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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을 속삭여줄게 - 언젠가 떠날 너에게
정혜윤 지음 / 푸른숲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깊은 밤, 낮에 마신 커피의 작용 때문에, 혹은 잠깐 자고 일어난 초저녁 잠 때문에, 혹은 이런저런 생각들이 나를 놓아주지 않아서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린다.
이때 벨소리는 반드시 '따르르릉'하는 아날로그적인 소리로 울려주어야 하며,
전화기도 이왕이면 옛이야기들을 많이 알고 있을 듯한 엔틱풍이면 좋겠다.
이 시간에 누굴까, 의아하면서도, 마침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던 참이었으므로, 아주 반갑게 수화기를 집어 든다.
"여보세요?"
그리고 전화선을 타고 전해져오는 목소리는, 아, 그녀다!
21세기의 셰에라자드, 정혜윤.
옛날옛날 페르시아에, 매일 밤마다 왕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리하여 많은 여인들의 목숨을 구하는 셰에라자드가 있었다면,
지금 내 곁에는, 불면의 밤으로부터 나를 구해주는 현대판 셰에라자드 정혜윤이 있다.
전화기 너머에서 "내가 이야기 들려줄까?"라며 밤새 내 귓가에 대고 런던을 속삭여 주는 그녀 정혜윤, 그리고 그녀의 책.
<언젠가 떠날 너에게 런던을 속삭여 줄게>.
이 책은, 내게 이렇듯 밤 늦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 같은 느낌이었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홀로 잠 못 이루는 나를 구해주려,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벨소리를 울려온 이에게 나는 무한한 고마움을 느낀다.
하지만 전화선 너머에서 들려오는 이 많은 이야기들은, 그러니까 이 책은, 나를 불면의 밤에서 해방시켜주지는 못한다.
나는 오히려 그녀가 속삭여 주는 이야기들에 취해, 이 밤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달콤한 불면이다.
이 책을 '여행기'라는 이름으로 부르기에는 조금 망설여진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여행기'가 아닌 탓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여행기'라 함은, 런던의 여러 볼거리를 화려한 사진으로 찍어 보여주고 그곳의 어디는 어떻더라, 음식은 어떻더라 등을 알려준다거나 하는 여행기, 또는 절로 감성이 풍부해질 듯한 사진에 시처럼 아름다운 짧막한 글귀를 적은 그런 여행기 말이다. 적어도 '내가 흔히 생각하는 여행기'는 그렇다.)
이 책은,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부르면 좋을까?
저자의 말 때문인지 역시 '천일야화'가 떠오르는데, 그냥 '이야기책'이라는 이름이 좋겠다.
각자 읽기 나름, 받아들이기 나름이지만, 내게 이 책은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 어떤 이야기책보다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책'이다.
현대의 런던을 살아가는 런더너 중 그 누구도, 정혜윤 그녀처럼 이렇게 많은 런던의 이야기들을 알고 있지는 못할 것 같다.
그녀는 마치 높은 곳에서 런던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며 숱한 세월을 지내온 한 그루 나무 같다.
그 나무의 잎사귀 하나하나, 그 나무의 그늘 한뼘한뼘, 그 나무의 뿌리 마디마디에는 런던의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런 나무가 실제로 있다면, 그 나무를 지금까지 살아오게 한 것은 햇빛과 빗물이겠지만,
정혜윤이라는 그 '나무'를 키운 자양분은, 그녀가 읽은 수많은 책들이다.
'지독한 독서가 정혜윤'
이 책은, 정혜윤,이라는 이름 앞에 붙은 그 수식어(지독한 독서가!)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사실, 이 책은 나와 그녀의 첫만남이기에, 내게 더 큰 놀라움을 안겨다 준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독서 면모를 느끼며, 나는 계속 그 수식어(지독한 독서가!!!)를 떠올렸고, 연신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보자면, 런던의 이야기,보다는 그녀의 독서 경력이 내게 더 큰 관심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런던을 속삭여주기 이전에, 그녀에게 런던을 속삭여 준 책은 어떤 책들이 있을까?
나는 이 책 속에 등장하는 또다른 수많은 책들의 리스트에 매료당했다.
정혜윤,이라는 '나무'를 키워온 그 '햇빛과 빗물'말이다.
그녀가 자신의 '햇빛과 빗물'을 아낌 없이 내어놓았다.
런던에 대해, 1001일이라도 속삭여 줄 수 있을 그녀의 이야기 중 일부일테지만,
다른 어떤 책에서도, 이만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유니크하게' 런던을 만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야기에 굶주린 이들이라면, 런던의 옛 이야기가 궁금한 이들이라면, 새롭고 특별한 여행기를 원하는 이들이라면,
꼭 정혜윤, 그녀가 속삭여주는 이 런던 이야기를 만나보길.
아직도 전화기 너머에서 그녀가 속삭이는 것 같다. "런던을 들려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