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들무렵
정양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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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정양 시인의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를 읽고 반해서, 지인에게 추천 받았던 이 시집도 구입했다.

마침 설을 앞두고, 우리나라 24절기를 시로 만나보게 되었다.

1년 동안 옆에 끼고, 달력에 입춘, 우수, 경칩, 춘분,…… 표시될 때마다 꺼내어 보고 싶은 시집이다.

 


하늘 아래

잃어버린 길 있고

저지르고 싶은 일 있고

돌이킬 수 없는 죄 있고

하늘 두 쪽 나도

감쪽같이 만날 사람 있고('칠석(七夕)' 전문)

 

칠월 칠석이 시로 그려지면 이런 것이다.

나는 이제 칠석이 되면 견우 직녀와 오작교와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더불어 이 시를 떠올리게 될테다.

그러면서 '하늘 두 쪽 나도 감쪽같이 만날 사람'은 어디 있는가 꿈속에서 찾아보기도 하겠지.

 

설, 추석 말고는 전통 명절이나 24절기 같은 거 거의 생각도 안 하고 지내는데(올해는 입춘도 며칠 지나서야 입춘 다 됐다던데? 라고 했다나),

이 시집 덕분에 24절기가 친숙하게 다가온다.

 


나를 위해서든 누굴 위해서든

아무 짓도 하지 말아야 세월이 옹골질 것 같다

봄날이 오든 가버리든 밤낮이 길든 짧든

내버려둬라 내비둬라 냅둬라 낯익은 말투로

시간이 나를 포기할 때까지 나도

세월을 포기하면서 뒨전거렸다('춘분(春分)' 부분)

 

이 시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구절이다.

춘분이 오면, 밤낮이 길든 짧든, 나도 냅둬라 냅둬라 하면서 세월을 포기하며 뒨전거리고 싶겠다.

나를 위해서든 누굴 위해서든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사는 게 조금 수월할 것 같다,는 생각은 여전하고.

 

참, 시집 제목이 철들 무렵인데,

그래서 시 '철들 무렵'을 읽고 보니, 이런 결론이 나왔다.

철들면 지는 거다!

 


떨어질 열매도 없는 아직도

푸른 잎 무성한 은행나무 밑에서

은행나무도 수컷은 철이 늦게 드나보다고

할머니가 혼잣말처럼 두런거립니다

철들면 그때부터는 볼 장 다 보는 거라고

못 들은 척하는 할아버지 대신

가을바람이 은행나무 푸른 잎새를

가만가만 흔들며 지나갑니다('철들 무렵'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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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좋아하는 창비시선 26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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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조용한 일' 전문)

 

이도 저도 손에 잡히지 않는 저녁에, 제목이 가만히 마음에 드는 시집 하나가 슬며시 곁에 다가왔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게, 시집이 말없이 그냥 읽혀준다.

 

그렇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시끄럽지 않고, 충고하지 않고, 섣불리 위로하지 않고 가만히 내 곁을 지켜 주는 이런 것이,

고맙다.

 

요즘은 계속 마음이 어수선해서 책도 손에 잡히질 않는데,

그런 내 곁을 지켜주고 있는 게 몇 권의 시집이다.

참 이상하다,

평소에 잘 읽지도 않던 시집이, 내 마음 끝간 데 없이 외롭고 처량맞을 때 내 곁을 지켜주다니.

마치 평소에는 있는지 없는지 존재감도 없다가, 내가 어려움을 당한 후에 살그머니 나타나 손을 내밀어 준 고마운 친구 같은 기분이랄까?

(에그, 그런 친구가 있을까?)

 

여튼,

요즘 내게는 더없이 고마운 존재들이다. 평소에 시집을 더 많이 구입해 두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될 정도로.

 


풀들이 시드렁거드렁 자랍니다

제 오래비 시누 올케에다

시어미 당숙 조카 생질 두루 어우러져

여름 한낮 한가합니다

 

봉숭아 채송화 분꽃에 양아욱

산나리 고추가 핍니다

언니 아우 함께 핍니다

 

암탉은 고질고질한 병아리 두엇 데리고

동네 한 바퀴 의젓합니다

 

나도 삐약거리는 내 새끼 하나하고 그 속에 앉아

어쩌다 비 개인 여름 한나절

시드렁거드렁 그것들 봅니다

긴 듯도 해서 긴 듯도 해서 눈이 십니다('여름날' 전문)

 

여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나이니까,

이런 시 한 편에 내 마음도 시드렁거드렁 밝아지고,

여름, 여름, 여름,

을 떠올리며 다시 힘을 낸다.

