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선뎐
김점선 지음 / 시작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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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선뎐 / 김점선 / 2009 / 시작
 

 

도서관에 갔다가 독특한 느낌의 책을 한 권 만났었다. 김점선 님의 <기쁨>이었다. 책 내용 등은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빌려 읽으면 이런 후유증이 간혹...궁금한데 다시 들춰볼 수 없으니 답답하다), '김점선'이라는 이름 석자가 확실히 머리에 박히는 책이었다. 그 책에서 엄청난 감흥을 느낀 것은 아니었지만(앞서 말했지만 굉장히 독특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저자 이름은 머리에 오래오래 남았다.

 

그러다 온라인 뉴스에서 다시 그 이름을 보게 되었다. 부고 소식이었다. 깜짝 놀랐고 많이 슬펐다. 단지 책 한 권의 인연이었을 뿐인데, 그것도 내용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 책 한 권을 읽은 적이 있을 뿐인데,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소식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많이 아프셨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그 아픔에서 해방되셨다. 하늘나라에서는 부디 건강하게 마음껏 그림 그리며 행복하게 사시길 바란다고, 속으로 말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게 되었다.

표지의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지금 하늘나라에서 꼭 이렇게 웃고 계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생전의 그녀에 대해 이제서야 조금 알게 되었다.

 

이 책에는 저자의 '일생'이 들어 있다. '옥단춘뎐', '숙영낭자뎐'처럼 김점선의 전기 '점선뎐'이다.

 

아픈 몸으로 수술 침대에 올라, 이왕 배를 열 거면 '쓸데없이' 길기만한 창자들 다 잘라내고 간단하게 만들어 달라고 주문하는 사람, 몇 년 동안 머리에 빗질 한 번 안 하고 '자유분방' 할 수 있는 사람, 어느날 한 모임에서 처음 만난 남자를 향해 결혼하자고 외치고는 정말 바로 결혼해 버리는 사람, 싸우던 중에 소변이 마려우면 그 자리에서 그냥 오줌 줄기를 흘려 보내더라도 끝까지 결판을 내고야 마는 사람, 남들 다가는 수학여행 거부하고 그 시간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 팔이 아파 붓을 잡을 수 없으면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 그림에 미쳐 그림과 한평생 열애 한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김점선이다. 물론 이런 몇 가지 수식어로는 그녀를 백 분의 일도 다 나타내지 못하겠지만.

 

이 책을 보면서, 그녀의 인생을 어린시절부터 주욱 따라 가면서, '특별함'이라는 단어를 많이 떠올렸다. (그녀의 삶은 정말 무언가 특별해 보였다. 평범함을 거부했기에, 그녀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가 나올 수 있었겠지.) 이 책에 내게 준 것은, 나와는 전혀 다른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데서 오는 신선한 놀라움, 이 생을 뜨겁게 살았던 사람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우는 커다란 기쁨, 마지막 생을 불살라가며 이런 책을 남겨준 저자에게 느끼는 뜨거운 고마움. 이후에 다시 <기쁨>을 읽게 된다면, 이제 그 책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림 그리는 손길에 어떤 것이 담겨 있는지, 그 그림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때보다 조금 더 알게 되었으니까. 그녀의 그림들을 감상해보고 싶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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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진에 힘을 주는 101가지 101가지 시리즈
곽윤섭 지음, 김경신 그림 / 동녘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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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은 지금까지의 내 생애에서 가장 활동적인(!) 한 해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해 4월에 내게 처음으로 디지털 카메라라는 게 생겼고, 나는 경치 좋은 기숙사에 머물고 있었으며,

학교에는 지천으로 꽃이 피어있었다.

졸업 시험과 논문 등으로 밤잠도 모자라게 공부를 하던 대학원 시절이었지만, 그럴수록 더욱더 숨구멍이 필요했다.

그때 사진기가 없었다면, 학교에 그렇게 많은 꽃들이 피어있지 않았다면, 내가 그 힘든 시절을 어떻게 이겨냈을지,

상상하기도 힘들다.

