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나에게 쉼표 - 정영 여행산문
정영 지음 / 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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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얼마 전에 블로그에 쉼표를 찍은 적이 있다.

갑자기 마음이 너무 지치고 일상이 벅찼는데 문득 이 책 제목이 떠올랐다.

때.로.는.나.에.게.쉼.표.

그리하여, '아, 나에겐 쉼표가 필요해!'라고 외치며 (기껏) 쉼표를 찍은 곳이 블로그였다.

마음 같아서야 비행기 타고 어디론가 훌훌 날아가버리고 싶었지만, 하다못해 무작정 기차라도 타고 아무 곳이나 가서 바람을 쐬고 싶었지만, 그때 내 앞에는 산더미 같은 일이 버티고 있었으므로 블로그에 화풀이를 하고는, 몇 주가 지나 이 책을 읽어보는 것으로 내 삶의 쉼표를 대신했다.

 

비록 내 인생에 찍는 쉼표는 아니지만 저자 정영의 커다란 쉼표를 따라다니다보면 내 마음에도 좀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는데 막상 이 책을 읽고 나니 내 머릿속에는 쉼표 대신 새로운 문단(삶) 들여쓰기, 혹은 타인의 삶에 대한 인용 부호 같은 느낌이 더욱 강하게 남았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찍은 것은 쉼표였지만, 그것은 쉼이 아니었다.

그것은 또 다른 삶의 시작이었고, 또 다른 인연과의 만남이었으며, 또 다른 나의 탄생이기도 했다.

아, 이 지루한 삶에 쉼표를 하나 찍는 순간, 그 앞에 펼쳐지는 이 상큼하고도 아름다우며 가슴 벅찬 날들이라니!

 

그녀의 발걸음에서는 시작과 끝을 알리는 제한이 느껴지지 않았고, 그녀가 불쑥불쑥 찍은 쉼표들은 지도에 표시해보자면 일관성을 가지고 선을 이을 수도 없다. 어제는 이스탄불, 오늘은 태국, 내일은 대한민국의 어느 섬마을, 모레는 라오스……

언제부터 언제까지, 어디부터 어디까지, 그 처음과 끝을 정해 놓는 여행이라는 게 문득 재미없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그저 그녀가 이끄는대로 그녀가 찍은 쉼표의 흔적을 따라다니며 조금씩 조금씩 마음의 여유를 찾아갔던 이 '여행'이 즐거웠다.

 

이 여행산문을 통해 저자 정영의 삶의 조각들을 엿보며, 그녀는 어찌 이렇게 '영화 같은' 장면들과 많이 맞닥뜨렸단 말인가, 전생에 무슨 복이 많아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단 말인가, 도대체 그녀의 삶에 벌어지는 이런 일들이 내게는 왜 일어나지 않는단 말인가, 하는 생각들을 하며 저자가 어딘가 특별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다소 엉뚱한 생각도 함께 했다.

하지만 그녀와 나의 삶이 그렇게 다른 것은 사실 쉼표 하나 차이였다. 말 그대로 쉼.표.하.나.차.이.

일상에 쉼표를 찍은 자, 새로운 삶과 만날지니!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 또 다짐 해봤다. 가까운 시일 내에 꼭 일상에 쉼표를 찍고 새로운 삶과 만나기 위해 떠나리라!

표지만큼이나 마음이 파아랗고 시원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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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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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을 열었던 책인데, 늦게서야 리뷰를 쓰려니 참 아득하다.

 

무척 재미있고 폭소가 터지는 책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나에게 완득이는 폭소가 터지는 책이라기 보다는 짠하고 가슴이 뭉클한 책이었다.

웃기다기에 지하철에서 읽다가 미친듯이 웃음이 터지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되레 눈물이 쏟아져서 혼났다고 했더니,

"하여간 이상한 애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니까 내가 '하여간 이상한 애'여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내게 완득이는 가슴 찡한 성장 소설이었다는 생각은 바꾸지 않겠다.

 

거의 3주 전에 읽은 이 책을 지금 떠올리자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완득이의 난쟁이 아버지다.

완득이의 아버지는 춤꾼이었는데, 그냥 춤꾼이 아니라 '난쟁이 춤꾼'이다.

어머니도 없이 홀로 완득이를 키우며 아버지는 참 많이 힘들었을 거다. 춤을 그만 두고는 지하철 행상도 하고 전국 장터를 떠돌며 생계를 꾸려 나간다.

