨거워서 수증기가 되어버린 욕망의 시간이지요. 하지만 침대 위에 드리운 거대한 구름처럼, 아침은 그 욕망을 주워 담습니다.(57)

 

_ 추억이란 사람이 발가벗겨졌을 때조차도 꼭 지니고 있는 비밀 무기랍니다.(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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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으로의 긴 여로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9
유진 오닐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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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유진 오닐이 자신의 사후 25년 동안은 절대로 발표하지 말라고 한 작품이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작가 자신에게 큰 상처를 준 가족사를 낱낱이 밝힌, 자전적인 요소가 강한 글이기 때문이다.

이 희곡 속의 이야기가 실제 작가 가족의 모습이었다면, 사후 25년 간 발표하지 말라고 한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 같다.

 

한때는 성공한 연극배우였지만 지나치게 돈에 집착하다 가족들에게 신뢰를 잃게 되는 아버지, 마약 중독으로 몇 년 동안 병원 생활을 하다 나와서도 여전히 약물을 떠나지 못하는 어머니, 술과 여자나 즐기며 방탕하게 사는 큰 아들, 폐병에 걸려 요양을 가야 하는 병약한 둘째 아들, (여기에 갓난 아기 때 큰 아들에 의해 목숨을 잃은 아들이 두 아들 사이에 하나 더 있었다) 이 네 가족의 이야기가 정말 아슬아슬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가정은 여기저기 금이 가고 깨지고 망가져 조그만 충격에도 금세라도 무너져내릴 듯 보인다. 그걸 가족들도 알기에 서로 조심하려 노력하며 눈치를 보고 태평한 모습을 가장하지만, 가장은 가장일 뿐, 취중진담이라고 술 기운을 빌려 진담을 쏟아내기도 하고 은연중에 속에 품었던 마음을 끄집어 내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이런 가족의 모습이었으니, 게다가 감추려야 감출 수 없이 자전적 글임이 탄로(?)나므로, 아무리 자신의 많은 부분을 대중 앞에 드러내는 작가라 하더라도 쉽게 세상에 내놓기 어려웠을 듯 하다.

 

남의 불편한 가족사를 들여다보는 마음인들 뭐 편할 수 있었겠나.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 않아 여러 날을 붙들고 있은 끝에 겨우 마지막 장까지 읽긴 읽었으나, 딱히 기억에 남는 것도 없고, 그다지 재미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밑줄 그은 문장도 많지 않고.

책의 내용보다는 다른 것에 더 관심이 가고 호기심이 일었는데, 그건 유진 오닐이 호텔방에서 태어나 기숙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호텔을 전전하며 살았다는 거다. '호텔'이라면 보통 여행 가서나 한번씩 묵게 되는 그런 장소인데, 요즘 읽는 책들에서는 이처럼 호텔에서 생활하는 등장 인물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는 걸 깨달았다.(바로 얼마 전에 읽은 <오늘을 잡아라>에서도 주인공과 주인공의 아버지, 엉터리 박사 등이 모두 호텔에서 생활하고 있다.) 당시 미국에서 호텔이라는 장소는 지금처럼 타지에 나가면 묵게 되는 그런 장소가 아니었던 걸까? 오늘날의 고시원 같은 개념인가?(그러니까 고시 공부를 위해 고시생들이 묵는 의미에서의 고시원이 아니라, 싼 가격에 묵을 수 있는 숙박업소로 이용되는 고시원 말이다.)

아무튼, 호텔에서 사는 미국인,의 모습이 무척 궁금하게 여겨진 책이었다.

언제 한번 이에 대해서 검색해봐야겠다.

 

 

_ 그래, 그만두자! 다 그만두고 다 피해 버려! 야망이라곤 없는 인간에겐 편리한 인생 철학이지. 고작 하는 짓이라곤……(25)

 

_ 운명이 저렇게 만든 거지 저 아이 탓은 아닐 거야. 사람은 운명을 거역할 수 없으니까. 운명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손을 써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일들을 하게 만들지.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진정한 자신을 잃고 마는 거야.(72)

 

_ 꼭 필요한 건데. 그게 있었을 때는 전혀 외롭지도 않고 두려움도 없었어. 영영 잃어버렸음 안 돼. 그런 생각만 해도 난 죽어버릴 거야. 그렇다면 아무 희망이 없는 거니까.(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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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태엽 오렌지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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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그림이 무척 섬뜩하다. 평소의 나라면 이 책 절대 읽지 않았을텐데(표지 무서운 책 싫어한다) 뭐에 홀렸는지 이 책을 머리맡에 떡하니 두고 며칠 밤에 걸쳐 읽었다.(책은 계속 뒤집어서 표지가 보이지 않게 하거나 다른 책을 위에 올려두었다. 지금도 엎어 놨음.)

