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란티스야, 잘 가
허수경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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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자그마한 체구의 시인이 뚱뚱했던 소녀 시절 외로움을 떠올리며 그려낸 성장소설.

뚱뚱해서 외로웠던 소녀는 달콤한 단팥소가 든 찐빵을 먹으며, 그 달콤함으로 외로움을 달랬고, 그 외로움 속에서 글 쓰는 소녀가 되었다.

 

  우리들의 마음 속에는 언젠가 꾸었던 꿈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마음은 그 꿈들이 숨죽이며 누워 있는 지층일지도 모릅니다. 그 꿈의 지층을 들여다보면 우리들이 가장 강렬했던 때, 그때의 얼굴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

  아마도 한 사회의 권력 시스템이 한 개인에게 퍼붓는 가장 강력한 폭력은 꿈꿀 권리를 빼앗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꿈의 지층은 강력해서 누군가가 꿈꿀 권리를 빼앗아버려도 우리의 마음속에 엎드려 있습니다. 그 꿈들을 발굴하듯 끄집어내어보면 그 꿈이 우리를 조심조심 수줍어하며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치 오래전에 잃어버린 친구처럼 서먹하게, 마치 아주 오래전에 지나온 역처럼 낯설게요. _ '작가의 말' 중에서

 

학교에서는 뚱뚱한 아이여서, 집에서는 왜인지 모를 무관심으로 늘 외로운 소녀 경실이는 매일밤 일기장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일기장 속에서 경실이는 '미미(美美)'. 현실 속에서처럼 뚱뚱한 소녀도, 촌스러운 이름의 경실이도 아닌, 아름다울 미자가 두 개 들어간 '미미'.

어느날 경실이는 자신 앞에 느닷없이 나타난 이복언니 정우를 맞이하게 된다. 경실 앞에 나타난 첫날 밤, 파리든 런던이든 자신이 원하는 나라는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마술사 같은 이야기를 하던 정우는 잃어버린 낙원 아틀란티스로 경실을 초대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들만의 아틀란티스를 건설해간다.

 

아틀란티스는 푸른 바다로 둘러싸인 작은 섬. 그곳에는 아틀란티스라는 이름의 왕국이 있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나 햇빛이 따뜻하고 바람도 선선했지요. 나무마다 향기로운 과일이 열리고 흐르는 강물에는 우유와 꿀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걱정도 없고 언제나 좋은 이야기만 했어요. 서로 다투지도 않았고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없었지요. 집을 나간 아버지도 없고 언제나 같은 반찬만 먹으라고 상을 들이미는 엄마도, 이복언니라는 것도 없었구요.

 

아틀란티스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 아틀란티스는 어디에도 없답니다. 그저 내 마음에 있을 뿐이에요. 국숫집이 아마도 나의 아틀란티스는 아니었을까요? 선생님이 매일 저녁 국수를 먹으러 오던 그 국숫집이. 엄마가 있고 국수가 끓는 솥도 있는 그곳이요. 만일 그곳이 나의 아틀란티스라면 나는 그곳을 잃어버리고 만 거지요.

 

아틀란티스에는 미미라는 공주가 살았어요. 미미의 주위에는 시종도 많았고 미미를 따르는 토끼나 다람쥐, 나비, 새들도 많았지요. 아침에 일어나면 미미는 착한 시종들과 함께 귀여운 동물들을 데리고 정원을 걷기도 했어요. 밤이면 시종들과 동물들 사이에서 잠이 들었지요. 미미에게는 엄마가 없답니다.

 

경실 또는 미미의 아틀란티스, 정우의 아틀란티스, 비밀 독서클럽 아이들의 아틀란티스. 아이들 마음속에 세워지는 잃어버린 낙원 아틀란티스.

아틀란티스는 누군가에게는 잔인한 현실을 이길 힘을 주고, 누군가에게는 꿈을 꿀 자유를 주고, 누군가에게는 문학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열어주었다.