키가 어린아이 만큼밖에 자라지 않은 완득이의 아버지와 진짜 혈육은 아니지만 멀끔한 외모에 말을 더듬는 '삼촌', 가슴 속에 무슨 슬픔을 그리 숨기고 사는지 알 수 없는 완득이, 그 완득이의 마음을 알아 본 유일한 사람인 담임 '똥주'.

어느 캐릭터 하나 코끝이 찡해지지 않는 인물이 없었다.('똥주'는 짠하다기 보다는 의로운 인물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어렵게 가정을 꾸려온 아버지를 보며 자라서인지, 나는 전국 각지를 떠돌며 고생하는 완득이 아버지를 보며 우리 아버지 생각이 몹시도 났고(아아, 그러기엔 우리 아버지는 키도 훤칠하시고 무척 잘생기셨지만!) 그 탓인지 남들은 폭소를 터뜨리며 읽었다는 이 책을, 폭포 같은 눈물을 쏟으며 봤다. 그것도 사람이 붐비는 지하철에서!

 

완득이의 로맨스와, 완득이네 건넛집 아저씨와의 티격태격과, 재벌 아들의 불타는 의협심과, 이주 노동자들의 삶과, 킥복싱과……

그래, 떠올려보니 참 재미있는 이야기였다.(특히 건넛집 아저씨와의 일화, 상당히 웃겼다.)

작가의 재치가 돋보이는 문장과 단어들이 나를 웃겨주기도 했다.

완득이 또래의 청소년들이 읽으면 나보다 훨씬 재미있게 읽을 것 같다.

김려령 작가의 새 소설이 나왔던데, 그 책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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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시 - 시인 최영미, 세계의 명시를 말하다
최영미 / 해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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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잔치는 끝났다>, <도착하지 않은 삶>의 시인 최영미가 사랑하는 세계 명시를 엮은 책이다.

사실 최영미 시인의 시집과는 크게 교감하지 못했지만, 한 시인을 키운 시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궁금했다.

그러니까 이 시집은 최영미 시인의 '청춘의 문장들' 같은 시집이겠지.

 

평소에 시를 많이 보지도 않지만, 본다해도 거의 우리나라 시집밖에 보질 않아서 외국 시는 정말 오랜만에 접해봤다.

게다가 연대가 기원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시라니!

이 시집이 아니었으면 만나기 힘들었을 것 같은 오래된 시들과의 만남이 무척이나 뜻깊게 느껴졌다.

이름부터 낯선 (하지만 무척 유명한 게 틀림없어 보이는) 시인들부터 이름은 들어봤지만 아직 시는 접해보지 못한 시인들, 시 몇 편쯤은 만나본 적 있는 시인들까지, 이 책은 내게 새로운 시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저자의 말에서 만난 '여러 삶을 살 수는 없지만 여러 시를 읽을 수는 있다.'라는 문장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시집이었다.

나는 지금 21세기 대한민국의 한 평범한 여성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이지만,

최영미 시인이 소개해 준 시들 덕분에 기원전 이집트의 삶도, 13세기 이탈리아의 삶도, 17세기 영국의 삶도, 바로 얼마 전에 지나간 일본의 삶도 조금이나마 아주 조금이나마 향유해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시를 최영미 시인이 직접 번역했다 한다.

원문으로 그 시들을 줄줄 외우며 그 아름다운 리듬감에 전율을 느꼈을 시인을 생각하니,

번역된 글자로밖에 시를 볼 수 없는 나의 '까막눈' 신세가 그 어느때보다 아쉽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시가 원문도 함께 실려 있더라면 좋았을텐데, 하는 욕심도 조금 들었다.

뭐 나에게는 무용지물일지라도 다른 독자들에게는 분명히 시 읽기의 또다른 맛을 제공해줄테니까.)

하지만 역시 시인의 번역이라 그런지, 번역된 문장으로만 봐도 무척 아름다운 시들이 많았다.

 

짧게 곁들여 놓은 최영미 시인의 '해설'을 통해 흥미로운 이야기도 많이 알게 되었는데,

에밀리 디킨슨이 죽을 때까지 독신이었다던가, ('내 인생의 책' 중 한 권인) <테스>의 저자 토마스 하디가 수백 편의 시를 남긴 시인이기도 했다던가, 두보는 고사성어나 어려운 한자를 많이 쓰지만 이백의 시는 각주 없이도 쉽게 읽을 수 있다던가, 헤밍웨이의 소설 제목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사실은 존 던의 시 제목이라는 등의 이야기들은, 시에 문외한인 내게는 "전혀 몰랐군!"하는 감탄과 함께 시 읽는 재미를 더해주었다.

