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교사
재니스 Y. K. 리 지음, 김안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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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한 편의 영화를 본 기분이다.

영화를 자주 보지 않는 내게도 이렇게 생생하게 영상으로 펼쳐지다니.

소설 속 장면 하나하나, 대사 하나하나, 움직임 하나하나가,

흰 종이 위의 글자를 뛰어넘어 마치 이미 본 듯한 영화를 되새기듯 실감나는 영상이 된다.

책과 영화의 마지막에 찾아오는 감동은, 책과 영화가 각자 활자와 영상으로 다른 것처럼, 그 감동도 정적이고 동적으로 서로 다르다.

이 책은,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의 정적인 감동과, 영화의 마지막 신을 보고 난 후의 동적인 감동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그래서 무언가 더욱 충만하게 차오르는 느낌.

 

2차대전을 전후로 하여 1940년대와 1950년대의 홍콩이 이 소설의 배경이다.

격랑의 1940년대를 함께 보낸 연인 윌과 트루디,

전쟁의 잔흔이 가시지 않은 1950년대에 만난 윌과 클레어.

이렇게 세 사람을 중심으로 10년의 시간을 넘나들며 이야기는 진행된다.

 

피아노 교사인 클레어가 피아노를 가르치는 로켓의 집에서 우연히 가방에 떨어져 들어온 값비싼 물건을 '훔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소설은, 그 첫 장면부터 무척 흡인력 있게 사람을 빨아들였다.

첫인상에 매료당했으므로 이어서 진행되는 만남은 물 흐르듯 순조롭다.

하지만 결코 고요히 흐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졸졸졸 시냇물인가 싶다가, 홍수에 잔뜩 수위가 높아진 강물인가 싶기도 하고, 모든 걸 집어 삼킬 듯 세찬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흘러가는 계곡물인 듯 하다가, 모든 걸 다 받아들이겠다는 듯 넓은 품의 바닷물 같기도 하다.

긴장의 고저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하다보면, 깊어가는 밤도 잊고 책에 빠져들 지경이다.

아무래도 전쟁이 배경으로 깔려서 그 긴장감을 무시할 수 없겠지만,

'금지된 사랑'에 따른 긴장감도 한몫 한다.

클레어는 남편 마틴을 따라 홍콩에 온 영국 여인이었으니까.

 

요즘은 소설을 원작으로 나오는 영화가 무척 많기도 한데,

이 책도 영화로 제작되어 나오면 꼭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여자가 창가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에필로그 장면이 그 어떤 영화 장면보다도 더 영화처럼 다가왔다.

잔잔한 여운을 남겨준 이 마지막 부분이 특히나 마음에 든다. 왠지, 노을을 떠올리게 하는 마무리다.

 

그리고 이 책에서 무엇보다 더 흥미를 끄는 것은 저자 재니스 리가 한인 2세 작가라는 사실이었다.

뉴욕 타임즈 베스트 셀러에 오르고, 전 세계 20여 개국으로 번역 출간 된 이 소설을 쓴 이가, 한인 2세라니, 자랑스럽다.

얼마 뒤면 작가가 방한하는데,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꼭 작가를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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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서 행복해 마음별에서 온 꼬마천사 2
쿠르트 회르텐후버 지음, 이승은 옮김 / 꽃삽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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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별에서 온 꼬마천사' 시리즈 중 둘째 권이다.

전작인 <행복은 어디에나 있어>를 읽지 않았음에도 이상하게 그림이 낯설지 않고,

시리즈들의 제목이 참 마음에 들었다.(행복은 어디에나 있어 - 사랑해서 행복해 - 네 꿈을 응원할게)

무엇보다, 요즘 글이 잘 안 읽히는데, 글이 짧아서도 마음에 들었고 말이다.

 

책을 처음 펼쳤을 때,

첫 문장이 '마음별로 돌아온 꼬마천사는...'으로 시작해서, 처음에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러니까, 이 책이 '마음별에서 온 꼬마천사 시리즈'의 둘째 권이기 때문에, 전권의 상황과 이어지는 모양이었다.

지구별에서 일어난 일들을 간략하게 소개해 주는 글이 앞에 한 페이지 실려 있긴 했지만, 기왕이면 <행복은 어디에나 있어>를 먼저 읽고 읽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이 책에는 사랑에 푸욱 빠진 꼬마천사가 나온다.