아무튼, 모두들 통역실에, 스터디룸에, 도서관에 자리 잡고 앉아 피 터지게 공부하고 있을 때,

나는 틈틈이 카메라를 들고 교정으로 나갔다. "나도 숨 좀 쉬자!"를 외치며.

내성적이고 남들 눈에 띄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였지만, 남들이 보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잔디밭이고 풀밭이고 언덕이고

아무데나 멈춰서서, 혹은 쪼그리고 앉아 (주위에 아무도 없으면 바닥에 좀 더 밀착하기도 하며) 꽃들을 카메라에 담고 또 담았다.

(그렇게 찍은 꽃 사진은 포털 사이트 야생화 카페에 올려 이름을 물어보는 용도로 많이 쓰였다.)

 

처음으로 나만의 카메라가 생기고 사진을 찍다보니, 당연히 잘 찍고 싶어졌고,

그래서 도서관에서 몇 권의 사진책을 빌려다 봤었다.

도서관에는 마음을 끌어당기는 제목의 책들이 참 많았다. 그 중에 어떤 책을 봐야 할까 고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책들을 넘겨보며, 예시로 실려 있는 사진이 마음에 드는 책, 설명이 조금 더 쉬워보이는 책 들을 골라다 보곤 했다.

하지만 사진에 있어서는 그렇게 착실한 학생이 아니었기에, 그저 책을 보는 것으로만 그쳐 나의 사진 실력은 예나 지금이나 형편없다.

뭐든지 중요한 것은 실천, 반복 연습이라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한 셈이다.

 

학교를 떠난 후 나는 다시 상당히 정적인 모습으로 되돌아 왔고, 카메라는 곰팡이가 피지 않을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그나마 요즘에는 책 정리를 하느라 일주일에 몇 번씩 책 사진을 찍어 올리지만.)

얼마 전에 카메라가 고장나서 상당한 돈을 주고 수리를 했는데, 비싸게 고친 게 아까워서라도 다시 카메라를 활발하게 움직이게 해주고 싶었다.

인터넷으로 사진 찍는 법도 찾아보고, 사진 카페에도 가입하고, 그러다가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이제 본론이다. 사설이 참 길었다.)

 

이 책은 참 독특하다. 지금까지 본 중에 이런 책은 없었다.

그림 없는 그림책은 본 적 있다만, 사진 없는 사진책이라니!

이 책에는 사진이 한 장도 없다.

책의 구성도 간단하다. 왼쪽에는 (사진 대신) 그림을, 오른쪽에는 그 그림에 관한 글을 실어 놓고 있다.(글은 간단명료.)

내용도 이렇게 찍어라 저렇게 찍어라, 이 기능은 뭐고 저 기능은 뭐다, 이 사진기는 어떻고 저 사진기는 어떻다, 등등

흔히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사진의 역사에 관한 글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하고, 사진 찍는 마음가짐은 이러함이 마땅하다고 가르침을 주기도 하고, 사진 찍을 때 주의할 점을 지나가는 말처럼 쓰윽 일러주기도 한다.

책을 뚫어져라 보며 아하 이건 이렇군, 저건 저렇군!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의 모습으로 읽기보다는,

사진 선배 혹은 스승과 나들이 나가 그들이 한두 마디 툭툭 흘려주는 조언들을 주워듣는다 생각하고 가볍게 읽을 수 있다.

(물론 그런 조언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게 아니라, 까먹을 새라 마음속으로 되뇌거나 잽싸게 메모 해야 한다.)

 

나 같은 초보자가 이 책 한 권을 읽고 사진에 힘이 생겼다,라고 하기에는 무리겠지만,

앞으로 사진 찍을 때 잊지 말아야 할 조언들은 가슴 깊이 새겨 두었다.

(특히, 목표물에 가까이 가기보다 줌 당기기를 좋아하던 나는, 이 책을 읽은 뒤 줌보다 내 몸을 움직이게 되었다.)