책 내용도 표지 그림과 참 잘 어울린다. 소름끼치고, 끔찍하고, 잔인하고, 무섭다.

 

비행을 일삼는 한 소년이 주인공이다. 패거리와 어울려다니며 길 가는 노인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한적한 곳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집에 침입해 소설가인 남자 주인은 늘씬하게 두들겨 패고 여자 주인은 남편이 보는 앞에서 윤간한다(이는 작가가 실제로 당한 일이라고 한다).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녀들을 집으로 끌어들여 약물에 취하게 한 뒤 강간하고, 한 노파의 집에 몰래 침입해 물건을 훔치다 노파를 잔인하게 구타해 숨지게 한다. 주인공은 비록 청소년이지만 이미 전과도 있고 죄질이 심각한지라 교도소에 수감된다. 교도소에 갇혀서도 감방 동기를 사정없이 패 숨지게 한다.

이런 일련의 폭행 사건이 이야기의 반 정도를 차지한다. 평소에 무서운 거, 잔인한 거, 끔찍한 거 안 보는데 어쩌다 내가...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말투가 무척 매력적이어서 중간에 읽기를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요 조그만 화자가 살짝 건방지고, 살짝 재치있게 내뱉는 말투가 참 재미있었다. 아마 그 덕에 이 책을 끝까지 읽은 것 같다.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는 주인공이 국가에서 새로 마련해 시도하는 '갱생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내용인데, 그 갱생 프로그램이란 것도 참 잔인하다. 주인공에게 매일 어떤 약을 투입한 뒤 영화관으로 데리고 가 잔인한 폭력 일색인 영상을 보여준다. 눈을 감을 수 없게 집게로 눈꺼풀을 집어 놓은 탓에 보고 싶지 않아도 끝까지 볼 수밖에 없다. 2주간 이런 훈련을 거치고 나서 주인공은 범죄에 심각한 공포를 느끼는 상태가 된다. 그래서 앞으로 다시는 범죄를 저지를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의미인 것이다. 이 갱생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소설 내에서도 찬반 논란이 있고,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것이 논의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다. 범죄자를 도덕적으로 교화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폭력에 공포심을 일으키게 만듦으로써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못 하게 만들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범죄자 안의 범죄심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책 속 주인공도 수시로 마음속에 분노가 일면서 다시금 범죄를 향한 마음이 꿈틀거리지만 눈앞에 잔인한 폭력 영상이 펼쳐지고 피가 상상되면 그만 속이 울렁거리며 심한 공포감에 휩싸이게 되어 범죄를 저지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게 진정한 '갱생'이고 '교화'일까?

 

소설에서는 비록 '실패작'임이 드러났지만, 사실 우리 사회에도 이런 갱생 프로그램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긴 했다. 잔인한 방법이긴 하지만, 워낙 세상이 무서우니... 성범죄자 처벌에 관한 기사에서 이 책을 언급하며 어떤 사례를 들어 놓은 걸 봤는데, 성범죄자가 다시는 성범죄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의지로 스스로를 거세했지만 결국은 또 다시 성범죄를 무더기로 저지르고 잡혔다더라(성범죄자는 거세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던 내게는 참으로 실망스러운(?) 뉴스였다). 소설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뭔가 본질적인 교화나 교도가 아닌 이런 방법은 먹히지 않는 모양이다.

 

어쨌든, 표지만큼이나 무서운 책이었다. 주인공의 말투에 후한 점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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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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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에 '우리 가족 잘못 건드리면 큰일 날 줄 알아!'라고 쓰여 있었다.

책 표지 가족들 말이다.

