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세트 - 전3권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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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만한 누군가로부터 추천을 받은 책이라 덜렁 사 놓고는 책꽂이에 꽂아만 두고 있었다.

아무래도 세 권짜리라 부담이 되었던 듯.

매주 화요일, 강의 나가기 전에 그날 그날 끌리는 책을 선택해 들고 나가는데, 몇 주 전에 문득 이 책이 내게 강렬한 눈빛을 보내왔다.

그래, 일단 상 권부터 펼쳐보자, 한번 펼치면 어떻게든 끝까지 읽겠지,

나름대로 단단히 각오를 하고 상 권 '비밀 노트'를 챙겨나갔다.

그 결과,

수업 중에 "아까 읽던 책이 너무 재밌어서 빨리 수업 끝내고 책 읽고 싶다"는 말을 비치는 지경에 이르고 마니...

한번 펼치면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책,이란 이런 것이지! 오랜만에 느꼈다.

그날따라 엄마가 데이트를 신청해와 백화점에서 엄마를 기다리다가 상 권을 다 읽고 말았는데,

쇼핑이고 뭐고 얼른 집에 가서 중 권을 읽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는!

 

상중하 세 권은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큰 제목 아래 '비밀 노트', '타인의 증거', '50년간의 고독'이라는 각각의 제목을 또 가지고 있다.

읽다 보니, 세 권을 각각의 한 이야기로 읽어도 손색이 없겠다 생각이 들었는데(그래서 원래는 서평도 각 권에 쓸 생각이었지. 당시에는.) 역자 후기를 읽어보니, 이 책은 원래 시리즈이긴 하나 독립된 소설로 발표된 것이라 한다.

한국에서 번역 출간하면서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제목을 따로 단 것이다.

내 느낌으로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제목과 '이름의 철자 순서만이 다른 쌍둥이 형제 루카스Lucas와 클라우스Claus의 처절한 운명이 교차하는 삼부작 소설'이라는 띠지의 문구가 이 소설을 읽는 데 약간의 방해 요소가 되었다.

책을 읽기 전에 자꾸 생각이 그쪽으로만 쏠려서 도대체 그 '세 가지 거짓말'은 무엇일까, 자꾸 생각하게 되고, 루카스와 클라우스의 이름에 깊은 의미를 두게 되었으니 말이다.(실제로 소설에서는 그 '철자 순서만이 다른' 이름은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지도 않다. 오히려 Claus와 Klaus의 차이라면 모를까.)

그래서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제목 보다는 각각의 책에 달린 소 제목을 그 제목으로 하여 이 책을 보는 게 더욱 좋겠다는 생각.

 

상 권 '비밀 노트'는 전쟁 때 시골 할머니 집에 맡겨진 클라우스와 루카스 형제의 시골 생활기가 담긴 책인데, 그 재미를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시골 생활을 견디기 위해 하는 갖가지 훈련들-단식 훈련, 잔혹 훈련, 구걸 연습, 장님과 귀머거리 연습 등등은 어린 형제가 처한 상황에 가슴이 짠하긴 하지만 (미안하게도) 엄청 재밌다. 두 형제와 관계 맺는 여러 사람들 이야기, 특히 마녀 같지만 결국 두 형제와 끈끈한 정을 나누는 할머니 이야기가 이 책의 재미를 더해준다. 엄청난 재미에 휩싸여 정신없이 읽다보면, 정말이지 (쇼핑이고 뭐고!) 얼른 다음 권을 펼쳐들고 싶은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상 권에서 그렇게 됐으므로, 중 권 '타인의 증거'는 루카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번에는 루카스가 상 권과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가는데, 상 권에 비해 분위기는 조금 무거워지고, 단순한 재미도 약간 덜해진다. 하지만 역시 헤어날 수 없는 흥미진진함으로 밤을 새게 만들어 버린다. 중 권이 끝나갈 무렵 슬슬 움직임을 보이는 클라우스. 그리고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듯한 그 분위기! 아, 궁금증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편지를 한 통 남기며 '타인의 증거'도 막을 내린다. (마지막을 마무리하는 솜씨가 아주 뛰어나다! 다음 권을 보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든다는.)