식상하고 진부한 사진책에 질렸다면, 이렇게 독특한 책을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초보자는 초보니까 당연히 봐야하고, 사진 고수라도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혹은 이미 잃어버린 초심을 되찾기 위해.

아, 까먹기 전에 당장 UV필터 하나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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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웃다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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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바다』의 작가 정한아의 첫 소설집이다.

한 작가의 첫 작품을 출간과 거의 동시에 만난다는 것이 이렇게 상큼하고 설레는 일임을 예전에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었다.

불현듯 아프리카의 한 부족 이야기가 떠올랐다. 새 생명이 탄생할 때가 되면 부족 사람들이 모두 모여 산모를 둘러싸고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해 축복의 말을 외쳐준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우리 모두는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환영해." "우리는 너를 무척 기다리고 있었단다." "이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된 것을 축하한다, 아가야."

정한아 작가의 첫 소설집을 품에 안고 나는 마치 저 탄생 축하 인파에 섞여서 '축 탄생' 인사를 할 수 있는 영광을 안은 기분이었다. "첫 소설집의 탄생을 축하해요. 우리 모두 무척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렇게 설렘과 떨림으로 만나게 된 이 책은 제목도 참 예쁘다. '나를 위해 웃다'

웃는다는 것도 좋고, 남이 아닌 나를 위해 웃는다는 건 왠지 멋쩍고 어색하긴 하지만 행복하다.

띠지의 환하게 웃고 있는 작가의 미소에 감염되어, 나도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책을 펼쳐 들었다.

 

이 책에는 표제작 '나를 위해 웃다'를 포함해 모두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여덟 편 모두 예상 외로 조금쯤은 우울하고 묵직하며, 어떤 묘한 상실감을 담고 있었다.

배 속에서부터 무서운 속도로 자라더니 세상에 태어나서도 끊임없이 자라는, 쑥쑥 크는 키 말고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엄마가 있고('나를 위해 웃다'), 아버지의 등에 유리조각을 찔러 넣고 집을 나와 사창가에 몸을 담은 '나'가 있으며('아프리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지독한 상실감에 방황하다 이스라엘에서 노동 봉사를 하는 '나'도 있다('첼로 농장'). 나에게 관심 있는 줄 알았던 시간강사는 사실 내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구분을 못했으며('마테의 맛'), 결혼을 앞둔 여인이 오래 전에 처분해 버린 할머니의 의자를 찾아 헤매기도 하고('의자'), 평온한 듯 하면서도 위태롭고, 다시 평온을 되찾는 듯 하는 가정의 모습도 보인다('댄스댄스'). 중국의 직장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결국 귀국길에 오르는 남자 이야기와('천막에서'), 뇌에 이상이 생겨 어느 순간 과거로 돌아가버리는, 그 순간엔 현실의 모든 걸 잊고 그저 허밍만 하고 있는 할머니 이야기('휴일의 음악')까지, 모두 인생의 한켠에서 맛 볼 수 있을 듯한 절망과 상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괜찮다. 끝없는 좌절과 나락이 아니라,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을 그 뒤에 드리워주고 있으니까. 결국은 다시 웃을 수 있으니까, 나를 위해.

 

이 책의 이야기 속에는 외국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눈에 띄었다. '아프리카'에는 제목처럼 '아프리카'가, '첼로 농장'에는 이스라엘이, '마테의 맛'에는 아르헨티나가, '댄스댄스'에는 스위스가, '천막에서'에는 중국이 등장한다. 이야기가 펼쳐지는 중심 무대인 경우도 있고, 주 무대는 아니지만 이야기의 중요한 줄기를 이루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책을 읽다가 잠깐잠깐 외국 풍경을 그려보며, 혹은 내가 갔던 곳을 그리워하며 슬며시 '세계 여행'을 하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특히 '첼로 농장'을 읽을 때는 정말 그런 봉사 프로그램이 있는지, 있다면 나도 가고 싶은데 내가 간다면 한국 생활은 어떻게 정리하고 갈지(-_-;) 꽤나 구체적으로 그 생각에 골몰하기도.(아직 진행중이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있음에 감사할 수 있는 삶, 그런 삶을 정한아 작가가 그 아름다운 미소로 슬며시 일러주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책을 덮으며, 나를 위해, 정한아 작가를 위해,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 환하게 웃고 싶어졌다.(하지만, 한 시간 넘게 쓴 서평이, '피슝~'하고 꺼져버린 컴퓨터와 함께 날아갔을 땐, 울고 싶었다...) '첼로 농장'에서 만난 귀가 들리지 않는 할머니처럼, 온 몸으로 리듬과 진동을 느끼며 음악을 느껴보고 싶어진다. "그래서, 이렇게 아름다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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꾿빠이, 이상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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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은 날 : 2008년 11월 2일
                                                   다시 읽은 날 : 2009년 4월 30일

