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메리카 기행
후지와라 신야 지음, 김욱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후지와라 신야.
<인도방랑>, <동양기행> 등 책 제목과 함께 익숙한 이름의 저자이지만, 그의 책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의 책이 꾸준히 번역 출간되는 걸 보니 분명 사람을 끌어당기는 어떤 매력이 담긴 글을 쓰는 사람이겠구나 생각했는데,
(단 한 권만 읽고 단정 짓기는 무리일지도 모르나) 역시 그의 책은 일반 여행서와는 확연히 다른 글을 싣고 있었다.
저자의 후기에도 이 책의 성격을 보여주는 대목이 실려 있다.
글을 마치고 쓴 후기가 약간 고찰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는데 이 책의 내용 또한 여행기치고는 그런 대목이 많다.
미국에서 미국인이 일상으로 영위하는 평범한 생활부터 접하려고 애썼다. 늘 그렇듯이 내가 선택하는 방법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여행을 통해 과거에 동양을 여행할 때처럼, 지구의 또 다른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었다. _ 저자 후기에서
이 책은 '여행기치고는' 미국과 미국인에 대한 고찰이 매우 깊이 있게 담겨 있다.
미국에서 마주친 장면 장면을 통해 미국이란 나라의 습성에 대해 샅샅이 파헤치고 연구하는 글은 그저 놀랍기만 했다.
'늘 그렇듯이 내가 선택하는 방법'이라 했으니, 아마 저자의 다른 여행서들도 다 이런 스타일인가 보다.
그렇다면 나는 그의 책들을 모조리 찾아 읽어보리라 마음 먹을 수밖에!
아메리카의 미키마우스가 가지고 있는 의미, 피부 색깔로 인해 까닭없이 받아야 하는 멸시와 조롱, 맥도널드 종업원이 모두 백인과 흑인뿐인 이유(아시아계, 히스패닉계 사람을 적어도 저자가 방문한 50여개의 맥도널드 매장에서는 보지 못했다 한다), 미국인의 연설에 반드시 유머가 들어가는 까닭, 연예인의 행차를 위해 교통통제가 가능한 나라 미국, 없는 게 없는 뉴욕이지만 그런 뉴욕의 거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 가지, 미국 요리가 맛이 없는 이유, 미국인들이 과잉 표현-원더풀, 뷰티풀, 그레이트, 판타스틱, 다이너마이트-을 하는 까닭……
보통 여행기를 통해 얻게 되는 것은 어느 지역의 어느 풍경이 아름답고 음식은 어떤 것이 맛있으며 등의 정보이거나, 혹은 저자의 감정에 이입되어 풍부한 감성의 세계로 떠나 맛보는 설렘과 두근거림 등인데, 이 책에서는 다른 여행기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내용들을 만났다. 그야말로 원더풀, 뷰티풀, 그레이트, 판타스틱, 다이너마이트였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그저 화려하고 눈부신 미국의 도시들과, 낯선 이에게 "헬로!" 인사하는 미국인들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돌아오는 미국 여행이지만, 저자는 한 순간도 날카롭고 예리한 눈빛을 느슨히 하지 않으며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분석해 미국이라는 나라의 면모를 들여다본다. 물론 저자의 분석과 연구가 모두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르겠으나, 덕분에 무척 다양한 각도에서 미국을 바라볼 수 있었다. 정말이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 현미경을 들여대는 행위가, 후지와라 신야의 '아메리카 기행'이었다는 생각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그 동안 생각해보지 않았던 혹은 몰랐던 혹은 무관심했던 미국의 수많은 얼굴을 만나볼 수 있었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나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많지 않은 외국 체류 경험 동안 나는 '인종 차별'을 느껴본 적이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거의 없었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황인종으로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살기에는 어쩐지 무서운 생각이 든다.
"코크 앤드 햄버거."라는 말은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인상을 쓰며 계속 "파든?"이라고 하더니 "아프리카에서 어저께 온 거야, 당신?"이라는 말은 단번에 알아듣고 "shit"이라고 중얼거리는 종업원이 있는, 백인들만 가득한 '세상에서 제일 이상한 맥도널드' 이야기는 그 어떤 공포 소설 못지 않은 공포감을 내게 주었다. 이 외에도 저자가 이유없이 멸시가 담긴 눈빛을 받는 장면들이 등장할 때마다 나는 움찔움찔.
이 책에서 수많은 모습의 미국을 만났지만, '피부색'에 관한 이야기가 유독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아마도 '남 이야기'가 아니어서 그랬을테지. 꽤나 공포스럽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도 마무리는 따뜻하게.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구절은 '오늘 아침, 미소만큼의 사랑을 받았다면'이라는 제목에 실린 문장이었다. 이 글은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한 여인을 보며, 그녀가 자신이 아는 '거리의 피에로'가 아닐까 생각하다가, 어쩌면 누군가의 미소가 그녀를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내용이었다. 사실 이 글은 무척 슬퍼 눈물 방울을 떨구며 읽어야 했지만 다시금 미소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 모두, '미소만큼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면……
|
|
|
|
극장 맞은편의 패스트푸드점에 아침을 먹으러 가다가 몇 번 스친 적이 있다. 횡단보도에서 마주친 그녀에게 웃어보인 적도 있다. 그런 날이면 그녀는 아침부터 사랑의 조각을 받게 된 셈이다. 비장하리만큼 어지럽게 차려입은 그녀의 얼굴은 짙은 화장에도 불구하고 푸르스름하게 보였다. 하지만 이른 아침 전해지는 타자로부터의 시선, 그리고 미소는 그녀의 얼굴에 혈색이 감돌게 했다. 넋이 나간 눈매에 웃음을 띠고 부끄럼 타는 말투로 '굿모닝.'하고 인사를 던진다. 타인의 시선과 미소를 양식으로 살아가는 그녀에게 그것은 조촐한 아침식사였던 것이다.
…
나의 시선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구급차의 뒤를 좇는다.
만일 저 안에 그녀가 있다면.
그런 생각이 든다.
아니, 그녀가 아니더라도 오늘 아침 어느 거리에서 누군가로부터 한 조각 사랑을 받았다면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죽음을 연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살아가는 데 있어 사랑이 가장 소중한 양식이라는 것을
이 메마른 거리를 살다 보면 절실하게 느낀다. (132~1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