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다 햄버튼의 겨울 - 제15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김유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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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1월은 (평소에 장기간 백수로 지내는) 내게 무척이나 바빠 정말 숨 돌릴 틈 없었던 시간으로 기억되어 있다. 그 기간만 떠올리면 골이 띵할 정도로.(남들은, 다들 그렇게 바쁘게 일하며 사는 건데...)

그때 정신없이 바쁘던 일을 마감하고 나서, 무언가 경쾌하고 산뜻한 책이 읽고 싶어 골라 들었던 책이다. 11월에는, 정말이지 책 읽을 틈도 없어, 오랜만에 읽는 책이기도 했고, 일 하느라 지친 머리를 가볍게 회복하게 해줄 책이 필요했기에. 그런 면에서는 꽤나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때의 내가 딱 필요로 한, 그만큼의 경쾌함과 그만큼의 산뜻함과 그만큼의 가벼움이 있었다.('가벼움'이라는 건 문장의 깊이나 필력을 말하는 게 아니라, 쉽게 잘 읽혔다는 의미다.)

 

제목에서는 짐작도 가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다. (그렇지, '사라다 햄버튼'을 보고 과연 누가 그 이야기를 짐작할 수 있을까. 다만, '배경이 겨울일까?' 정도 짐작했을 뿐. 아, 그래서 배경이 겨울이었나? 잘 기억이 안 나네... 워낙 지친 머리로 읽었던 탓,으로 돌리자.)

'사라다 햄버튼'은 고양이 이름이었다. 주인공의 집에 느닷없이 찾아와 동거하게 된 한 마리 고양이. (동물이 등장하는 소설에는 일단 마음이 좀 더 녹고 본다.) 고양이, 그러니까 사라다 햄버튼의 등장은 그냥 단순히, '길냥이를 집에 데려다 키웠다'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이야기와 사연을 주인공에게 제공해주게 된다. 우연히 내 집에 찾아든 줄 알았던 고양이, 알고 보니 우연이 아닌 운명이었던 걸까?

 

사라다 햄버튼을 둘러싸고 풀려가는 이야기의 실타래와, 캐나다에서 잠시 귀국해 함께 살게된 새아버지와의 서먹하지만 뭔지 모를 끈끈한 정이 흐르는 부자관계, 그리고 주인공 뿐 아니라 독자도 궁금하게 만드는 친아버지의 존재, 떠나버린 여자친구의 빈자리를 채워줄 것으로 기대되는 새로운 여인과의 관계, 고양이 탐정의 등장 등이 이야기의 완급을 조절하며 재미나게 흘러갔다. 내 지친 머리를 살곰살곰 잘 달래준 책. 만족스러웠던 선택~!

 

 

_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김춘수의 시처럼, 녀석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녀석은 단지 잘생긴 도둑고양이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사라다 햄버튼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을 때 비로소 녀석은 내 곁에 머물러 있는 유일한 가족이 되었다. (14)

 

_ 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정리해 나열하라고 하면 난 아마 열 줄도 못 채울 것 같다. 어머니에 대해서 역시 스무 줄을 채우기 어려웠을 것이다. 좋아하는 음식과 음악, 영화, 징그러워하는 동물이나 듣기 싫어하는 단어나 문장 혹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물건 같은 것들 말이다.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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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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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은 김영하 작가의 책이다.

'오랜만'이라고 하니 예전에는 꽤나 읽었는가 싶은데, 그건 또 아니라 김영하 작가의 책을 읽은 게 몇 권 되지는 않는다.

주변에 김영하 작가의 책을 꽤 좋아하고 많이 읽은 지인들은 이 책을 두고 '김영하답지 않은 책'이라고 했다. 조금쯤 아쉽다는 표정으로.

나야 뭐, 김영하 작가의 책을 많이 읽지 않아 '김영하다움'이 뭔지 모르고 내 안에 작가의 글에 대한 어떤 기준이나 기대가 없기에, 나는 무난히 읽은 편이다.

(그러고 보니 '김영하답다'는 건 어떤 것인지 궁금해지네, 라고 쓰는데 노트북 옆에 놓인 김영하 컬렉션이 눈에 들어온다. 아아, 이렇게 책을 세트로 모셔 두고도 읽지 않아 이런 소릴 하고 있다니, 올해는 요 책들을 다 읽어줘야겠다, 다짐!)