 

하 권 '50년간의 고독'에서는 클라우스가 화자인 '나'로 등장하여 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 권 중 하 권의 제목이 가장 마음에 드는데, 책의 내용과 가장 잘 어울리는 제목이라는 생각. '나'는 왜 50년간이나 고독해야 했는지, 도대체 이 쌍둥이 형제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마지막까지 마음을 놓을 수도, 눈을 뗄 수도 없다. 읽는 동안 머리가 따라주질 않아 내용이 헷갈리기도 여러번이었다. 작가가 천재이거나, 내가, ...이거나. 흠흠.

 

읽은 지 한참이 지났건만, 이 책을 떠올리니 그때의 감동과 흥분은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이 책을 읽으며, '아!'하는 감탄을 몇번이나 터뜨렸는지 모른다.

이 책을 읽은 뒤로는,

'한번 잡으면 손을 뗄 수 없는 책'이나 '재밌게 읽은 책' 등을 추천해달라는 글에 이 책을 빠뜨리지 않고 추천한다.

아, 정말이지 자신있게 강추!!!

 

 

그녀가 말했다.

- 그래요. 제일 슬픈 책들보다도 더 슬픈 인생이 있는 법이니까요.

내가 말했다.

- 그렇죠. 책이야, 아무리 슬프다고 해도, 인생만큼 슬플 수는 없지요.

('50년간의 고독'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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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는 혼자다 1
파울로 코엘료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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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난 주말, 부산에 함께 다녀온 책이다.

수원 - 부산, 왕복 10시간이 넘는 무궁화 여행을, '승자는 혼자다'가 지켜주었다.

 

네이버 연재를 시작할 때, 나도 함께 달렸었으나, 초반에 뒤쳐지고 말아, 책이 나오길 기다렸다.

사실, 처음에는 권총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책이, 별로 내 정서에는 맞지 않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 선뜻 읽지 못하고

여태 미뤄두었던 건데, 역시,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고, 책은 끝까지 읽어봐야 하는 법!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이어진 당일치기 부산 '여행'이었음에도, 기차에서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코엘료 작가가 들려주는 이 흥미진진한 칸에서의 하루, 때문에!

 

이 긴 이야기는, 전 세계적인 영화제가 열리는 칸에서의 단 하루가 담겨 있다.

이게 단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이라니, 마치 나의 그날 새벽부터 밤까지의 하루를 이 책 속에서 함께 숨가쁘게 지낸 기분.

 

인터넷 연재로 보며 글에 깊이 빠져들지 못했던 것과 달리,

종이책으로 만난 '승자는 혼자다'는 시종 끊이지 않는 긴장감이 (식상한 표현이지만) 손에 땀을 쥐게 했다.

 

헤어진 아내를 잊지 못하고, 그 사랑을 되찾기 위해 칸으로 날아온 주인공.

그는 냉소적인 태도로 칸 영화제 그 화려한 커튼 뒤에 숨겨진 탐욕스러운 욕망과 숨막히는 경쟁을 비웃는다.

영화제는 뒷전이고 어떻게든 '한 건' 해보려는 사람들로 득시글거리는 그 이면을 비웃으며, 주인공이 하는 일은 '희생자'를 만드는 일이다.

아내에게 다시 자신에게 돌아와 달라고, 그렇지 않으면 한 세계를 파괴해버리겠다는 협박을 하는 데 쓰일 도구로서의 희생자.

한 사람의 세계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연히 영문도 모르고, 그렇게 파괴된다. 주인공의 손 안에서.

그리고 그 메시지가 아내의 휴대전화로 전송이 된다. 하나, 둘, 셋, 연이어서.

 

도대체 그는 얼마나 많은 세계를 파괴할 것인지, 그 희생자는 최종적으로 누가 될 것인지.

책은 뒤로 갈수록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2권 중반을 넘어가면서는 정말 '정신없이' 단숨에 읽어내렸다.

도저히 궁금해서, 이 책을 다 읽기 전에 기차가 수원에 도착하는 일만은 제발 없기를 바라며 말이다.

(어찌나 숨가쁘게 읽었던지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는, 한참을 컴컴한 창 밖을 내다보며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이야기로서의 재미와 함께, 역시 파울로 코엘료로구나, 느낄 수 있는 그 특유의 교훈과 감동도 곳곳에 숨어 있어

책 읽는 재미를 더해주었다. 책 속 수많은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이 책을 읽으며, 누군가의 손에 파괴된 수많은 세계들이 떠올랐다.