사랑에 빠진 꼬마천사에게 가족들은 축하의 말과 함께 사랑을 지키는 데 필요한 많은 가르침을 일러준다.

꼬마천사와 제니는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사랑의 열쇠'를 찾으러 다닌다. 오랫동안 행복하기 위해.

과연 그 '사랑의 열쇠'는 무엇이고, 꼬마천사와 제니는 그것을 찾을 수 있을지...

 

사실, 책 속의 문장들은 자칫 단순하고 유치하달 수도 있겠으나,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얼굴에 계속 미소가 지어졌다는 사실!

사랑에 빠지면 예뻐진다더니(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우리의 꼬마천사가 제니와 사랑에 빠지면서 얼굴이 환해 지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럽던지 말이다.

행복해 하는 꼬마천사를 보며 덩달아 기뻐하는 엄마와 할아버지를 보면서,

사랑에 빠진 이들은 자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도 행복하게 해준다는 사실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나도 얼른 엄마에게 그런 기쁨을 드려야 할텐데 말이다.-_-a)

 

사랑에 빠진 꼬마천사가 꿈속에서 "하나님, 정말 감사해요!"라고 외치는 장면이 참 인상적이었다.

얼마나 기뻤으면, 꿈에서 신을 찾아 감사 인사를 했을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해봐. 감사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어. 그럼 샘솟는 기쁨이 네 삶을 행복하게 해줄 거야.'

사랑해서 행복하든 아니든, 어쨌든 살아 있는 한 감사할 이유는 얼마든지 많으니까,

그럼 나는,

이런 따뜻한 책 만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시리즈가 아직 제게 한 권 더 있다는 사실에 고맙습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시력과 체력을 허락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끊임없이 고맙습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 한참을 바라보았지요.

그들의 눈은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눈은 기쁨과 사랑, 행복으로 반짝거렸어요.

그리고 영원히 함께 있고 싶다는 바람을 보여 주었지요.

꼬마천사와 제니는 저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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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을 속삭여줄게 - 언젠가 떠날 너에게
정혜윤 지음 / 푸른숲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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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낮에 마신 커피의 작용 때문에, 혹은 잠깐 자고 일어난 초저녁 잠 때문에, 혹은 이런저런 생각들이 나를 놓아주지 않아서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린다.

이때 벨소리는 반드시 '따르르릉'하는 아날로그적인 소리로 울려주어야 하며,

전화기도 이왕이면 옛이야기들을 많이 알고 있을 듯한 엔틱풍이면 좋겠다.

이 시간에 누굴까, 의아하면서도, 마침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던 참이었으므로, 아주 반갑게 수화기를 집어 든다.

"여보세요?"

그리고 전화선을 타고 전해져오는 목소리는, 아, 그녀다!

21세기의 셰에라자드, 정혜윤.

옛날옛날 페르시아에, 매일 밤마다 왕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리하여 많은 여인들의 목숨을 구하는 셰에라자드가 있었다면,

지금 내 곁에는, 불면의 밤으로부터 나를 구해주는 현대판 셰에라자드 정혜윤이 있다.

전화기 너머에서 "내가 이야기 들려줄까?"라며 밤새 내 귓가에 대고 런던을 속삭여 주는 그녀 정혜윤, 그리고 그녀의 책.

<언젠가 떠날 너에게 런던을 속삭여 줄게>.

 

이 책은, 내게 이렇듯 밤 늦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 같은 느낌이었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홀로 잠 못 이루는 나를 구해주려,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벨소리를 울려온 이에게 나는 무한한 고마움을 느낀다.

하지만 전화선 너머에서 들려오는 이 많은 이야기들은, 그러니까 이 책은, 나를 불면의 밤에서 해방시켜주지는 못한다.

나는 오히려 그녀가 속삭여 주는 이야기들에 취해, 이 밤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달콤한 불면이다.

 

이 책을 '여행기'라는 이름으로 부르기에는 조금 망설여진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여행기'가 아닌 탓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여행기'라 함은, 런던의 여러 볼거리를 화려한 사진으로 찍어 보여주고 그곳의 어디는 어떻더라, 음식은 어떻더라 등을 알려준다거나 하는 여행기, 또는 절로 감성이 풍부해질 듯한 사진에 시처럼 아름다운 짧막한 글귀를 적은 그런 여행기 말이다. 적어도 '내가 흔히 생각하는 여행기'는 그렇다.)

