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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교사
재니스 Y. K. 리 지음, 김안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아, 한 편의 영화를 본 기분이다.
영화를 자주 보지 않는 내게도 이렇게 생생하게 영상으로 펼쳐지다니.
소설 속 장면 하나하나, 대사 하나하나, 움직임 하나하나가,
흰 종이 위의 글자를 뛰어넘어 마치 이미 본 듯한 영화를 되새기듯 실감나는 영상이 된다.
책과 영화의 마지막에 찾아오는 감동은, 책과 영화가 각자 활자와 영상으로 다른 것처럼, 그 감동도 정적이고 동적으로 서로 다르다.
이 책은,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의 정적인 감동과, 영화의 마지막 신을 보고 난 후의 동적인 감동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그래서 무언가 더욱 충만하게 차오르는 느낌.
2차대전을 전후로 하여 1940년대와 1950년대의 홍콩이 이 소설의 배경이다.
격랑의 1940년대를 함께 보낸 연인 윌과 트루디,
전쟁의 잔흔이 가시지 않은 1950년대에 만난 윌과 클레어.
이렇게 세 사람을 중심으로 10년의 시간을 넘나들며 이야기는 진행된다.
피아노 교사인 클레어가 피아노를 가르치는 로켓의 집에서 우연히 가방에 떨어져 들어온 값비싼 물건을 '훔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소설은, 그 첫 장면부터 무척 흡인력 있게 사람을 빨아들였다.
첫인상에 매료당했으므로 이어서 진행되는 만남은 물 흐르듯 순조롭다.
하지만 결코 고요히 흐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졸졸졸 시냇물인가 싶다가, 홍수에 잔뜩 수위가 높아진 강물인가 싶기도 하고, 모든 걸 집어 삼킬 듯 세찬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흘러가는 계곡물인 듯 하다가, 모든 걸 다 받아들이겠다는 듯 넓은 품의 바닷물 같기도 하다.
긴장의 고저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하다보면, 깊어가는 밤도 잊고 책에 빠져들 지경이다.
아무래도 전쟁이 배경으로 깔려서 그 긴장감을 무시할 수 없겠지만,
'금지된 사랑'에 따른 긴장감도 한몫 한다.
클레어는 남편 마틴을 따라 홍콩에 온 영국 여인이었으니까.
요즘은 소설을 원작으로 나오는 영화가 무척 많기도 한데,
이 책도 영화로 제작되어 나오면 꼭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여자가 창가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에필로그 장면이 그 어떤 영화 장면보다도 더 영화처럼 다가왔다.
잔잔한 여운을 남겨준 이 마지막 부분이 특히나 마음에 든다. 왠지, 노을을 떠올리게 하는 마무리다.
그리고 이 책에서 무엇보다 더 흥미를 끄는 것은 저자 재니스 리가 한인 2세 작가라는 사실이었다.
뉴욕 타임즈 베스트 셀러에 오르고, 전 세계 20여 개국으로 번역 출간 된 이 소설을 쓴 이가, 한인 2세라니, 자랑스럽다.
얼마 뒤면 작가가 방한하는데,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꼭 작가를 만나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