 

어쨌거나, 나는 이 책에 실려 있는 혁신적인 (분량의) 단편도 마음에 들었고, 내 마음이 그대로 담긴 듯한 문장에 가슴이 콩콩거린 단편도 마음에 들었고,

(그러니 책을 읽은 지 두 계절이 지난 지금에라도 굳이 리뷰를 남기겠다고 이렇게 몇 자 끼적이고 있는 것이고...흠흠) 괜찮게 읽었다.

 

내가 가장 맘에 들어했다는, 혁신적인 (분량의) 단편은 소설 전체 길이가 총 한 페이지에도 달하지 않는 「명예살인」이고, 내 마음이 그대로 담긴 듯한 문장에 가슴이 콩콩거린 단편은 「마코토」이다. 일테면, 「마코토」 중의 이런 대목.

 

나는 이른바 짝사랑 전문가였고 그쪽 분야에만 오래 전념해오다보니 다른 분야는 아예 자신도, 관심도 없게 되었다. 짝사랑만의 도저한 쾌감이랄까, 뭐 그런 것에 중독되다보니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짝사랑만 가능한 대상을 물색하여 거기에 전념하게 되었다. 아이돌 댄스그룹 멤버에게 몰두하거나 내 평생 영원히 만나게 될 것 같지 않은 대만 텔레비전 드라마의 남자 배우를 남몰래 흠모했다. 그러다가 문득 달력을 보니 어느새 나는 서른이 되어 있었다. 거울 속의 저 아줌마는 과연 누굴까? (130)

 

정말이지 이 부분은, 어느 문장을 읽더라도 내 얘기가 분명했다! (그렇다고 김영하 작가가 내 얘기를 썼다고 우기려는 것은 당연히 절대 아니다. 우린 서로를 모르잖아요~!) '짝사랑만의 도저한 쾌감'이란 알 사람만 아는 것. 그러니 떠오르는 노래가 있는데,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에 보면 이런 가사가 나온다. '나는 그 사람 갖고 싶지 않아요. 욕심 나지 않아요. 그냥 사랑하고 싶어요.' 이게 바로 짝사랑의 대가들의 마음이랄까? 상대를 갖고 싶고 연애하고 싶다기보단, 그냥, 사랑하고 싶은 마음. 상대가 알든 모르든. 대부분은 상대는 모르지. 그래서 나도 처음부터 끝까지 짝사랑만 가능한 대상을 물색하여 빠져든 적도 여러 번이었는데, 그래서 좋아한 아이돌 댄스그룹 멤버는 H.O.T.의 이재원이었고, 대만 텔레비전 드라마의 남자 배우는 나지상(羅志祥)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달력을 보니 어느새 나는 서른도 넘어 있고 말이지. 거울 속 아줌마 보기 싫어서 거울도 안 본 지 오래다.

 

책을 읽은 지 오래 지나 워낙 인상적이었던 이 두 편의 글을 빼고는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그래도 '김영하다움'이란 걸 내 안에 가지고 있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 김영하 작가의 책을 좋아하는 지인들처럼 아쉬운 표정으로 책장을 덮는 일은 결코 없었으니까! 다른 책들을 다 읽고 나서 이 책을 다시 읽어보면 기존의 책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보일까? 나중에, 내 옆의 컬렉션들 다 읽은 후에 그 느낌 비교해봐야지.

 

_ 인간은 어떤 순간 완벽하게 다른 존재일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정말 인간은 삶의 전 순간을 오직 인간으로만 사는 것일까요? 그러니까 제 말은, 개나 돼지, 새나 물고기인 그 어떤 순간, 그것을 부인하기 어려울 때가 간혹은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87)

 

_ 너무 평화롭고 좋아서, 어쩐지 그 시간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인생에서 몰래 빌려온 것만 같은,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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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와 클라라
필립 라브로 지음, 박선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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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는 (동네 근처, 동네 멀리 그 어디에도) 호수가 없기에, 내 소원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햇볕 따스한 날 호숫가 벤치에 앉아 책 읽기!

만약 호숫가에 앉아 책을 읽을 기회가 다가온다면, 무슨 책을 가져가서 읽어야 하지?

내가 호숫가로 이사간 것이 아니라 어쩌다 주어진 기회라면, 나는 아주 기억에 남을 책을 가져가야 한다.

소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인데, '흰 건 종이, 검은 건 글씨더라' 하는 책과 보내버리면 아주 낭패일 테니까.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내가 최고로 꼽는 책을 가져가야지,까지 생각해보기도 했는데(기회는 언제 올지 모르니, 구체적으로 계획해 놓는 게 좋겠다!)