이 책은,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부르면 좋을까?

저자의 말 때문인지 역시 '천일야화'가 떠오르는데, 그냥 '이야기책'이라는 이름이 좋겠다.

각자 읽기 나름, 받아들이기 나름이지만, 내게 이 책은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 어떤 이야기책보다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책'이다.

 

현대의 런던을 살아가는 런더너 중 그 누구도, 정혜윤 그녀처럼 이렇게 많은 런던의 이야기들을 알고 있지는 못할 것 같다.

그녀는 마치 높은 곳에서 런던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며 숱한 세월을 지내온 한 그루 나무 같다.

그 나무의 잎사귀 하나하나, 그 나무의 그늘 한뼘한뼘, 그 나무의 뿌리 마디마디에는 런던의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런 나무가 실제로 있다면, 그 나무를 지금까지 살아오게 한 것은 햇빛과 빗물이겠지만,

정혜윤이라는 그 '나무'를 키운 자양분은, 그녀가 읽은 수많은 책들이다.

'지독한 독서가 정혜윤'

 

이 책은, 정혜윤,이라는 이름 앞에 붙은 그 수식어(지독한 독서가!)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사실, 이 책은 나와 그녀의 첫만남이기에, 내게 더 큰 놀라움을 안겨다 준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독서 면모를 느끼며, 나는 계속 그 수식어(지독한 독서가!!!)를 떠올렸고, 연신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보자면, 런던의 이야기,보다는 그녀의 독서 경력이 내게 더 큰 관심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런던을 속삭여주기 이전에, 그녀에게 런던을 속삭여 준 책은 어떤 책들이 있을까?

나는 이 책 속에 등장하는 또다른 수많은 책들의 리스트에 매료당했다.

정혜윤,이라는 '나무'를 키워온 그 '햇빛과 빗물'말이다.

그녀가 자신의 '햇빛과 빗물'을 아낌 없이 내어놓았다.

런던에 대해, 1001일이라도 속삭여 줄 수 있을 그녀의 이야기 중 일부일테지만,

다른 어떤 책에서도, 이만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유니크하게' 런던을 만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야기에 굶주린 이들이라면, 런던의 옛 이야기가 궁금한 이들이라면, 새롭고 특별한 여행기를 원하는 이들이라면,

꼭 정혜윤, 그녀가 속삭여주는 이 런던 이야기를 만나보길.

아직도 전화기 너머에서 그녀가 속삭이는 것 같다. "런던을 들려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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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자란다 - 아라이 연작 소설
아라이 지음, 양춘희 외 옮김 / 아우라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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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작가 아라이는 티베트 자치구 마얼캉현에서 태어났다.

티베트 출신 작가의 책은 처음 만나보았다.

뿐만 아니라, 티베트는 여행서적으로만 만나보았지, 소설을 통해서 만나본 기억도 거의 없다.

 

아라이는 나에게는 낯선 작가이지만, 중국에서는 2007년에 중국평론가들이 뽑은 '실력파 중국 작가 순위'에서 모옌에 이어 두 번째로 선정될 정도로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작가라고 한다. 그의 또다른 작품 『색에 물들다』는 1999년에 중국에서 선정한 '100년간 100권의 우수 중국문학도서'에서 1998년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히기도 했다.

 

이런 중국 작가를 모르고 있었다는 게 살짝 부끄러워지며,

이 책을 통해 만나게 될 티베트의 생생한 모습이 무척 기대되었다.

여행서가 아닌 소설을 통해 만나게 될, 그것도 티베트 출신 작가의 글을 통해 만나게 될 티베트는 어떤 모습일지...

 

새로운 글을 만나게되겠구나는 설렘에 앞서 작가가 '한국의 독자들에게' 보내는 글을 읽으며,

이 소설을 읽는 '마음가짐'을 다시 해야 했다.

 

"문화가 발전되어 있고, 세계를 잘 아는 사람들은 티베트의 자연이 너무나도 척박하여 사람들이 아주 힘들게 살아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잖은 사람들은 그런 척박한 땅에 무릉도원을 세우고자 했고 거기에 '샹그릴라'라는 이름을 붙였지요. 전 세계가 발전하고 있을 때 누군가는 이러한 유토피아적 상상을 이용해 티베트의 발전을 바라지 않거나, 티베트의 미개발 및 몽매함을 보존하기 위해 동정을 구하고 그 합법성을 모색하기도 했습니다."('한국의 독자들에게' 중에서)

 

내가 바로, 유토피아적 상상으로 티베트 등 국가의 발전을 바라지 않는, '누군가'였기 때문이다.