그리고 최영미 시인의 이런 이야기는 정말이지 두팔 벌려 환영.

"나룻배는 누구이고 행인은 누구일까. 교과서에서 배운 「님의 침묵」처럼 혹시 어떤 심오한 상징이 숨어 있지 않나? 묻지 말고 그냥 지극한 짝사랑의 토로로 봐도 무방하다. 민족이니 불교사상이니 하는 관념을 갖다대어 분석하려 들지 말고, 만해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을 버리고 상식의 차원에서 음미해야 시의 참맛이 우러난다고 나는 믿는다."

시인이 이런 말을 해주니, 앞으로 시 읽기가 더 편하고 즐거워질 것 같다. 적어도 최영미 시인의 시집만이라도.

그래서 앞서 나와 별로 교감을 나누지 못했다고 말했던 그녀의 시집들을 다시 펼쳐보고 싶어졌다.

검은 교복을 입고 글자들을 먹어치우던 그 시절의 그녀처럼 내가 시에 빠져드는 날은 없을지 모르지만,

내가 좋아하는 시 한두 편이라도 늘 마음에 담고 소리내어 읊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시집을 통해 시가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는 언제나 이렇게 아름다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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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기행
후지와라 신야 지음, 김욱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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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후지와라 신야.

<인도방랑>, <동양기행> 등 책 제목과 함께 익숙한 이름의 저자이지만, 그의 책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의 책이 꾸준히 번역 출간되는 걸 보니 분명 사람을 끌어당기는 어떤 매력이 담긴 글을 쓰는 사람이겠구나 생각했는데,

(단 한 권만 읽고 단정 짓기는 무리일지도 모르나) 역시 그의 책은 일반 여행서와는 확연히 다른 글을 싣고 있었다.

저자의 후기에도 이 책의 성격을 보여주는 대목이 실려 있다.

 

  글을 마치고 쓴 후기가 약간 고찰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는데 이 책의 내용 또한 여행기치고는 그런 대목이 많다.

  미국에서 미국인이 일상으로 영위하는 평범한 생활부터 접하려고 애썼다. 늘 그렇듯이 내가 선택하는 방법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여행을 통해 과거에 동양을 여행할 때처럼, 지구의 또 다른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었다. _ 저자 후기에서

 

이 책은 '여행기치고는' 미국과 미국인에 대한 고찰이 매우 깊이 있게 담겨 있다.

미국에서 마주친 장면 장면을 통해 미국이란 나라의 습성에 대해 샅샅이 파헤치고 연구하는 글은 그저 놀랍기만 했다.

'늘 그렇듯이 내가 선택하는 방법'이라 했으니, 아마 저자의 다른 여행서들도 다 이런 스타일인가 보다.

그렇다면 나는 그의 책들을 모조리 찾아 읽어보리라 마음 먹을 수밖에!

 

아메리카의 미키마우스가 가지고 있는 의미, 피부 색깔로 인해 까닭없이 받아야 하는 멸시와 조롱, 맥도널드 종업원이 모두 백인과 흑인뿐인 이유(아시아계, 히스패닉계 사람을 적어도 저자가 방문한 50여개의 맥도널드 매장에서는 보지 못했다 한다), 미국인의 연설에 반드시 유머가 들어가는 까닭, 연예인의 행차를 위해 교통통제가 가능한 나라 미국, 없는 게 없는 뉴욕이지만 그런 뉴욕의 거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 가지, 미국 요리가 맛이 없는 이유, 미국인들이 과잉 표현-원더풀, 뷰티풀, 그레이트, 판타스틱, 다이너마이트-을 하는 까닭……

 

보통 여행기를 통해 얻게 되는 것은 어느 지역의 어느 풍경이 아름답고 음식은 어떤 것이 맛있으며 등의 정보이거나, 혹은 저자의 감정에 이입되어 풍부한 감성의 세계로 떠나 맛보는 설렘과 두근거림 등인데, 이 책에서는 다른 여행기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내용들을 만났다. 그야말로 원더풀, 뷰티풀, 그레이트, 판타스틱, 다이너마이트였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그저 화려하고 눈부신 미국의 도시들과, 낯선 이에게 "헬로!" 인사하는 미국인들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돌아오는 미국 여행이지만, 저자는 한 순간도 날카롭고 예리한 눈빛을 느슨히 하지 않으며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분석해 미국이라는 나라의 면모를 들여다본다. 물론 저자의 분석과 연구가 모두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르겠으나, 덕분에 무척 다양한 각도에서 미국을 바라볼 수 있었다. 정말이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 현미경을 들여대는 행위가, 후지와라 신야의 '아메리카 기행'이었다는 생각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그 동안 생각해보지 않았던 혹은 몰랐던 혹은 무관심했던 미국의 수많은 얼굴을 만나볼 수 있었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나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많지 않은 외국 체류 경험 동안 나는 '인종 차별'을 느껴본 적이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거의 없었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황인종으로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살기에는 어쩐지 무서운 생각이 든다.