얼마 전에 온국민을 경악하게 한 사건의 주인공 '나영이'부터해서, 뉴스나 신문 등을 통해 접하곤 혀를 끌끌 찼던 우리 현실의 '희생자'들.

단순히 한 목숨의 끝,이 아니라, 어쩌면 전 세계를 파괴하는 첫 톱니바퀴였을지도 모르는 그 한 세계,가 파괴된 일에 대해서,

깊이깊이 마음이 아프고 또 아팠다.

또한, 살아 있는 우리의 한 세계로 보자면, 우리 개개인 또한 속에 얼마나 큰 세계를 품고 있는 존재들인지.

나라는 사람이, 결코 '나' 한 사람의 세계만 품고 사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내가, 또한 이 지구위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가,

모두 다 특별한 존재로 여겨졌다.

이 책에서 내게 가장 강렬히 다가왔던 게 바로 이 '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무척 인상적이었다.

 

'연금술사'를 내 인생의 책으로 꼽을 만큼 좋아하지만, 파울로 코엘료의 책,에는 별다른 애정이 없었는데,

'승자는 혼자다'를 읽고나니, 파울로 코엘료의 책들을 다시 만나보고 싶어졌다.

파울로 코엘료의 책들을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편애' 레이더가 꿈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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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이종인 옮김 / 동아일보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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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알게 된 건, '질병의 통역사'라는 단편을 통해서였다.

문장배달로 날아온 '질병의 통역사'의 한 부분을 만나고는 당장 이 책을 읽고 싶었다.

그때는 '통역'이라는 단어가 남의 일이 아니던 때였던지라,

그 제목이며, 그때 만난 문장들이 가슴에 무척 와 닿았다.

 

'질병의 통역사'라는 책을 찾았으나 아무리 찾아봐도 책이 없어 웬일인가 했더니,

이 책 <축복받은 집>의 수록작 중 하나가 '질병의 통역사'였다.

 

줌파 라히리.

처녀작 <축복받은 집>으로 펜/헤밍웨이 문학상과 퓰리처상을 수상하고 <뉴요커> '올해의 소설'에 선정되기도 했단다.

소설가 김연수는

"이야기 중독자를 위한 휴대용 구급약. 런던, 뉴델리, 뉴욕, 모두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라는 추천평을 남기기도 했다.

(줌파 라히리의 후속작 <그저 좋은 사람>에 대해서도 '남들보다 먼저 읽은 게 미안할 정도'라며

김연수 작가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쯤 되면 줌파 라히리가 어떤 작가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몇 달 전에 단편 두 개 정도를 읽고 덮어 두었다가 이번에 다시 펴들었다.

이 책에는 모두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모든 이야기에 인도인이 등장한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영국에서 인도 벵갈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미국에서 살고 있다는 작가의 배경이 책 속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제목은 '축복받은 집'이지만, 이야기의 대부분은 어딘가 조금씩 부족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부족함을 각자의 방식으로 극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사실 이 책을 읽은 지 3주 가량 지나 기억이 조금 흐려졌지만,

수록작 중 '잠시 동안의 일'과 '섹시', '질병의 통역사', '세 번째이자 마지막인 대륙' 이렇게 네 편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잠시 동안의 일'에서는, 아이를 사산하고 서로 사이가 멀어진 부부가 닷새간 1시간씩 정전 된 저녁 시간에 서로에게 비밀을 하나씩 털어놓는다. 어두움을 틈타 그 동안 서로에게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씩 말하며 부부의 사이가 가까워지겠구나 지레짐작했는데, 역시 그건 '잠시 동안의 일'일 뿐. 그 닷새간의 정전이 너무 늦게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전이 조금 더 일찍 되었더라면, 그들 부부가 대화를 나눌 시간이 조금 더 일찍 찾아왔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글쎄. 아무튼, 정전 속에서 진심을 털어놓는 부부의 모습이 꽤 인상적인 글이었다.