사진이나 영상으로 만났던 아름다운 자연을 간직한 나라들을 보면서, 그 나라들이 조금이라도 더 개발되기 전에 방문해야겠다는 조급함, 그 나라들만이라도 개발되지 않고, 영원히 아름다운 자연을 간직한 '샹그릴라'로 남아주길 바라는 마음. 그게 얼마나 엉뚱한 나의 욕심이고 지나친 이기심이었나, 하는 생각에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작가의 바람대로, 티베트를 내 상상속의 티베트와 비교할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바라볼 수 있도록, 그리하여 티베트와 소통하고, 티베트를 이해할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 책을 펼쳐보게 되었다. 과연 작가가 들려주는, 자신에게 익숙한 티베트 사람의 이야기는 무엇일지.

 

이 책에는 모두 열세 편의 짧은 소설이 실려 있다.

티베트의 발전 과정과 티베트 백성들의 생할, 중국의 사회 문화적 배경을 엿볼 수 있는 글들이, 조금은 익숙하면서도 신선한 낯섦으로 다가왔다. 그 동안 읽어왔던 중국 소설들과 확실히 다르게 느껴지는 점이라면, 어딘가 신화 또는 전래동화처럼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티베트라는 나라가 내 마음속에 워낙 신비한 분위기로 그려져 있다는 점도 한몫 했겠지만, 이 책에 실린 글들, 특히 결말 부분이 어렸을 때 많이 읽었던 외국 전래동화나 신화를 떠올리게 했다.

티베트의 진실을 봐 달라고 한 작가의 말을 가슴에 새겼음에도, 이 책을 덮으며 티베트를 더 신화적인 이미지로 간직하게 된 부분이 없잖아 있다.

 

'스스로 팔려간 소녀'에 그려진, 읍내를 '세상의 끝'이라고 여기고 사는 지촌 여인들의 모습이 특히 마음에 오래오래 남는다. 그래서 지촌의 그 소녀는 , 더 넓은 곳, 더 멀리에 있는 세상의 끝을 찾기 위해 자신을 스스로 팔아버린 거겠지. 그녀가 본 세상의 끝은 어디였을까? 현 소재지를 넘어, 성 소재지를 넘어, 주 소재지를 넘어, 더 큰 도시를 넘어, 베이징까지, 그리고 외국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던 소녀의 생각을 따라, 나도 그녀가 찾아갔을 세상의 끝을 그려본다.

 

아라이라는 작가를 통해 만나게 된 티베트의 이야기, 무척 신선하고 좋았다. 그의 또다른 책 『색에 물들다』도 만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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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 제14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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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제14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발표 기사를 접하고 내내 책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라는 제목에 그만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그 후 문학동네 계간지에 실린 작가의 수상 소감과 수상 인터뷰를 읽으며,

나는 한번도 본 적 없는 장은진 작가에게 그만 마음을 빼앗겼고, 그녀와 '녀석'이 함께 썼다는 이 책을 기다리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책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의 수상 소감과 인터뷰를 반복해서 읽었다. 괜히 뭉클했다.

 

그리고 가을이 깊어가는 길목에서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녀의 편지를 만날 수 있었다.

편지와 가을. 아,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게다가, 편지 여행!

 

'나'는 든든한 동반자 와조와 함께 3년 간 '편지 여행' 중이다.

여행지에서 사진은 한 장도 찍지 않지만, 그 대신 매일매일 편지를 쓴다.

그의 편지는, 배우를 꿈꾸는 여고생 239도에게도 가고, 자신 때문에 식물인간이 된 친구에게 매일매일 시를 읽어주는 750에게도 가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그에게 짐을 봐달라고 한 뒤 버스로 돌아오지 않은 421과, 길에 들러붙은 껌딱지로 예술을 하는 99에게도 간다.

숫자는, 여행을 다니며 '나'가 만난 사람들, 그 중에서도 '나'에게 주소를 알려준 사람들에게 붙여준 것이다.

'나'의 여행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집에 있으면 꿈결처럼 찾아오는 발작 때문에, 집에 있을 수가 없어서 시작한 여행이었다.