 

가만히 좋아하는,

그 계절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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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비밀편지 - 국왕의 고뇌와 통치의 기술 키워드 한국문화 2
안대회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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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몽도>, <세한도>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난 키워드 한국문화이다.

제목으로는 가장 흥미진진해서 제일 먼저 읽어보고 싶었는데, 막상 읽어본 소감은, 읽은 순서대로 재미있다는 느낌.

(구운몽도 > 세한도 > 정조의 비밀편지)

 

정조의 비밀편지란 정조가 대신 심환지에게 보낸 350여 통의 어찰을 이른다.

(어찰 : 임금이 쓴 편지, 어필 : 임금이 직접 쓴 글씨, 어제 : 임금이 직접 지은 글, 어제어필: 임금이 직접 지어 친필로 쓴 글)

평소에 문장 쓰기를 즐기긴 했던 정조이지만 심환지 한 사람에게 비밀리에 보낸 편지가 그렇게 많으며, 또한 정조가 없애 버리라고 했음에도 무슨 연유인지 그 편지들이 잘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어 이렇게 공개 되었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로웠다.

 

언제였던가,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에게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이메일을 보낸 적이 있었다.

소설가에게 편지를 쓰려니 무척 긴장된다며, 몇 마디 주절거린(줄 알았는데, 나중에 답메일에 함께 따라온 내가 보낸 메일을 보니 쓸데없는 글까지 덧붙여가며 무지 길게 쓴, 그래서 다시 생각 할 때마다 무지 민망한) 메일을 보냈는데, 그 소설가의 말이, 코미디언들이 집에 가서 코미디 하지 않듯, 소설가들도 이런 글은 편하게 쓰니 염려 말라고 했었다.

정조의 비밀편지를 보면 문득 그때의 그 이메일을 떠올린 것은, 한 나라의 왕도 사사로이 쓰는 편지에서는 '아니, 임금이 이런 표현을?' 싶은 표현까지 써가며 무척 편안하게 글을 쓴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소설가가 사적인 편지는 편하게 쓰듯이, 임금도 비밀편지에서는 근엄과 격식을 잠시 벗어 놓고 친근한 글쓰기를 하고 있는 모습에 인간미가 물씬 느껴졌다.

특히 요즘 우리가 쓰는 'ㅋㅋ'에 해당할 것 같은 '껄껄(呵呵)' 같은 표현을 즐겨 쓰던 임금이라니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물론 정조가 쓴 비밀편지가 모두 다 사사로운 안부 편지인 것은 아니고, 조정을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도 겉으로 내보인 것과 다른 속내를 편지에 적어 심환지에게 전하거나 편지를 통해 그가 이러저러하게 행동 해 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만약에 당시에 공개되었다면 상당히 곤란한 내용도 많았을 거라 생각된다. 그러니 정조가 꼭 없애라고 했을테지. 다행히도(?) 심환지가 정조의 명을 어기고 이 비밀편지들을 없애지 않은 덕에 정조의 인간적이고 솔직한 면모를 느낄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어주었다.(물론 그 외에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지겠지만.)

 

문장 쓰기를 즐겨한 왕.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이 담긴 편지를 즐겨 쓴 왕.

만약 정조가 왕이 아니었다면, 분명 한 시대를 풍미한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을 것 같다.

정조가 남긴 글들이 엮어진 책이 있다면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소식이 갑자기 끊겼는데 경은 그동안 자고 있었는가? 술에 취해 있었는가?

아니면 어디로 갔었기에 나를 까맣게 잊어버렸는가? 혹시 소식을 전하고 싶지 않아 그런 것인가?

나는 소식이 없어 아쉬웠다.

이렇게 사람을 보내 모과를 보내니 아름다운 옥으로 되돌려 받을 수 있겠는가?

                                                                   -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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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학적인 삶 - 2009 제9회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김언 외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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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읽은 책 중에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고 읽은 책이 두 권 읽는데,

그 중 하나는 교정지로 읽었던 문학평론집이었고(일이 아니었으면 도저히 끝까지 다 읽어내지 못 했을 거다)

다른 하나는 바로 이 시집이다(일이 아니었는데도 궁금해서 끝까지 다 읽었다, 이 시인만 어려운가 전부 다 어려운가. 결론은 전부 다).

 

시집 뒤에 실린 김언 인터뷰 '길을 잃는 즐거움'이란 글에 평론가 신형철의 이런 말이 인용되어 있었다.

"하루에 세 편 이상 읽을 경우 과열된 독자 머리가 폭발할 위험이 있"다고.

이 말은 비단 김언의 시 뿐 아니라, 이 시집에 실린 모든 시에 다 해당되는 듯 했다.

