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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이종인 옮김 / 동아일보사 / 200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알게 된 건, '질병의 통역사'라는 단편을 통해서였다.
문장배달로 날아온 '질병의 통역사'의 한 부분을 만나고는 당장 이 책을 읽고 싶었다.
그때는 '통역'이라는 단어가 남의 일이 아니던 때였던지라,
그 제목이며, 그때 만난 문장들이 가슴에 무척 와 닿았다.
'질병의 통역사'라는 책을 찾았으나 아무리 찾아봐도 책이 없어 웬일인가 했더니,
이 책 <축복받은 집>의 수록작 중 하나가 '질병의 통역사'였다.
줌파 라히리.
처녀작 <축복받은 집>으로 펜/헤밍웨이 문학상과 퓰리처상을 수상하고 <뉴요커> '올해의 소설'에 선정되기도 했단다.
소설가 김연수는
"이야기 중독자를 위한 휴대용 구급약. 런던, 뉴델리, 뉴욕, 모두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라는 추천평을 남기기도 했다.
(줌파 라히리의 후속작 <그저 좋은 사람>에 대해서도 '남들보다 먼저 읽은 게 미안할 정도'라며
김연수 작가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쯤 되면 줌파 라히리가 어떤 작가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몇 달 전에 단편 두 개 정도를 읽고 덮어 두었다가 이번에 다시 펴들었다.
이 책에는 모두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모든 이야기에 인도인이 등장한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영국에서 인도 벵갈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미국에서 살고 있다는 작가의 배경이 책 속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제목은 '축복받은 집'이지만, 이야기의 대부분은 어딘가 조금씩 부족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부족함을 각자의 방식으로 극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사실 이 책을 읽은 지 3주 가량 지나 기억이 조금 흐려졌지만,
수록작 중 '잠시 동안의 일'과 '섹시', '질병의 통역사', '세 번째이자 마지막인 대륙' 이렇게 네 편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잠시 동안의 일'에서는, 아이를 사산하고 서로 사이가 멀어진 부부가 닷새간 1시간씩 정전 된 저녁 시간에 서로에게 비밀을 하나씩 털어놓는다. 어두움을 틈타 그 동안 서로에게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씩 말하며 부부의 사이가 가까워지겠구나 지레짐작했는데, 역시 그건 '잠시 동안의 일'일 뿐. 그 닷새간의 정전이 너무 늦게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전이 조금 더 일찍 되었더라면, 그들 부부가 대화를 나눌 시간이 조금 더 일찍 찾아왔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글쎄. 아무튼, 정전 속에서 진심을 털어놓는 부부의 모습이 꽤 인상적인 글이었다.
'섹시'는 사실 처음 읽을 때 흥미를 느끼지 못하여 읽다가 덮어두고는 몇 달 동안 이 책을 잊고 있게 만들었는데, 다시 펼쳐들고 읽었을 때, 처음과 달리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는 글이었다. 직장 동료의 형부가 바람이 났다는 얘기를 옆에서 계속 전해듣는 그녀는 사실 그 형부의 정부와 같은 상황에 빠져있다. 역시 아내가 있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 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친구의 아이가 그녀에게 '섹시하다'고 말해주는 부분이었다. 섹시하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말해달라고 애원하는 그녀에게 아이는 말한다. "그건 당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이에요." 아이에게 '섹시하다'의 의미를 그렇게 그려준 건, 아이의 부모였다. 엄마 대신 섹시한 어떤 여자를 사랑하는 아빠를 보며 아이가 익힌 '섹시하다'의 의미가, 왜 아직 잊혀지지 않고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질병의 통역사'에서는 인도로 여행을 떠난 화목(해보이는)한 다스 가족과 인도인 가이드가 나온다. 그 가이드의 또다른 직업이 바로 '질병의 통역사'이다. 병원에서 구자라티족 환자들을 위해 통역을 해주는 일을 한다. 이 가이드에게 다스 부인이 갑자기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8년 동안 가슴 속에 담아온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을 낯선 이에게 털어놓고 자신의 아픔을 덜어달라고 말하는 다스 부인. 이 '질병의 통역사'는 다스 부인을 위해 어떤 질병도 통역해 줄 수 없지만, 다스 부인은 누군가에게 아픔을 털어놓은 것만으로도 그 아픔이 덜어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다시 화목한 가정으로 돌아가는 거다. 많은 가정이 그렇게 유지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해 준 소설이었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인 대륙'은 특히나 아름답다고 느껴진 글이었다. 아홉 편의 단편 중 하나인 짧은 글이지만, 그 감동만큼은 결코 짧지 않다. 인도에서 건너 온 남자와 그 남자가 하숙을 하게 되는 집의 주인인 괴이한 노파 사이의 이야기도 아름다웠지만, 남자와 그 부인이 타인에서 진정한 '가족'이 되기까지의 그 과정이 내게는 경이롭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이들 부부에게는 불타는 사랑도 없었고, 환상적인 결혼 생활도 없었고, 정말 '잔잔히' 그들의 가정을 이루어 나갈 따름이다. 뜨겁게 사랑해 결혼하고 차디차게 식어 이혼하는 요즘의 수많은 가정의 모습과 크게 비교되는 모습이다. 결혼은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것이라는 환상(?)을 가진 내게, 또다른 결혼의 모습을 생각해보게 해주기도 한. 아아, 정말 아름다운 소설이다.
이렇게 좋은 책을 오랫동안 책꽂이에 묵혀 두었다니 죄악이다.
그녀의 최신작 <그저 좋은 사람들>도 얼른 읽어봐야겠다.
줌파 라히리를 읽을 수 있다니, 정말이지 나는 축복받은 독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