만약, 지금 내게 '호숫가에서 책 읽기' 찬스가 주어진다면, 나는 이 책을 들고갈 것이다. 『프란츠와 클라라』.

그래, 이 책은, 호숫가에서 읽으면 더욱 좋겠다.

 

기왕이면 '봄이 시작되는 아름다운 오후'였으면 좋겠고, '그곳에 앉을 때 보이지 않는 문을 열고 마음속 독방으로 들어가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그런 벤치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책을 읽고 있을 때, 내가 앉은 반대편 끝으로는, 그가, 살며시 앉아준다면 좋겠다. 클라라의 벤치에 프란츠가 찾아와 앉은 것처럼. 뭐, 그래서 그와 사랑에 빠지고 싶다느니 하고 바란다면 너무 앞서 나간 것이고, 지나치게 사심 가득한 '호수에서 책 읽기' 설정이 되겠으므로, 일단 거기까지는 워워.

 

"솔직히 우린 같이 시간을 보냈다고 할 수 없어. 어제 이 벤치에서 한 시간, 겨우 한 시간뿐이었는걸."

"그 정도면 충분히 추측할 수 있어요."

확신에 찬 말투가 거슬렸다. 누구든 이처럼 거만하면서도 가식적이지 않고 침착하며 주저함 없이 부드럽게 말하는 아이를 보면 면박을 주고 싶으리라.

"그렇다면, 내게서 뭘 추측했는데?"

"불편한 듯 걷는 모습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어요. 뭔가를 떨쳐버리고 싶어하는 것 같았어요." (32~33)

 

행복하지 않은 모습으로 걸음을 옮겨 호숫가 벤치로 와 사색에  잠기는 클라라는, 프란츠의 추측 그대로였다.

사랑에 상처 입었다. 산산히 부서진 심장의 파편이 온몸의 혈관을 타고 돌아 너무나 아픈 나날이었다. 그런 날이 이어지던 가운데, 당돌한 소년 프란츠가 나타났다.

어딘가 평범하지 않아보이는 열두 살 소년 프란츠가 상처 입은 스무 살 여인 클라라를 위로하고 조언을 들려주는 모습은 정말이지 어딘가 맹랑해보이기도 하지만, 역시 나이란 숫자에 불과한 것인가, 일찍 세상을 깨달아버린 소년의 깊이 있는 마음 씀씀이와 어른 못지 않은, 아니 어른보다 뛰어난 논리와 사유는, 결코 '아이'라고 얕잡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당돌한 소년은 심지어 자신보다 여덟 살이나 많은 스무 살 여인에게 사랑을 느끼게까지 되는데...

 

"이렇게 웃어본 지가 그때…… 그러니까,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봐요. 울고 있네요. 눈물이 날 만큼 웃었어요."

"이런 건 처음이야. 그때…… 이후론."

"그 표현은 이제 잊어버리기로 해요. 상처 입은 마음, 상처 입은 마음. 됐어요. 이젠 됐어요. 당신의 마음은 이젠 상처 입지 않았어요. 당신도 잘 알잖아요. 이렇게 웃을 수 있고요." (81~82)

 

클라라의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해주고 눈물이 날 만큼 웃게 해준 소년 프란츠.

정작 무언가 사연이 있어보이는 자신의 이야기는 한 번도 털어놓지 않고 늘 서둘러 다리를 건너가며 손을 흔들던 프란츠. 소년의 이야기를 알고 나니, 프란츠가 어째서 아이 같지 않고 그토록 내면이 다져질 수밖에 없었는가 알 것 같으면서, 이 어린 소년의 머리를 따스히 쓰다듬어 주고, 꼭 껴안아 다독여 주고 싶어졌다. 정작,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클라라가 아닌 프란츠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프란츠는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을 위로하는 법을 터득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절실했던 것을 타인에게 준 것인지도...

 

처음에는 아직 미성년(일 뿐만 아니라 '꼬맹이'라 불러도 될 것 같은 아이)과 성인의 사랑 이야기라니, 유치하거나, 말도 안 되거나, 아무튼, 그 이야기에 빠져들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웬걸, 정말이지 호숫가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잔잔하면서도 빛나는 노을 같은 이야기를 만났다.

마음속으로 둘의 사랑을 응원했다...

살금살금 봄날 꽃밭의 나비를  잡으러 다가가다 살랑, 날아가버리는 나비를 바라보는 것 같은 마지막 페이지(185)가, 오래오래 내 마음에 남았다.