그렇게 매일밤 아틀란티스를 세웠던 그 소녀는 훗날,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단팥소처럼 달콤한 별을 띄워주는 시를 쓰는 시인이 되었다. 바로 우리들에게 그 시절 그녀의 아틀란티스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 시인이.

 

그 시절 소녀는 그녀만의 아틀란티스에 많은 소원을 심어놨을지도 모르겠다. 그 중 일부는 '잃어버린 낙원'이 아닌 현실이 되었을지도.

나는 지금 그녀의 아틀란티스에 심어져 있을 소원 하나에 강한 응원의 힘을 실어주고 싶다. 시인의 그 꿈이 이루어지는 날이 오기를 나 또한 간절히 바란다고.

바로 이 소원이.

 

앞으로의 소망이 있다면 젊은 시인들과 젊은 노점상들과 젊은 노동자들에게 아부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_ '작가 소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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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드립 커피 좋아하세요? - 시시때때로 커피가 그리운 사람들을 위한 커피 안내서
김훈태 지음 / 갤리온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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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언니가 핸드밀과 원두를 사다주었다.

평소에는 원두 간 것을 사주곤 했는데, 원두는 가는 순간 향이 거의 다 날아가버려 그때그때 갈아 마셔야 맛있다고 하더라며, 더 맛있는 커피 즐기라는 선물이었다.

원두는 막 볶은 것이기 때문에 3일 후에 개봉하고, 개봉 후 일주일 내에 마셔야 한다는 이야기도 전해주었다.

그날, 그러니까 핸드밀에 직접 원두를 넣고 드르륵드르륵 갈아 부엌 가득 퍼지던 커피향을 맡았던 그날, 나는 왠지 태어나 처음으로 커피를 마시는 기분 같은 걸 느꼈다.

지금껏 집에서 내려 마신 커피가 몇백 잔일 텐데, 밖에서 친구들과 수다 떨며 사 마신 커피는 또 얼마나 많을 텐데, 과거의 그런 커피들과는 다른 내 생의 어떤 '첫'을 만난 듯한 느낌. 아니, 그건 실제로 '첫 커피'이기도 했다. 내가 직접 원두를 갈아서 내린 첫 커피.

그래서일까, 그냥 대충 원두 간 것 넣고 전기 포트째로 물 쭉쭉 부어 내려 마시던 그 '대충 핸드드립 커피'에서 벗어나, 조금쯤 제대로 커피를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두를 직접 갈아 내린 감격에 취해 "커피콩 사다가 직접 볶아서 마셔볼까봐" 했더니, 가족들이 워워ㅡ 말리더라. 커피콩 볶는 거 웬만한 내공으로 되는 것 아니라며. 우리집에서 커피 제일 즐겨마시는 건 나인데, 뭐야 이제 보니, 내가 커피를 제일 모르잖아? 커피가 궁금해졌다. 아무거나 무엇이든 커피에 관한 이야기가.

커피에 관한 책이 워낙 많아 막상 어떤 책을 읽어봐야 좋을지 고르기 힘들었는데, 그러다가 눈에 띈 이 책, 『핸드드립 커피 좋아하세요?』.

미리 읽어본 사람에 의하면 커피 입문자에게 딱 좋은 책이란다. 이미 커피에 관한 웬만한 배경지식을 갖추고 있는 이들에게는 '정보 전달'의 역할이 미미하겠지만, 커피에 문외한이라면 쉽고 재밌게 접할 수 있다고. 그렇다면 내게도 적합한 책인 것 같아 선택.

그리고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책 속에 쏘옥 빠져들어가 그 밤 다 읽어버리며 책 속 커피향에 취했으니, 탁월한 선택.

 

책은 처음에는 에세이로 시작된다. 서울에 사는 저자가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주문진 보헤미안을 찾아간 이야기. 아, 커피 한 잔을 위한 여행이라니.