 

 

사실 이 책을 처음 잡았던 건 2006년이었다. 『청춘의 문장들』로 김연수 작가에게 완전히 매료되어 그의 책들을 탐독할 때였다.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여섯째로 만난 책이었을 것이다. '첫번째 이야기'를 다 읽었던가, 그마저도 다 읽지 못했던가, 아무튼 "아, 너무 어려워!"라고 좌절하며 그만 포기하고 도서관에 반납했던 기억이 난다.(『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도 완독했는데!) 그 후, 김연수 작가의 다른 책들은 모두 읽었지만 이 책만은 선뜻 손을 대지 못하고 그저 책꽂이에 고이고이 모셔두기만 했다.

 

다시 이 책을 읽을 용기를 냈던 건, 한 책카페의 독서토론 도서로 이 책이 선정되면서였다. 다른 사람들은 『꾿빠이, 이상』에 대해, 그리고 김연수 작가에 대해 어떤 감상을 들려줄지 무척 궁금했기 때문에, 독서토론에 참석하기 위해 이 책을 다시 읽게 되었다. 다시 만난 『꾿빠이, 이상』은 첫 만남 때와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고, 나는 밤을 꼬박 지새며 책 속에 빠져들었다.

 

내가 감히 그의 대표작을 운운할 수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나는 이 책을 그의 대표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책에는 소설가로서 그가 불사를수 있는 모든 열정이 들어있다는 느낌이 그 이유 중 하나다. 물론, 다른 책들은 그럼 열정이 부족하다는 거냐,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김연수 작가의 입장이 어떤지야 내가 속속들이 알 수 없지만) 유난히 이 책에 대한 작가의 '애정'과 '열정'이 곳곳에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2009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실린 문학적 자서전 「이 세상 그 누구도 대신 써주지 않는 15매」에도 이 소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어쩌면 이건 내가 쓰는 마지막 소설이 될지도 모른다.' 2010년쯤에나, 나이가 들고 연륜이 생기면 그때쯤에나 써보겠다고 생각한 소설을 일찌감치(그것도 '마지막 소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쓰게 된 것은, 2010년에도 자신이 소설가일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세상이 '마지막'으로 그에게 준 소설 쓸 기회(물론 그건 '마지막 기회'가 아니었지만) 앞에서 그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떠올렸다. 그에게 문학을 가르쳐 준, 그의 최초의 문학 행위에 소재를 제공했던 '얼굴이 하얀 이상 김해경'에 관한 책은 그런 계기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문학적 자서전'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소설이 세상 빛을 보는 과정은 정말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자신의 한계를 경험한다는 건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지를 실감한다는 뜻과 마찬가지였다.'라고까지 말하고 있으니. 하지만 그런 한계를 뛰어넘고, 하루에 15매를 쓰는 대단한 일을 해낸 끝에 『꾿빠이, 이상』이 탄생했다. 김연수 작가는 이 소설을 쓰고 나서 자신이 소설가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니 그때 그 '마지막 기회'는 사실상 그가 진정한 소설가로 태어나게 되는, 그의 '두 번째 생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김영수'가 아닌 '김연수'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해준 작가 이상에 관한 책, 진정한 '소설가 김연수'로 거듭나게 해준 책, 그런 의미에서 『꾿빠이, 이상』을 그의 대표작이라고 말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작년에 한 북콘서트에서 김연수 작가가 이상에 관해 한 이야기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는 한국 문학에서 굉장히 높은 위치에 있는 이상이라는 사람을 끌어내려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를 끌어내리고 자신이 올라서겠다는 게 아니라, 몇 십 년 동안 너무 높은 자리에만 있어서, 이 사람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도쿄에서 맞이한 이상의 죽음은 그 죽음 자체가 환상적으로 전설에 가깝게 남아 있는데, 그 죽음이 천재의 죽음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살고자 하는 한 남자의 죽음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직접 도쿄로 찾아갔었다는 그런 이야기였다.(『여행할 권리』의 마지막 챕터 「당신들은 천당과 지옥의 접경으로 여행을 하고」는 그가 이상이 머물렀던 도쿄를 답사했던 이야기다.) 그런데 『꾿빠이, 이상』을 읽고 나면, 작가 이상에 관한 환상이 깨지는 게 아니라, 더 전설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가 강해진다. 어느 것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앞으로도 알 수 없을 이야기들. 그 앞에서 진실 혹은 거짓, 진짜 혹은 가짜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배운 건, "중요한 것은 가짜냐 진짜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말입니다. 진위와는 무관하게 모든 정황이 진짜라면 진짜인 것이고 모든 정황이 가짜라면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 입니다." 나는 그저 이런 소설을 써 낸 김연수 작가에게 탄복하고, 이런 소설을 만날 수 있었던 내 삶에 행복을 느낄 뿐.