 

동네 어르신들이 빌라 앞 소파에 앉아 수근거리는 이야기를 빌리자면,

쥐 잡아 먹은 거모냥 입술 시뻘겋게 칠하고 다니는 여편네와, 가막소를 수도 읎시 드나든 새끼 밴 도야지 같은 놈과, 북어대가리같이 비쩍 마른 마약쟁이와, 화냥기가 있어서 사내라면 죽고 못 사는 년과, 지 에미 닮아 벌써 싹수가 노란 딸내미가 그 가족 구성원이다.

이들이 좁디 좁은 302호에 모여 함께 살게 되었다. 평균 나이 49세를 기록하며.

아니, 근데 저것들은 낫살이나 처먹고 무슨 웬수가 져서 아직까지 늙은 지 에미 등골을 뽑아먹고 있댜?(49)

 

멀쩡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집구석의 이야기라기에 간단한 흥미거리 말고 뭐가 있겠는가 싶었다. 그래도 천명관 작가의 작품이니 입담 하나는 구성지겠지. 그래 천명관 작가의 손끝에서 탄생한 콩가루 집안 이야기는 어떤가 구경이나 해볼 요량이었는데, 읽다보니 내가 구경을 하는 건지 그 가족 구성원이 되겠다는 건지...

'이눔의 집구석' 이야기에 공감을 하면 이건 어찌 되는 건가? 알고보니 우리 집도 '이눔의 집구석'과 다를 바 없었더란 말인가?

물론 우리 집은 이 엄청난 아우라를 내뿜는 집안과 많이 다르다. '가막소' 들락거린 자식도 없고 마약쟁인지 알코올중독자인지도 없고 바람피고 남편한테 쫓겨난 딸내미도 없고 담배 피우다 들켜 삼촌에게 '삥 뜯기는' 조카도 없고 왕년에 사랑의 불꽃에 휩싸여 가족들 버리고 도망갔던 엄마도 없고 말이다.

그런데도 이 가족의 어떤 모습들에서 우리 가족의 모습을 찾게 되고, 저 멀리 뒷짐 지고 서 있던 나는 좀 더 그 가족들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언니 손전화에는 내가 '이교수님'으로 저장되어 있다. 가끔은 그렇게 나를 부르기도 한다. 나는 언니 손전화에 내 이름이 '이교수님'으로 뜨는 걸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손발이 오그라들고 남들 앞에서 그런 호칭으로 나를 부를 때면 당장 그 입을 틀어쥐고 싶어진다(아마 이 책 속 '오감독'도 마찬가지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진짜 '교수님'이었으면 그렇게까지 정색할 이유가 뭐가 있으랴. 문제는 내가 일주일에 한 번 강의 나가는 시간 강사일 뿐이라는 거지. 알아주지도 않는 지방 대학의 시간 강사 동생을 두고 "대학 교수님이에요~"라고 말하는 언니와 영화 한 편 찍고 완전 망해 먹어 십 년째 '백수'에다 이제는 알코올중독까지 되어버린 동생을 '오감독'이라고 부르는 오함마의 모습이 겹쳐졌다. 겨우 시간 강사 하는 걸 가지고 교수님 대접을 받고, 달랑 영화 한 편 찍고 망해먹은 걸 가지고 감독님 대접을 받고, 에잇 정말 변변치 못한 집안인 게 닮았다.

 

'나'가 스스로에 대한 모든 희망을 버리고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는 때에조차 가족들은 그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도 우리 집과 닮았다. 겉으로 내색은 안해도 다들 '오감독'이 다시 영화를 찍고 영화 감독으로 성공하기를 속으로 바라고 있었을 거다. 어머니의 유품으로 '나'의 영화 포스터가 잘 접혀 보관된 채 발견된 것도 그렇고, 급하게 한국을 떠나면서 진지하게 "오감독"이라고 부르는 오함마의 말투에서도 그들이 '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끝내 버리지 않았음이 느껴졌다. 언젠가는 영화 감독으로 대성하리라 믿고 있는 거겠지. 우리 가족들이 내가 번역가로 대성하리라고 믿고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언젠가 남동생이 '우리 둘째 누나는 통역사예요'라고 말할 때 무척 자랑스럽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나도 한때는 통역사였지. 안타깝게도 '나'가 첫 영화 말아먹고 실의에 빠져 허송세월 한 것처럼, 나도 어느 날 맡았던 동시통역 하나 말아먹고 실의에 빠져 다시는 통역 부스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말았다. 요샌 통역 안 나가느냐는 가족들에게 이젠 번역만 할 거라고 말해 두었지만, 그때 상실된 자신감은 번역으로도 이어져 나는 어디에도 이력서도 넣지 않고 있다. 그러니 번역 일인들 많을 턱이 없다. 그래도 가족들은 내 이마에 '나 번역 중이야'라고 쓰여 있는 날은 집안 일도 안 시키고 얼른 들어가 일 하라고 배려해 준다. 무슨 대단한 번역이나 하는 줄 알고, 나중에 번역가로 대성할 떡잎인 줄 알고. 아, 정말 '나'와 마주 앉아 술잔 기울이며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 나누고 싶어지는구나! 오함마의 동석도 대환영이다.