나비는 날아가 버렸어도, 나비가 앉았던 꽃밭은 여전히 향기롭고 아름다우리니, 나비 날아간 보이지 않는 선은, 언젠가 다시 나비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해줄지니...

 

십 년 전 '불가능'했던 것이 오늘은 가능했다. 나는 감히 장담한다. 그들은 사랑을 나눌 거라고.

그러지 않는다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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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쁨 - 문정희 시선집 시월 활판인쇄 시선집
문정희 지음 / 시월(十月)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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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사랑을 주제로 한 시 100편을 모았다.

몇 해 전에 나온 같은 주제의 시선집에다 최근 발표한 몇 작품을 첨가했다.

그동안 나의 시를 사랑해 주신 분들께 좋은 선물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 수명이 몇 백년도 더 된다는 견고하고 우아한 한지에 청홍의 장정을 한 이 수공예 시집을 만드는 동안 참 행복했다.

_ 책머리에

 

 

참으로 특별한 시집을 선물받았다.

시월출판사에서 납활자인쇄 출판문화를 부활하고자 현재 활동중인 문인의 자선 작품을 단행본으로 소량 인쇄, 발행하고 있는데 그 중 한 권인 문정희 시선집을 만나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모두 스무 여권이 출간되었다 한다.

문정희 시인이 책머리에 이른 것처럼 '견고하고 우아한 한지에 청홍의 장정을 한' 시집은 그 외모로도 참 멋스럽고 우아하지만, 이 안에 실린 글자들이 한 자 한 자 활판으로 찍힌 것이라 하니 그 글자들을 보는 마음이 얼마나 신기하고 특별한지 모르겠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 중, 활판으로 된 책은 이 시선집이 유일하다.

거기에 책 속지에는 문정희 시인의 곱고 단아한 글씨로 내 이름 직접 넣은 서명까지 되어 있어 더더욱 특별하고 소중한 책이 되었다.

 

시집을 많이 읽어보지 못한지라 문정희 시인의 시집으로서도 처음 만나보는 것인데, 사랑을 노래한 시 100편과의 만남, 정말 잊지 못할 시간이었다.

워낙 특별 장정인지라 선뜻 밑줄을 긋거나 혹여 종이 상할세라 접착메모지도 붙이지 못하고 곱게곱게 읽기만 했는데, 마음속으로 갈무리해둔 시들이 어찌나 많았는지!

사실 이 시집을 펼치던 밤은 가만히 앉아 있는데 느닷없이 눈물이 뚝뚝,이라는 표현으로도 모자라게 줄줄 흐르던 그런 밤이었다. 앉아도, 누워도, 그야말로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어쩌지 못하고 (그래도 밤마다 늘 읽던 습관대로) 이 시선집을 손에 잡았는데, 내 눈이야 울던 말던, 시 한 편 한 편 참으로 아름답고 환희에 가득 차더란 말이지...

 

이 시집을 다 읽을 때쯤에는 흐르던 눈물이 멈췄던가 어쨌던가,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게 지난 9월 끝자락의 일이었으니까...

그때는 어떤 이유로 울었건 말건, 지나고 보면 얼마나 울었는지 생각도 잘 안 날 정도로, 모든 것은 잔잔해지기 마련이라는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닫는다.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 흙 흙 하고 그를 불러보라

심장 저 깊은 곳으로부터

눈물 냄새가 차오르고

이내 두 눈이 젖어온다

 

(……)

 

그래도 나는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 흙 흙 하고 그를 불러보면

눈물샘 저 깊은 곳으로부터

슬프고 아름다운 목숨의 메아리가 들려온다

하늘이 우물을 파놓고 두레박으로 자신을 퍼 올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_ '흙' 부분

 

 

정갈하게 새겨진 글자를 한 자 한 자, 시인이 들려주는 사랑의 언어를 한 구절 한 구절, 눈으로, 마음으로, 손끝으로, 코끝으로 읽었던 행복한 시간.

(활판이 신기해서 자꾸 손끝으로 글자를 더듬어 그 느낌을 느껴보고, 시집에 코끝 바짝 들이대 한지 냄새도 맡아보고 그랬다.)

