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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와 클라라
필립 라브로 지음, 박선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우리 동네에는 (동네 근처, 동네 멀리 그 어디에도) 호수가 없기에, 내 소원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햇볕 따스한 날 호숫가 벤치에 앉아 책 읽기!
만약 호숫가에 앉아 책을 읽을 기회가 다가온다면, 무슨 책을 가져가서 읽어야 하지?
내가 호숫가로 이사간 것이 아니라 어쩌다 주어진 기회라면, 나는 아주 기억에 남을 책을 가져가야 한다.
소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인데, '흰 건 종이, 검은 건 글씨더라' 하는 책과 보내버리면 아주 낭패일 테니까.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내가 최고로 꼽는 책을 가져가야지,까지 생각해보기도 했는데(기회는 언제 올지 모르니, 구체적으로 계획해 놓는 게 좋겠다!)
만약, 지금 내게 '호숫가에서 책 읽기' 찬스가 주어진다면, 나는 이 책을 들고갈 것이다. 『프란츠와 클라라』.
그래, 이 책은, 호숫가에서 읽으면 더욱 좋겠다.
기왕이면 '봄이 시작되는 아름다운 오후'였으면 좋겠고, '그곳에 앉을 때 보이지 않는 문을 열고 마음속 독방으로 들어가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그런 벤치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책을 읽고 있을 때, 내가 앉은 반대편 끝으로는, 그가, 살며시 앉아준다면 좋겠다. 클라라의 벤치에 프란츠가 찾아와 앉은 것처럼. 뭐, 그래서 그와 사랑에 빠지고 싶다느니 하고 바란다면 너무 앞서 나간 것이고, 지나치게 사심 가득한 '호수에서 책 읽기' 설정이 되겠으므로, 일단 거기까지는 워워.
"솔직히 우린 같이 시간을 보냈다고 할 수 없어. 어제 이 벤치에서 한 시간, 겨우 한 시간뿐이었는걸."
"그 정도면 충분히 추측할 수 있어요."
확신에 찬 말투가 거슬렸다. 누구든 이처럼 거만하면서도 가식적이지 않고 침착하며 주저함 없이 부드럽게 말하는 아이를 보면 면박을 주고 싶으리라.
"그렇다면, 내게서 뭘 추측했는데?"
"불편한 듯 걷는 모습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어요. 뭔가를 떨쳐버리고 싶어하는 것 같았어요." (32~33)
행복하지 않은 모습으로 걸음을 옮겨 호숫가 벤치로 와 사색에 잠기는 클라라는, 프란츠의 추측 그대로였다.
사랑에 상처 입었다. 산산히 부서진 심장의 파편이 온몸의 혈관을 타고 돌아 너무나 아픈 나날이었다. 그런 날이 이어지던 가운데, 당돌한 소년 프란츠가 나타났다.
어딘가 평범하지 않아보이는 열두 살 소년 프란츠가 상처 입은 스무 살 여인 클라라를 위로하고 조언을 들려주는 모습은 정말이지 어딘가 맹랑해보이기도 하지만, 역시 나이란 숫자에 불과한 것인가, 일찍 세상을 깨달아버린 소년의 깊이 있는 마음 씀씀이와 어른 못지 않은, 아니 어른보다 뛰어난 논리와 사유는, 결코 '아이'라고 얕잡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당돌한 소년은 심지어 자신보다 여덟 살이나 많은 스무 살 여인에게 사랑을 느끼게까지 되는데...
"이렇게 웃어본 지가 그때…… 그러니까,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봐요. 울고 있네요. 눈물이 날 만큼 웃었어요."
"이런 건 처음이야. 그때…… 이후론."
"그 표현은 이제 잊어버리기로 해요. 상처 입은 마음, 상처 입은 마음. 됐어요. 이젠 됐어요. 당신의 마음은 이젠 상처 입지 않았어요. 당신도 잘 알잖아요. 이렇게 웃을 수 있고요." (81~82)
클라라의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해주고 눈물이 날 만큼 웃게 해준 소년 프란츠.
정작 무언가 사연이 있어보이는 자신의 이야기는 한 번도 털어놓지 않고 늘 서둘러 다리를 건너가며 손을 흔들던 프란츠. 소년의 이야기를 알고 나니, 프란츠가 어째서 아이 같지 않고 그토록 내면이 다져질 수밖에 없었는가 알 것 같으면서, 이 어린 소년의 머리를 따스히 쓰다듬어 주고, 꼭 껴안아 다독여 주고 싶어졌다. 정작,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클라라가 아닌 프란츠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프란츠는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을 위로하는 법을 터득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절실했던 것을 타인에게 준 것인지도...
처음에는 아직 미성년(일 뿐만 아니라 '꼬맹이'라 불러도 될 것 같은 아이)과 성인의 사랑 이야기라니, 유치하거나, 말도 안 되거나, 아무튼, 그 이야기에 빠져들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웬걸, 정말이지 호숫가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잔잔하면서도 빛나는 노을 같은 이야기를 만났다.
마음속으로 둘의 사랑을 응원했다...
살금살금 봄날 꽃밭의 나비를 잡으러 다가가다 살랑, 날아가버리는 나비를 바라보는 것 같은 마지막 페이지(185)가, 오래오래 내 마음에 남았다.
나비는 날아가 버렸어도, 나비가 앉았던 꽃밭은 여전히 향기롭고 아름다우리니, 나비 날아간 보이지 않는 선은, 언젠가 다시 나비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해줄지니...
십 년 전 '불가능'했던 것이 오늘은 가능했다. 나는 감히 장담한다. 그들은 사랑을 나눌 거라고.
그러지 않는다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