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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좋아하는 ㅣ 창비시선 26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06년 4월
평점 :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조용한 일' 전문)
이도 저도 손에 잡히지 않는 저녁에, 제목이 가만히 마음에 드는 시집 하나가 슬며시 곁에 다가왔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게, 시집이 말없이 그냥 읽혀준다.
그렇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시끄럽지 않고, 충고하지 않고, 섣불리 위로하지 않고 가만히 내 곁을 지켜 주는 이런 것이,
고맙다.
요즘은 계속 마음이 어수선해서 책도 손에 잡히질 않는데,
그런 내 곁을 지켜주고 있는 게 몇 권의 시집이다.
참 이상하다,
평소에 잘 읽지도 않던 시집이, 내 마음 끝간 데 없이 외롭고 처량맞을 때 내 곁을 지켜주다니.
마치 평소에는 있는지 없는지 존재감도 없다가, 내가 어려움을 당한 후에 살그머니 나타나 손을 내밀어 준 고마운 친구 같은 기분이랄까?
(에그, 그런 친구가 있을까?)
여튼,
요즘 내게는 더없이 고마운 존재들이다. 평소에 시집을 더 많이 구입해 두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될 정도로.
풀들이 시드렁거드렁 자랍니다
제 오래비 시누 올케에다
시어미 당숙 조카 생질 두루 어우러져
여름 한낮 한가합니다
봉숭아 채송화 분꽃에 양아욱
산나리 고추가 핍니다
언니 아우 함께 핍니다
암탉은 고질고질한 병아리 두엇 데리고
동네 한 바퀴 의젓합니다
나도 삐약거리는 내 새끼 하나하고 그 속에 앉아
어쩌다 비 개인 여름 한나절
시드렁거드렁 그것들 봅니다
긴 듯도 해서 긴 듯도 해서 눈이 십니다('여름날' 전문)
여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나이니까,
이런 시 한 편에 내 마음도 시드렁거드렁 밝아지고,
여름, 여름, 여름,
을 떠올리며 다시 힘을 낸다.
가만히 좋아하는,
그 계절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