"코크 앤드 햄버거."라는 말은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인상을 쓰며 계속 "파든?"이라고 하더니 "아프리카에서 어저께 온 거야, 당신?"이라는 말은 단번에 알아듣고 "shit"이라고 중얼거리는 종업원이 있는, 백인들만 가득한 '세상에서 제일 이상한 맥도널드' 이야기는 그 어떤 공포 소설 못지 않은 공포감을 내게 주었다. 이 외에도 저자가 이유없이 멸시가 담긴 눈빛을 받는 장면들이 등장할 때마다 나는 움찔움찔.

이 책에서 수많은 모습의 미국을 만났지만, '피부색'에 관한 이야기가 유독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아마도 '남 이야기'가 아니어서 그랬을테지. 꽤나 공포스럽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도 마무리는 따뜻하게.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구절은 '오늘 아침, 미소만큼의 사랑을 받았다면'이라는 제목에 실린 문장이었다. 이 글은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한 여인을 보며, 그녀가 자신이 아는 '거리의 피에로'가 아닐까 생각하다가, 어쩌면 누군가의 미소가 그녀를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내용이었다. 사실 이 글은 무척 슬퍼 눈물 방울을 떨구며 읽어야 했지만 다시금 미소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 모두, '미소만큼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면……

 


     
 
극장 맞은편의 패스트푸드점에 아침을 먹으러 가다가 몇 번 스친 적이 있다. 횡단보도에서 마주친 그녀에게 웃어보인 적도 있다. 그런 날이면 그녀는 아침부터 사랑의 조각을 받게 된 셈이다. 비장하리만큼 어지럽게 차려입은 그녀의 얼굴은 짙은 화장에도 불구하고 푸르스름하게 보였다. 하지만 이른 아침 전해지는 타자로부터의 시선, 그리고 미소는 그녀의 얼굴에 혈색이 감돌게 했다. 넋이 나간 눈매에 웃음을 띠고 부끄럼 타는 말투로 '굿모닝.'하고 인사를 던진다.  타인의 시선과 미소를 양식으로 살아가는 그녀에게 그것은 조촐한 아침식사였던 것이다.



나의 시선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구급차의 뒤를 좇는다.

만일 저 안에 그녀가 있다면.

그런 생각이 든다.

아니, 그녀가 아니더라도 오늘 아침 어느 거리에서 누군가로부터 한 조각 사랑을 받았다면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죽음을 연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살아가는 데 있어 사랑이 가장 소중한 양식이라는 것을

이 메마른 거리를 살다 보면 절실하게 느낀다. (13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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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배케이션
김경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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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익스피어 배케이션 Shakespeare Vacation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공직자들에게 3년에 한 번 꼴로 한 달 남짓의 유급 독서휴가를 주었던 데에서 비롯된 말이다.

조선의 세종 임금이 젊은 선비들에게 긴 휴가를 주어 집에서 편안하게 책을 읽게 했다는 사가독서와도 의미가 통한다.

 

 

올 여름 '북캉스'가 인기라는 뉴스를 본 기억이 난다. 전국 곳곳,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몰려든 듯한 북적북적한 관광지 대신 집에서 책을 읽으며 보내는 시원한 휴가라니, 사람 많은 곳 싫어하고 집에서 책 읽는 것 좋아하는 내게 딱 알맞는 휴가 스타일이다.

'셰익스피어 배케이션'이라는 용어를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아아아, 한 달 남짓의 유급 독서휴가라니! 오로지 이 유급 독서휴가만을 위해 빅토리와 여왕 시대로 돌아가 공직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 김경의 이력을 보니 과연 '셰익스피어 배케이션'이라는 말과 참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싶다. '휴가 때면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오히려 집에 들어앉아 완벽한 토플리스 차림이' 되어 '자연에 가까운 상태로 독서용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다는 그녀, 김경. 산으로 바다로 찾아 나가기 바쁜 휴가 기간에 오히려 집에서 자연에 가까운 상태로 독서를 즐긴다니 멋진 사람이다.