 

이런저런 장면들에 우리 가족들의 모습이 떠오르며 정말 세상에 어느 가족이든 '평범'한 모습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굳이 '가족'으로 묶어 놓지 않더라도 이 지구에 발 딛고 사는 한 사람 한 사람 누군들 '평범'한 사람이 있으랴? 얼마 전에 친구 셋이 모여 수다 떨다가 이런 이야기가 오갔다.

A : 내 주위에는 다 희한한 사람밖에 없어(물론 함께 이야기 나누고 있던 나머지 둘도 포함된 거였다).

B : 왜? 나는 정상이지 않아?

A : 너도 독특해

C: 이 세상엔 다 자기만 정상이야.

뭐 결론은 A도 B도 C도 다 지극히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라는 거고, 또한 A도 B도 C도 다 평범하지 않은 독특한 사람들이라는 거다.

한 개인도 이럴진대 그들 여럿이 묶여 이루어진 가정이라는 단위가 어떻게 처음부터 끝까지 평범하기만 하랴. 평범함 속에 '이건 뉴스거리군!' 싶은 희한한 일도 있는 거고, 독특함 속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거 아닌 듯한 평범함도 있는 거고 그런 거겠지. 그러니까 지극히 평범하다고 생각한 우리 집에도 가끔은 오함마도 살고 '나'도 살고 미연이도 살고 민경이도 살고 칠순 노모도 살고 그러고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의식을 못 했을 뿐, 어쩌면 믿고 싶지 않았을 뿐, 어쩌면 내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아 왔을 뿐.

 

어쨌든 나는 이 책이 고마웠다. 오랜만에 우리 가족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을 떠올려 보고 그 동안 잊고 있던 우리 가족들과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어서다. 평범한 추억이든 독특한 추억이든.(아니, 평범과 독특은 시점의 차이일 뿐이다. 내 시점인가 다른 누군가의 시점인가.)

오랜만에 가족들 둘러 앉아 도란도란 지난 추억을 꺼내 펼쳐놓고 싶다. 이들 가족처럼 같은 추억인데도 누군가에겐 아름다웠고 누군가에겐 힘겨웠던 그런 장면이 우리 가족에게도 있다.

"난 그때가 제일 좋았는데?"

"난 그때로 다시 돌아가라면 끔찍할 것 같아!"

희한한 일이지만 그렇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서로 다른 추억을 가진 가족이라는 이름. 서로의 마음 속에 또 어떤 장면들이 서로 다른 색깔로 칠해져 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이 이야기가 다채로워지려면 지금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우리 집 아들내미가 반드시 동석해야 한다. 녀석의 휴가를 목 빼고 기다려본다.

 

모든 가정의 이마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우리 집이 한 독특 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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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미 2010-04-18 0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모든 가정의 이마에는... 정말 그럴 거 같아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요.
'한 독특' 안 하는 집안이 있을라구요.^^

원주 2010-04-19 02:05   좋아요 0 | URL
어제는 전에 함께 공부하던 언니를 만나 수다 떨다 보니 서로의 가정사가 나오고 그러면서 자기가 아는 사람들의 가정사도 나오고.... 그러는데 제 머릿속에는 자꾸 이 책이 생각났어요. 역시, 마냥 평범하고 마냥 평탄한 집은 없구나, 하는 생각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