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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밭의 고독 속에서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4
베르나르마리 콜테스 지음, 임수현 옮김 / 민음사 / 2005년 9월
평점 :
이 책에는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와 '숲에 이르기 직전의 방' 두 작품이 실려 있다.
처음에는 두 작품인 줄 모르고 1막, 2막의 개념인 줄 알고 읽다가 한참을 어리둥절해 했다.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는 단 두 명만의 인물이 긴 대사를 주고 받고, '숲에 이르기 직전의 방'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마침표가 없다) 독백이다.
이처럼 독백이나 독백에 가까운 대사로 이루어진 희곡이 많은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읽은 몇 권 안되는 희곡 중에서는 처음인지라 무척 신선하고 색다른 느낌이었다.
내용 자체는 좀 심오하고 어려워서 잘 읽어내지 못 했지만, 독백의 분위기도 무척 마음에 들고, 밑줄 그은 문장도 많았다.(앞의 책에서는 밑줄 그은 문장이 별로 없었다고 투덜댔는데, 이게 바로 내 '취향'이다. 나는 밑줄 긋게 만드는 문장이 많은 책을 좋아한다. 아무리 재미있어도 밑줄 그은 문장이 적으면 '건진 게 없다'며 허전해지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건진 게 많은, 만족스러운 책이 되겠다.)
두 작품 중 나는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가 더 마음에 들었는데, 손님이 원하는 게 뭔지는 몰라도 그걸 가지고 있으니 팔 수 있다는 딜러와, 스스로도 원하는 게 뭔지 모르므로 그걸 팔 수 있을 리 없다는 손님 사이에 펼쳐지는 자기 주장이 무척 흥미로웠다.
사실 이 책을 읽을 때, 나는 다른 일에 완전히 정신이 팔려 책 속에 온전히 집중할 수가 없었는데, 그럼에도 자기 전에는 꼭 책을 읽어야 하는 습관을 버리지도 못 해 딴 생각과 책장 사이를 오가며 읽느라, 읽으며 책에게도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딴 데 정신 팔며 너를 읽으며 안 되는데, 이렇게 멋진 문장들이 내 눈과 마음을 호강 시켜 주고 있는데, 내가 이렇게 허술하게 너를 읽다니...
이 책 역시 다시 읽을 책 목록에 올려두었다. 그때는 좀 더 맑고 깨끗한 정신으로 만나야지.
_ 나는 하늘을 바라보면 회상에 젖고, 땅에 시선을 고정시키면 슬퍼집니다.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아쉬워하는 것과 그 무엇을 갖지조차 못했음을 회상하는 것은 모두 똑같이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니 발이 잠시 머물게 된 위치가 어디건 간에, 그 높이에서 자기 앞을 똑바로 바라봐야만 합니다.(28)
_ 정말로 끔찍하고 잔인한 건 한 인간이나 짐승이 다른 인간이나 짐승을 미완성의 상태로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마치 말줄임표가 문장을 한가운데서 중단시키듯, 누군가를 보자마자 고개를 돌려버리듯, 짐승이나 인간을 잘못 쳐다본 것, 잘못 판단한 것, 하나의 실수로 만들어버리듯, 쓰기 시작한 편지를 날짜까지 쓰고 나서 갑자기 구겨버리듯이 말입니다.(40~41)
_ 생각이 마음껏 방랑하는 걸 보는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적절한 감각을 잃을 때까지 내버려두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요.(46)
_ 저녁은 망각과, 혼란과, 너무나 뜨거워서 수증기가 되어버린 욕망의 시간이지요. 하지만 침대 위에 드리운 거대한 구름처럼, 아침은 그 욕망을 주워 담습니다.(57)
_ 추억이란 사람이 발가벗겨졌을 때조차도 꼭 지니고 있는 비밀 무기랍니다.(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