그래서 하룻밤에 이 시집을 다 읽은 후 내 머리에는 쥐가 1023마리 쯤 뛰어다니는 기분이었다.

이 머리에 난 쥐를 잡아줄 고양이를 풀어야 했지만, 도저히 뭘해야 할지 몰라 그냥 멍하니 누워 있다가 대만 드라마를 틀어 놓고 잠을 청했었다. 다행히 고양이의 효과가 좋아 금세 잠 속으로 빠져 들 수 있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시를 읽지 않았기에 나는 시도 이렇게 수상작품집이 있는 줄 몰랐다.

작년에서야 이런 책이 있다는 걸 알고 상을 받는 시는 어떤 시들일까 궁금해서 읽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 만나본 시 문학상 수상작품집이었는데,

아아, 정말이지 내게는 너무너무 어려웠다.

상을 받는 시, 라는 게 다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아니면 2009년만 이런 것인지가 궁금해서 아마 나는 또 이 수상작품집을 찾아 읽어볼 거 같다. 그래도 정녕 다 어렵다면, 앞으로 시집은 상 받았다고 하면 보지 않을지도.

 

이 책을 통틀어, 무슨 말을 하는지 마음속에 그림이 그려진다 싶은 시는

아이티 지진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을 진흙 쿠키 이야기를 담은 김신용의 '진흙 쿠키'를 포함하여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시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내 감수성의 문제인 것인지, 아니면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이 정말 어려운 것인지,

여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시들 앞에서 나는 슬펐다.

 


슬플 때 나를 위로하는 건 내 몸이 먼저다

미열이 그 식구이다

섭씨 39도의 편두통은 지금 염료를 섞고 있다

내 발열은 치자꽃대궁 같은 것

치자꽃 노란색 열매는 종일 위염을 생각하고 있다

햇빛의 양철 지붕에 세운 내 미열 학교에서

아픈 위도 명치에서 질문한다

붉은색이 얼마나 필요하냐고

쓰라린 위를 향한 몸의 집착은

슬픔의 입성을 꿰차는 것이다

식구 없는 슬픔도 참조하도록!

자꾸 속삭이는 적나라한 열꽃.

자꾸 넘치는 치자꽃물의 강우량에 물드는 쪽으로

미열은 운동한다

어깨도 등도 치자꽃 가득핀

슬픔역의 악보여(송재학, '슬픔의 식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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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 시인선 346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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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을 알게 된 건, 작년에 한 신문에서 작가들이 이어 받기 형식으로 책을 추천하던 글을 통해서였다.

이 시집을 추천한 사람은, 내 기억에 의하면 소설가 김중혁이었다.

당시 그가 이 시집을 추천하며 어떤 말을 남겼는지는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제목이 무척 마음에 들어 바로 구입했던 이 시집은 내 책장에 잘 꽂혀 있었다.

시집을 구입하고 한두 번 펼쳐서 읽다가 몇 장 못 읽고 꽂아두었는데, 이번에 다시 꺼내 읽었다.

 

글쎄, 잘 모르겠다. 내게는 좀 어렵게 느껴진 시집이었다.(바로 이어서 읽은 2009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과 비교하자면 이 시집은 그렇게 어려운 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시집을 읽는 데도 취향이 있다는 것을 이제서야 느낀다.(하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시를 한 편도 읽지 않았으니 '취향' 같은 거 알 리도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 취향에 맞는 시집은, (내 기준으로) 어렵지 않은 시들이 담긴 시집,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와 감정들이 편안하고 따뜻하게 담겨 있는 시집,

이 시구가 무엇을 의미하는 거지? 굳이 애써 생각해보지 않아도 금방 가슴에 와 닿는 시집,을 나는 좋아한다.

 

그런 면에서 이 시집은 '내 취향'의 시집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멀리하고 싶은 시집은 아니었다.

아니, 어렵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어딘가가 끌리는 시집이었다.

특히 소리내어 읽을 때, 이 시집의 맛은 두 배 쯤, 아니 세 배, 네 배 더 강렬해졌다.

이 시집의 많은 시들을 나는 소리내어 읽었다.

눈으로만 보는 시와 입술을 통해 소리로 나와 다시 귀로 들어가는 시는, 느낌이 참 다르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앞으로도 종종 꺼내어 입술로, 귀로 읽어야겠다.


스스로를 견딜 수 없다는 것만큼

견딜 수 없는 일이 있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전락했고

이 순간에도 한없이 전락하고 있다

길 잃은 고양이들이 털을 곤두세우고 쏘다니는

호의가 아무렇지도 않게 흉조로 해석되는

이 복잡하고 냉혹한 거리에서('전락'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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