 

책 제목과 저자 소개를 보고 이 책은 책으로 떠나는 여행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저자가 휴가 기간에 읽은 책 내용을 가지고 파리도 갔다가, 리스본도 갔다가, 이탈리아도 갔다가, 그렇게 저자도 우리도 함께 '셰익스피어 배케이션'을 즐기는 책일 거라고 짐작했다.

내 예상과는 달리 이 책은 정말 여행서였다. 서른넷에 1년의 장기 휴가를 받고 그녀는 떠났다. 그 동안 책에서만 봐왔던 도시들로.

 

내 멋대로 한 짐작이 틀렸기 때문에, 그래서 진짜 떠나는 여행이었기 때문에, 나는 갑작스레 여행가방 꾸려 떠나는 여행자의 심정이 되어 부랴부랴 '토플리스' 차림이 되려던 마음에게 옷을 입히고 운동화 끈 질끈 묶고 그녀를 따라 나섰다.

그 이름을 들어본 적도 별로 많지 않은 몰타에서 시작하여,'살고 싶은 도시 1위' 포카라로 막을 내리는 이 여행길을 따라다니며 참 많은 도시들을 만났고, 참 많은 도시들에 반해버렸다.

 

그녀가 이탈리아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는 나도 그만 이탈리아를 사랑해버렸고, 사랑하는 사람과 꼭 한 번 다시 카프리에 가고 싶다고 말할 때는 나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카프리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으며, 리스본의 매일 반복되는 풍경이 소박하고 정겨워 눈물이 난다고 할 때는 가보지도 않은 리스본을 상상해보며 코끝이 찡해지고, 존 버거의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리스본에서 만나고 싶은 망자들을 떠올려봤다. 저자 인생의 가장 행복한 날들을 바르셀로나에서 보냈다는 글을 보며는 어쩐지 바르셀로나에 내 인생의 행복한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으며, 1년 간의 유럽 여행 중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은 곳은 부다페스트라는 말에 나도 조용히 부다페스트라고 발음해보며 언젠가 그 곳에 갈 수 있길 꿈꿨다.

 

참 행복한 여행이었다. 중간중간 책과 함께 하는 여행이었기에 더 그랬던 듯 하다.

여러 책들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그래서 바로 내 장바구니에 담겼던) 책은 존 버거의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이었다. 책 속에서 존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난다. "망자들은 죽으면 지상에 머물 곳을 선택할 수 있단다. 지상에 머물기로 하는 경우엔 언제나." 그래서 그 어머니가 선택한 도시는 리스본이었다. 존 버거가 '망자들의 특별한 정거장'이라고 명명했다는 도시 리스본. 망자들은 왜 리스본을 선택해 머물까? 그 도시에 가보지 않는 한은 그 명확한 대답을 얻을 수 없겠지. 그래서 더욱더 그 도시에 가보고 싶어졌다. 저자 김경이 "전혀 특별할 것 없는, 리스본의 언덕 마을에서 매일매일 반복되는 그 풍경은 너무도 소박하고 정겨워 눈물이 날 지경이다"라고 표현한 그 도시가 내 마음속 깊이 자리잡았다.

 

멋진 그녀 김경과 함께 한 여행은 행복했던 만큼 후유증도 컸다. "현실로는 충분치 않았다. 마법이 필요했다."

그렇다, 나에게도 마법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여행을 하고 누군가는 책을 읽는다."

그랬다, 김경은 여행을 했고, 나는 그녀의 여행을 읽었다. 언젠가는 내가 여행을 하고, 누군가가 내 여행을 읽을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마법을 기다리게 되었다. 수리수리마수리 이루어져라.

 



놀랍게도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정말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찾아왔다. 녹초가 된, 기진맥진 지쳐 뻗을 지경인, 곧 죽을 것처럼 헐떡이는 그 순간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 와중에도 나무가 울창한 숲의 어여쁜 야생화들에게, 쉼 없이 변화하며 흘러가는 구름에게, 함석지붕 위로 쏟아질 듯 빛나는 수많은 별들에게, 방울 소리를 울리며 지나가는 노새에게, 쏜살같이 떼지어 지나가며 내 앞길을 막는 산양들에게, 크고 맑고 깊었던 아이들의 눈망울에게, 허름한 숙소 창문을 통해 마주하는 안나푸르나에게 인사하며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_ 3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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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5 1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27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