 

 

- 주석으로 이상의 죽음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 하지만 양파를 까듯이 아무리 파헤쳐봐도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 적빈한 가정의 얼굴 하얀 아이 김해경이 마지막으로 남긴 이상이란 데드마스크는 도대체 무엇이던가?(40)

 

- 운명의 글월은 물에 쓰는 것이 아니라 대리석에 새겨지는 것이다. 유예될 수는 있으나 결코 지워지지는 않는다.(70)

 

- 한 작가는 문학을 위해, 독자를 위해 삶의 다양한 광경을 재구성한다. 천재로 태어나는 주인공을 탄생시켜 그 주인공으로 하여금 열정에 사로잡혀 쏟아지는 빗속을 뛰어다니게 만들고 사랑에 빠지게 한다. 적당한 쓴맛과 단맛을 동시에 내기 위해 막 딴 치커리와 꽃상치를 잘 포개 만든, 여름 점심의 쌈밥을 만들기도 하고 연인 앞에서 처음으로 벗은 몸처럼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이 교차하는 하얀 살을 그리기도 하는 것. 그게 바로 소설이다. 소설을 읽는 일이 괴로움과 즐거움을 동시에 던져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78)

 

- 그러나 과연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맞선다고 할 때, 맞서는 그 대상을 일러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번이라도 전기를 써본 사람이라면 우리의 의지가 맞서는 그 대상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의지 자체가 운명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끊임없이 남빛의 바다를 하얀 물보라로 바꾸는 뱃길 주변에서는 아무리 해도 당장 대양의 권태로운 푸른빛이 보이지 않듯이 인간의 의지 역시 삶의 여러 굴곡 중 하나일지 모른다. 때로 파도가 치고 남빛 대양의 한켠이 하얀 물보라로 부서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사소한 부분일 뿐이다. 운명은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진짜 얼굴을 보여줄 뿐이다. 운명은 논리적으로 인간의 의지에 맞서지 않는다. 다만 마지막 한순간에 모든 것을 보여준다. 씨앗이며 고목을, 꽃이며 과일을, 새순이며 낙엽을, 탄생이며 죽음을. 그 속에 인간의 보잘것없는 의지까지 포함돼 있음은 물론이다.(12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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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다섯시의 외계인 Nobless Club 10
김이환 지음 / 로크미디어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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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다섯 시의 외계인 / 김이환 / 2008 / 로크미디어

 

 

 

아래 분실물을 찾아주세요!