집만 아니라면 어디에서라도 숨 쉴 수 있을 것 같아, 전국 각지의 모텔을 전전한다.

매일 밤, 편지를 쓰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마감하고, 매일 아침, 편지를 우체통에 넣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편지 온 것이 없는지 묻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여행은, 편지가 오면 끝날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나'에게 편지하지 않았다.

 

누구에게서도 답장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나'의 여행은 3년이나 이어지고, 그러다 751을 만나게 된다.

지하철에서 책을 파는 여자.

여자가 파는 『치약과 비누』는 '오늘 나는 치약을 먹었다. 내일은 비누를 먹을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책이다.

여자 자신이 쓴 책이다. 자기 자신이 쓴 책을 직접 가지고 나와 파는 소설가라니!

'나'와 와조와 여자. 셋의 어딘가 어색하면서도 환상적인 궁합을 보여주는 여행이 이어진다.

 

이 책이, '슬픈 책'인지는 잘 모르겠다. 슬프다,는 건 개인의 감정이니까, '슬픈 책'이라는 말로 타인의 감정을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냥,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많이 울었다.

나를 울게 한 건, 대부분 와조였다. 와조, 와조, 내게로 와조...

시력을 잃은 할아버지의 여생을 곁에서 지켜줬던 안내견 와조.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시력을 잃고 '나'의 곁을 지켜주고 있는 와조.

작가의 수상 소감이 자꾸 떠올랐고, 와조의 모습을 그리며 '녀석'을 떠올렸을 작가가 생각나, 나는 와조가 나올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작은 생명체들의 이야기는, 늘 나를 울리고 만다.

나의 작고 여린 친구 '몽'이 한번씩 앓거나, 수술을 받거나 하면 그런 증상은 더 심해진다.

올해, 몽은 큰 수술을 또 한 차례 받았고(제발, 이제 더 이상 수술 받는 일 없길! 건강하게 지낼 수 있길!)

그 이후 내 마음은 더 약해져버렸다.

그래서 와조의 이야기에 더욱 오래 눈길이 머물렀고, 더 많이 애틋했으며, 주체하지 못할 눈물을 흘렸다.

 

와조의 이야기는 나를 울렸고, '나'의 편지 쓰기는 내 마음을 한없이 설레게, 지금 당장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 견딜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나'는 1번부터 750번까지, 여행 중 만난 사람들에게, 그리고 가족들에게 편지를 쓴다.

비록 아무도 '나'에게 편지하지 않지만.

왜 아무도 답장을 쓰지 않는 걸까, 왜 '나'의 여행이 3년이나 이어지도록 만드는 걸까, 몹시 궁금하기도 했다.

그럼, 나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또 답장을 받을 수 있을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단 한 명도.

'편지를 받을 사람이 있고 또 답장을 보내줄 사람이 있다면, 생은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단 한 사람뿐이라 하더라도.'(277)

가슴이 무겁게 내려 앉으며, 이 생이 견디기 힘겨운 것이라는 생각에 우울해지다가, 나는, 나의 생을 견딜 만 한 것으로 만들어 줄 것 같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 사람이라면, 내 편지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답장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지금 내 편지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나아졌다.

그리고, 그에게 긴긴 편지를 썼다. 이 가을에 내가 읽은 이 책에 대하여, 아주 긴 편지를.

 

내일 우체통에 편지를 넣을 것이다.

우체통은 비어 있을테고, 나의 편지는 무거우므로 '텅!'하고 빈 우체통을 울리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릴지도.

하지만, 그 소리를 듣는 것도 아주 오랜만이므로, 나는 쓸쓸함보다는 반갑다는 마음이 먼저 들지도 모르겠다.

 

'나'의 편지 여행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면 좋겠다.

이 책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편지를 쓰길. 이 가을, 다섯 줄 문자 메시지보다 더 많은 우표들이 팔려나가길.

그리고 나의 편지가 누군가의 우편함을, 누군가의 편지가 나의 우편함을 똑똑, 두들겨주길.

그러면, 우리 모두 생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더 강해지지 않을까? 깊어 가는 가을이, 더욱 행복해지지 않을까?

아, 나는 정말이지 이 책이 무지무지 좋다!!! 꼬옥 껴안아 주고 싶은 책이다!

 

 

정말, '나'에게는 아무도 편지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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