'섹시'는 사실 처음 읽을 때 흥미를 느끼지 못하여 읽다가 덮어두고는 몇 달 동안 이 책을 잊고 있게 만들었는데, 다시 펼쳐들고 읽었을 때, 처음과 달리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는 글이었다. 직장 동료의 형부가 바람이 났다는 얘기를 옆에서 계속 전해듣는 그녀는 사실 그 형부의 정부와 같은 상황에 빠져있다. 역시 아내가 있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 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친구의 아이가 그녀에게 '섹시하다'고 말해주는 부분이었다. 섹시하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말해달라고 애원하는 그녀에게 아이는 말한다. "그건 당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이에요." 아이에게 '섹시하다'의 의미를 그렇게 그려준 건, 아이의 부모였다. 엄마 대신 섹시한 어떤 여자를 사랑하는 아빠를 보며 아이가 익힌 '섹시하다'의 의미가, 왜 아직 잊혀지지 않고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질병의 통역사'에서는 인도로 여행을 떠난 화목(해보이는)한 다스 가족과 인도인 가이드가 나온다. 그 가이드의 또다른 직업이 바로 '질병의 통역사'이다. 병원에서 구자라티족 환자들을 위해 통역을 해주는 일을 한다. 이 가이드에게 다스 부인이 갑자기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8년 동안 가슴 속에 담아온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을 낯선 이에게 털어놓고 자신의 아픔을 덜어달라고 말하는 다스 부인. 이 '질병의 통역사'는 다스 부인을 위해 어떤 질병도 통역해 줄 수 없지만, 다스 부인은 누군가에게 아픔을 털어놓은 것만으로도 그 아픔이 덜어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다시 화목한 가정으로 돌아가는 거다. 많은 가정이 그렇게 유지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해 준 소설이었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인 대륙'은 특히나 아름답다고 느껴진 글이었다. 아홉 편의 단편 중 하나인 짧은 글이지만, 그 감동만큼은 결코 짧지 않다. 인도에서 건너 온 남자와 그 남자가 하숙을 하게 되는 집의 주인인 괴이한 노파 사이의 이야기도 아름다웠지만, 남자와 그 부인이 타인에서 진정한 '가족'이 되기까지의 그 과정이 내게는 경이롭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이들 부부에게는 불타는 사랑도 없었고, 환상적인 결혼 생활도 없었고, 정말 '잔잔히' 그들의 가정을 이루어 나갈 따름이다. 뜨겁게 사랑해 결혼하고 차디차게 식어 이혼하는 요즘의 수많은 가정의 모습과 크게 비교되는 모습이다. 결혼은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것이라는 환상(?)을 가진 내게, 또다른 결혼의 모습을 생각해보게 해주기도 한. 아아, 정말 아름다운 소설이다.

 

이렇게 좋은 책을 오랫동안 책꽂이에 묵혀 두었다니 죄악이다.

그녀의 최신작 <그저 좋은 사람들>도 얼른 읽어봐야겠다.

줌파 라히리를 읽을 수 있다니, 정말이지 나는 축복받은 독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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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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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 책을 이제서야 읽었느냐,고 한대도 할말은 없다.

워낙 읽은 책이 많지도 않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몇 년 전에 도서관에서 빌려다가 읽던 중에 대출 기한이 다 되어 반납해 버리고는 이제서야 재회를 하게 되었다.

 

그때 앞 부분만 조금 읽다가 반납을 했는데도 꽤 재미있다는 기억은 있었다.

지난 여름에 위화의 새 장편소설(무더운 여름/문학동네)이 나오면서 주변에 위화 소설을 읽는 사람이 심심찮게 등장했다.

내게 위화 소설이 어떻느냐고 물어오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때마다 나도 안 읽었다고 말하기가 적이 민망했다.

안되겠다, 나도 이번 기회에 위화를 모조리 읽어버리고 말겠다!라고 생각하며 우선 집에 있던 <허삼관 매혈기>부터 빼들었다.

(표지를 자세히 보면-요리조리 살짝 움직여보기도 하면서-은빛으로 새겨진 글자가 참 예쁘다. 표지가 무척 마음에 든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넷째 삼촌과 할아버지의 보살핌 속에 자란 허삼관. 요즘 여자들은 못된 남자에게 끌린다는데, 할아버지 마을의 여자들은 피를 파는 남자에게 끌린다(?). 피를 판다는 게 건강함의 상징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의 건강한 남자 허삼관도 동네사람 방씨, 근룡이와 함께 생애 '첫 경험'을 하고, 그 돈으로 결혼까지 하게 된다.