 

함부로 앉으면 위험한 의자, 그대로 비춰 주지 않는 거울, 땅 위에서 달리기 아까운 자전거, 바닥을 보면 깨닫게 되는 컵, 맑은 날에 더 재밌는 우산, 건망증에 좋은 펜, 불면증에 잘 듣는 스탠드…….

 

책의 뒷표지에 실린 분실물 목록에 귀가 솔깃해졌다. 오호, 저런 신기한 물건들이 나오는 책이라니 흥미롭구나! 나에게 오후 다섯 시에 얽힌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닌데, '오후 다섯 시의 외계인'이라는 제목도 어딘가 감성을 자극하고 말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에는 외계인(지구 이름 '전용관')이 나온다. 영화를 보다가 그만 외계로 돌아가는 시간을 놓쳐버리고, 홀로 지구에 남겨져 엉엉 울던 외계인은 우리의 주인공(이름 '임성우', 하지만 곧 '직원'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리게 됨)을 만나게 된다. 하루 아침에 벼락부자가 되고, 미국의 엄청난 기관에 취직을 한 주인공과 깜짝 놀라게 잘 생긴 이 외계인과의 만남이 어찌나 즐겁던지, 3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단숨에 읽었다.

 

위에서 말한 분실물은 바로 이 외계인 용관이가 잃어버린 생일 선물들이다. 열일곱째라서 해마다 열일곱 개의 생일 선물을 받는 용관이가 어쩌다 스위치를 잘못 눌러 그만 선물을 다 잃어버렸다. 고향별로 돌아가기 전에 잃어버린 선물들을 다 찾아야 하는데…….

 

하나하나 찾을 때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 선물들의 목록이 꽤나 재미있었다. 개중에는 나도 무척 탐나는 물건들이 꽤 있었다. 위에 앉으면(혹은 올려 놓으면) 속마음을 말해 주는 의자, 착한 사람은 초록색, 나쁜 사람은 까만색으로 보여주는 뿔테 안경, 내뱉은 말을 주워담아 주는 피리, 원하는 꿈을 꾸게 해주는 스탠드, 날씨를 말해 주는 곰인형(믿을 수 없는 기상청 일기예보보다 나을 듯!), 깜빡 하고 있는 일들을 기억나게 해주는 볼펜, 가지고 다니는 별장인 스노 글로브……. 아아, 정말 탐나는 물건 많다!

 

속마음을 말해 주는 의자가 있으면, 우리 강아지하고 의사소통도 하고 얼마나 좋을까. 밤마다 내가 꾸고 싶은 꿈을 꿀 수 있는 스탠드를 켜 놓고 자면 그건 또 얼마나 좋을까. 잠자는 시간만이라도 내가 바라는 삶을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행복해진다. 늘 무언가 말해 놓고 후회하는 나에게는 내뱉은 말을 주워담아 주는 피리도 아주 유용한 물건이 될 터!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는 용관이가 부럽다!

 

우리의 주인공과 '완소 외계인' 용관이가 이 선물들을 찾는 동안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심심하고 따분한 밤에 한번 만나보는 것도 좋겠다고, 추천해주고 싶다. 외계인을 찾아 없애기 위해 이 동네로 스며들어온 FBI를 용관이는 잘 피할 수 있을까?(난 처음에 이 설정을 보고 잠시 망설였다. 결국 외계인을 잡아 죽이겠다는 거면,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ㅡ 난 주인공이 죽는 이야기를 무척 싫어한다. 오죽하면 <삼국지>도 8권까지 읽다가 장비가 죽을 것 같길래 덮어버렸을까! 하지만, 이 책은 어쩐지 해피엔딩일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걱정을 누르고 끝까지 읽었다.)

 

모처럼 참 발랄하고 깜찍하고 가벼운 소설을 읽었다. 나의 오후 다섯 시에는 이런 외계인이 나타나주지 않으려나? 나도 가만히 오후 하늘을 올려다보며 용관이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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