비록 문정희 시인과의 첫만남이 많이 늦긴 했지만, 앞으로 그의 시들을 꾸준히 만나며 가슴을 촉촉하게 적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

 

 

누군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는다

 

창에는 하늘 아래

가장 눈부신 유리가 끼워 있어

 

천도의 불로 꿈을 태우고

만도의 뜨거움으로 영혼을 살라 만든

유리가 끼워 있어

 

솔바람보다도 창창하고

종소리보다도 은은한

노래가 떠오른다

 

온몸으로 받아들이되

자신을 그림자조차 드러내지 않는

오래도록 못 잊을

사랑 하나 살고 있다

 

누군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아서

 

맑고 투명한 햇살에

그리움을 말린다 _ '유리창을 닦으며' 전문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_ '겨울 사랑'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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뺨에 서쪽을 빛내다 창비시선 317
장석남 지음 / 창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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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 장석남 시인의 새 시집 출간 기념으로 낭독회가 열렸었다.

시인의 음성으로 직접 듣는 시,가 탐이나 낭독회에 가고 싶었으나, 시인의 시집을 제대로 읽어본 게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래 책장에 꽂혀 있던 시인의 시집을 한 권 빼들었는데, 그 밤이 하얗게 새버리는 거였다.

바로 온라인 서점에 접속해 신간과 구간을 모두 구입해 여러날 동안 시인의 시와 진한 연애를 했다.

뺨을 서쪽에 빛내기도 하고, 왼쪽 가슴 아래께에 통증을 느끼기도 하고, 젖은 눈을 들어 먼 허공을 보기도 하고, 어디로 가는지 모를 미소를 머금어보기도 하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은 밤을 보내보기도 하며 지새운 많은 밤들...(아직 새떼들과 함께 망명하지는 못했다.)

 

  나의 가슴이 요정도로만 떨려서는 아무것도 흔들 수 없지만 저렇게 멀리 있는, 저녁빛 받는 연(蓮)잎이라든가 어둠에 박혀오는 별이라든가 하는 건 떨게 할 수 있으니 내려가는 물소리를 붙잡고서 같이 집이나 한 채 짓자고 앉아 있는 밤입니다 떨림 속에 집이 한 채 앉으면 시라고 해야 할지 사원이라 해야 할지 꽃이라 해야 할지 아님 당신이라 해야 할지 여전히 앉아 있을 뿐입니다

  나의 가슴이 이렇게 떨리지만 떨게 할 수 있는 것은 멀고 멀군요 이 떨림이 멈추기 전에 그 속에 집을 한 채 앉히는 일이 내 평생의 일인 줄 누가 알까요. _ '오막살이 집 한 채' 전문

 

시인의 시를 읽으며 마음속에 오막살이 집 한 채 짓고 시구들과 함께 가슴을 떨었다. 실은, 이렇게 떨리는 가슴으로 떨게 만들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지만. 역시 멀고 먼 곳에. 그 떨림이 멈추기 전에 그 속에 집을 한 채 앉히는 일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시들을 읽으며 자꾸자꾸 떠올리던, 계속계속 삼천포로 빠졌던, 그 얼굴은 아직도 마음속에서 떠나질 않네.

 

지난 가을의 추억을 무심히 떠올리기에는, 왠지 딴청 피우고 싶은 밤이다. 시나 읽어야지!

 

 

하루를 탕진하고

별을 본다

후후 불면 숯불처럼 살아나거라

피리를 불랴? 살아나거라

 

한 두엇 천년이나 지났을까? 손톱 한번 깎고 나니

어느덧 숨 끝에 까무룩이 돋아나와 손등에 앉는

하늘의 문자들

 

北쪽 하늘 별 옮겨앉듯 들들들 읽어나가는데

하는 수 없이 껴안을 전율도 있어

또 한번 사랑을 탕진한다

 

숯처럼 앉아

별을 본다

피리를 불랴?

숨은 하늘 _ '北쪽 하늘 별 옮겨앉듯' 전문

 

  이제 모든 청춘은 지나갔습니다 덥고 비린 사랑놀이도 풀숲처럼 말라 주저앉았습니다 세상을 굽어보고자 한 꿈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안 것도 겨우 엊그제 저물녘, 엄지만한 새가 담장에 앉았다 몸을 피해 가시나무 가지 사이로 총총히 숨어들어가는 것을 보고 난 뒤였습니다.

  세상을 저승처럼 둘러보던 새 이마와 가슴을 꽃같이 환히 밝히고서 몇줄의 시를 적고 외워보다가 부끄러워 다시 어둠속으로 숨는 어느 저녁이 올 것입니다. _ '11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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