이후 가정을 꾸려나가면서 집안에 어려운 일이 생길 적마다 허삼관은 피를 팔러 간다.

허삼관에게 '자라 대가리' 노릇을 시킨 큰 아들 일락이가 사고를 쳐 병원비를 물어주게 되었을 때도, 둘째 아들 이락이의 상사에게 식사를 대접할 때도, 임분방의 배 위에 올라 간 뒤에도(앗, 이때는 유일하게, 가족을 위해 피를 판 게 아니었다!), 일락이가 간염으로 다 죽게 생겼을 때도, 허삼관은 피를 팔았다.

피를 팔기 전에는 우선 물을 많이 마신다. 한 열 사발 쯤. 그래야 피가 묽어져 더 많이 팔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다가 방씨는 오줌보가 터져 죽기도 했지만.) 피를 팔고 나면 꼭 돼지간볶음과 황주를 먹고 마신다. 돼지간볶음은 보혈 작용을 하고, 황주는 혈액 순환을 돕기 때문이다. 피를 한 번 뽑고 나면, 3개월 이내에는 또 뽑을 수 없다.

허삼관이 피 팔러 다니는 장면을 보며 내가 배운(?) 것들이다.

이 책은 시종 웃음이 터져나오도록 재미있게 씌였지만, 허삼관, 이 사람은 꽤 웃긴 사람이지만,

책을 읽는 중간중간 코끝을 찡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자기를 닮지 않고 외간 남자 하소용을 닮은 큰 아들 일락이의 방황하는 모습, 또 그런 일락이에게 마음을 주지도 못하고 안 주지도 못하는 허삼관. 내가 넷째 삼촌을 생각하는 것만큼만 너도 나를 생각해다오, 라고 말할 때는 아 정말 가슴이 어찌나 짠하던지. 일락이를 업고 승리반점으로 가는 허삼관의 모습은 오래오래 잊히지 않을 것 같다.

그 뿐인가, 간염에 걸려 상하이의 큰 병원으로 실려간 일락이를 찾아가는 긴긴 여정 동안 허삼관은 며칠에 걸러 한 번씩 피를 판다.(앞에도 말했지만, 피를 한 번 뽑고 나면 3개월 내에는 다시 뽑을 수 없는데도 말이다.) 자기의 목숨이 어떻게 되든 아랑곳없이 일락이의 치료비를 모으기 위해 피를 파는 허삼관의 모습에는 그만 눈물이.

아버지의 피를 팔아, 부모의 피를 팔아 살아가는 자식이 어디 일락이, 이락이, 삼락이 뿐일까.

나는 얼마나 많은 우리 아버지의, 우리 어머니의 '피'를 뽑아서 이만큼 컸을까 생각하니...

 

허삼관이 굶주린 가족들에게 요리를 해주는 장면이 있다.

비록 '입'으로 하는 요리이지만, 가족들에게는 아버지의 사랑이 가득 담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요리였을 거다.

허삼관은 그렇게 멋진 아빠다.

...'허삼관은 그렇게 멋진 아빠다'라고 말하고 보니, 허삼관 위로 우리 아버지의 모습이 겹친다.

우리 아버지도 그렇게 멋진 아빠거든.

아빠, 이제 '피' 그만 파세요, 제가 호강시켜드릴게요,

라고 얼른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갑자기, 아빠 생각에 숙연해지는데,

아무튼 결론은,

이 책은 굉장히 아름답고 재미있고 감동적이고 멋지고 훌륭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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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내린다
마르탱 파주 지음, 발레리 해밀 그림, 이상해 옮김 / 열림원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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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내린다'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이천구년 시월의 마지막 날, 우산 대신 마르탱 파주의 <비>를 펼쳤다.

이 책을 사고 처음 내리는 비였다.

빨리 비가 왔으면 싶었다. 촌스럽게도, 제목이 '비'니까 비가 오는 날 읽고 싶었다.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일을 하다가, 아, 비다!, 마치 새로 산 비옷을 입고 비마중을 나가는 아이처럼 신나서 이 책을 펼쳐 들었다.

