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내린다
마르탱 파주 지음, 발레리 해밀 그림, 이상해 옮김 / 열림원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비는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내린다'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이천구년 시월의 마지막 날, 우산 대신 마르탱 파주의 <비>를 펼쳤다.

이 책을 사고 처음 내리는 비였다.

빨리 비가 왔으면 싶었다. 촌스럽게도, 제목이 '비'니까 비가 오는 날 읽고 싶었다.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일을 하다가, 아, 비다!, 마치 새로 산 비옷을 입고 비마중을 나가는 아이처럼 신나서 이 책을 펼쳐 들었다.

 

이 책은 비에 대한 단상이 적힌 메모장, 같은 책이다.

 

  하나의 비가 아니라, 수없이 많은 비가 있다. 장소, 시간, 다른 많은 기준에 따라, 비는 부드럽거나 날카롭고, 차갑거나 뜨겁고, 짧거나 길다. 비는 여러 언어로 말하고, 다양한 춤을 알고 있다. 비의 오래된 문화들은 5개 대륙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 사람의 성격이 다 다르듯, 비의 성격도 천차만별이다. 비는 감상적이고, 열정적이고, 소심하고, 발랄하다. 비는 오랜 내적 숙고 끝에 구름을 떠나 우리를 적시기로 결정했다.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하기 위해 우리는 그의 개성을 이해해야만 한다.(11쪽)

 

오늘 내린 비는 차분한 아이였다. 그리고 조금은 차가운 성격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 아이가 차가운 게 아니라, 이 비가 지나고 나면 기온이 뚝 떨어질 거라는 일기 예보를 들은 내 마음이 괜히 그렇게 비의 성격을 단정지어버린 건지도 모르겠지만. 개구쟁이 같은 한 여름 소나기에 비하면, 좀 더 성숙한 여인의 분위기를 머금은 비랄까. 빗소리도 지나치게 요란하거나 사납지 않았다. 조신하고 여성스러운 여인이었던 모양이다.

 

  삶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반면, 비가 오면 뭔가가 일어난다.(...)

  비가 내리면, 그날 하루는 더 이상 일에도, 서로가 나누는 진부한 말에도, 식사나 여행에도 속하지 않는다. 잎들이 몸을 떨고, 우산들이 펼쳐진다. 카페, 영화관, 그리고 서점들이 가득 찬다. 유행도 더는 우리에게 옷 입는 방식을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는 되는 대로 서툴게 대비한다. 두건, 신문지, 외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빗속을 달린다. 우리는 문득 우리의 행선지에 관한 새로운 질문들을 스스로 던져본다. 우리 삶의 리듬이 깨진다. 균열이라 말할 수조차 없지만, 갑자기 우리는 시적 무정부상태가 도래하는 것을 보며 기쁨을 나눈다.(17쪽)

 

오늘의 내 하루는 여느 하루와, 여느 토요일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비가 오면 뭔가가 일어난다.'라는 문장을 보며 생각했다. 뭐가 일어났지? 어제와 그제와 일주일 전과 다를 바 없는 오늘에 말이야,라고 생각하는데, 아, 그렇다 뭔가가 일어났다. 나는 일하다가 그만 노트북 뚜껑을 덮고 창밖의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그러다가 책을 한 권 빼들었고, 그러다가 현관문을 열고 빗줄기가 떨어지는 마당을 내다보며 숨을 깊이 들이마셔 비 냄새를 내 몸속 가득 빨아들였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나의 하루에 추가되지 않았을 일들이다. '시적 무정부상태'까지는 아니나마, 무언가 일어나긴 했다.

비가 온 덕분이었다.(그래, 그 덕분에 오늘 해야 할 작업은 컴퓨터 속에서 잠을 자고 말았지만.)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제목부터도) 온통 비에 대한 글 뿐이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는 나이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어쩐지 비를 사랑해야 할 것 같은, 사랑하게 될 것 같은 기분이다.

마침 비가 오는 날 만나서 그런지 이 책에 소나기처럼 밑줄을 그어댔다.

'시인'의 감성을 지니지 못한 나를 대신해, 지금 내리고 있는 이 비에 대해 수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비가 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을 하고, 비가 오면 전쟁의 확률이 줄어들며, 비가 올 때 이 세상에는 신비로운 생명들이 탄생을 하며, 비가 내리기 때문에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아, 구름이 얼마나 멋진 마술사인지에 대해서도!

비 오는 날 읽기에 더없이 아름다운 책이다.

이제는 비 오는 날이 조금은 기다려질 것 같다. 예쁜 우비는 없지만, 비 오는 날에 어울리는 이렇게 예쁜 책이 있으니까.

 

비가 내리면 모든 것이 아름다워진다.(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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