 

이 책은 비에 대한 단상이 적힌 메모장, 같은 책이다.

 

  하나의 비가 아니라, 수없이 많은 비가 있다. 장소, 시간, 다른 많은 기준에 따라, 비는 부드럽거나 날카롭고, 차갑거나 뜨겁고, 짧거나 길다. 비는 여러 언어로 말하고, 다양한 춤을 알고 있다. 비의 오래된 문화들은 5개 대륙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 사람의 성격이 다 다르듯, 비의 성격도 천차만별이다. 비는 감상적이고, 열정적이고, 소심하고, 발랄하다. 비는 오랜 내적 숙고 끝에 구름을 떠나 우리를 적시기로 결정했다.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하기 위해 우리는 그의 개성을 이해해야만 한다.(11쪽)

 

오늘 내린 비는 차분한 아이였다. 그리고 조금은 차가운 성격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 아이가 차가운 게 아니라, 이 비가 지나고 나면 기온이 뚝 떨어질 거라는 일기 예보를 들은 내 마음이 괜히 그렇게 비의 성격을 단정지어버린 건지도 모르겠지만. 개구쟁이 같은 한 여름 소나기에 비하면, 좀 더 성숙한 여인의 분위기를 머금은 비랄까. 빗소리도 지나치게 요란하거나 사납지 않았다. 조신하고 여성스러운 여인이었던 모양이다.

 

  삶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반면, 비가 오면 뭔가가 일어난다.(...)

  비가 내리면, 그날 하루는 더 이상 일에도, 서로가 나누는 진부한 말에도, 식사나 여행에도 속하지 않는다. 잎들이 몸을 떨고, 우산들이 펼쳐진다. 카페, 영화관, 그리고 서점들이 가득 찬다. 유행도 더는 우리에게 옷 입는 방식을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는 되는 대로 서툴게 대비한다. 두건, 신문지, 외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빗속을 달린다. 우리는 문득 우리의 행선지에 관한 새로운 질문들을 스스로 던져본다. 우리 삶의 리듬이 깨진다. 균열이라 말할 수조차 없지만, 갑자기 우리는 시적 무정부상태가 도래하는 것을 보며 기쁨을 나눈다.(17쪽)

 

오늘의 내 하루는 여느 하루와, 여느 토요일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비가 오면 뭔가가 일어난다.'라는 문장을 보며 생각했다. 뭐가 일어났지? 어제와 그제와 일주일 전과 다를 바 없는 오늘에 말이야,라고 생각하는데, 아, 그렇다 뭔가가 일어났다. 나는 일하다가 그만 노트북 뚜껑을 덮고 창밖의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그러다가 책을 한 권 빼들었고, 그러다가 현관문을 열고 빗줄기가 떨어지는 마당을 내다보며 숨을 깊이 들이마셔 비 냄새를 내 몸속 가득 빨아들였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나의 하루에 추가되지 않았을 일들이다. '시적 무정부상태'까지는 아니나마, 무언가 일어나긴 했다.

비가 온 덕분이었다.(그래, 그 덕분에 오늘 해야 할 작업은 컴퓨터 속에서 잠을 자고 말았지만.)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제목부터도) 온통 비에 대한 글 뿐이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는 나이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어쩐지 비를 사랑해야 할 것 같은, 사랑하게 될 것 같은 기분이다.

마침 비가 오는 날 만나서 그런지 이 책에 소나기처럼 밑줄을 그어댔다.

'시인'의 감성을 지니지 못한 나를 대신해, 지금 내리고 있는 이 비에 대해 수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비가 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을 하고, 비가 오면 전쟁의 확률이 줄어들며, 비가 올 때 이 세상에는 신비로운 생명들이 탄생을 하며, 비가 내리기 때문에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아, 구름이 얼마나 멋진 마술사인지에 대해서도!

비 오는 날 읽기에 더없이 아름다운 책이다.

이제는 비 오는 날이 조금은 기다려질 것 같다. 예쁜 우비는 없지만, 비 오는 날에 어울리는 이렇게 예쁜 책이 있으니까.

 

비가 내리면 모든 것이 아름다워진다.(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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