"혼자서 조용히 커피 마시러 다니는 사람이 진짜 맛을 아는 사람이에요. 한 남자가 말이에요, 주말이면 말쑥이 차려입고 집을 나서는 거예요. 그래서 하루는 부인이 이상하다 싶어 그 남자를 쫓아갔대요. 그런데 그 남자가 간 곳은 조용한 커피집이었고 거기서 말없이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나오더래요. 진짜 커피 좋아하는 사람은 맛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법이 없어요. 누구와 시끄럽게 어울리는 법도 없고요." (28~29)

일주일에 한두 번은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커피를 마신다는 저자에게 보헤미안의 박이추 선생(우리나라 핸드드립 커피의 3대 명인 중 한 명)이 들려준 이야기이다. 커피의 '진짜 맛'을 아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책 초반부터 내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겼는데, 박이추 선생의 이런 말은 빈속에 들이켠 진한 커피처럼 내 심장을 콩콩콩콩 뛰게 만들기도 했다.

"인생을 살다보면 주부主部가 바뀌는 순간이 있어요. (……) 열심히 살다보면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일로 자연스럽게 옮겨가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행복해지는 거예요." (31~32)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커피 명인에게 듣는 인생 이야기란 얼마나 향긋하고 묵직할 것인가. 그의 카페에 있는 '강원도 남대천' 같은 하우스 브렌드 커피도, '아마존 폭포와도 같은' 스트롱 믹스 커피도 궁금하지만, 나는 그 무엇보다 박이추 선생 그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지기도 했다. 언젠가 그가 카페와 함께 운영한다는 펜션에 머무르며 주문진 바다도 감상하고, 그의 인생 철학이 담긴 커피도 맛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저자는 이처럼 자신의 커피 인생을 편안하고 향긋한 에세이로 풀어내며 이어 커피 초보자들을 위해 커피의 이모저모를 소개해준다. 로스팅이란 무엇이며 집에서 로스팅하는 방법, 아라비카와 로부스타의 차이('아라비카'는 커피 광고에서 많이 봤지만, 왜 '아라비카 아라비카' 강조하는지 몰랐는데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커피 이름 짓는 법('모카'가 대표적인 커피 무역항 '모카항'에서 나왔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커피 추출의 역사와 각종 추출법(에스프레소 머신, 사이펀, 프렌치 프레스, 모카포트, 더치커피 등), 핸드드립 도구 선택과 핸드드립 방법, 각종 커피 메뉴에 대한 설명 등을 조금도 어렵지 않고 지루하지 않게 애정을 담뿍 담아 풀어놓았다. 그리고 저자의 그런 마음이 고스란히 내 마음에 전해진 듯, 책을 읽고 나니 커피를 향한 애정이 더 커지는 기분이랄까. 아는 만큼 보이고, 알면 사랑하게 되는 거겠지.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자신있게 이 책 제목에 "네!"라고 대답할 수 있었는데, 막상 책을 읽고 나니, 과연 내가 그동안 핸드드립 커피를 좋아했던 것이 맞나 슬그머니 꼬리가 내려진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동안 내가 마신 건 '대충 핸드드립 커피'였기에. 핸드드립 커피를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실은 그 맛도 구별할 줄 모르고(로스팅 된 지 일주일, 한발 양보해서 보름 지난 커피는 이미 썩은 생선이나 다름 없다는데, 나는 보름이 뭐람, 한 달이 지난 것도 아무 느낌 없이 잘 마셨으니...) 커피를 '제대로' 내릴 줄도 모르고, 무엇보다도, 커피에 대해서 아는 게 정말 요만큼도 없었다는 생각에 커피 볼 면목이 없어진 게 사실이다. 이 책으로 커피가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왔으니, 앞으로는 집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도 조금 더 정성을 기울여 '제대로' 내려봐야겠다. 이 책으로 새롭게 접하게 된 커피의 이런저런 이야기도 궁금해져, 관련 책도 더 찾아 읽고 싶어졌다. 커피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은, 나 같은 초보자들에게 참으로 친절하고 고마운 책이다.

 

 

"당신께서 좋아하는 커피는 무엇입니까?"

(……)

"특별히 어떤 종류의 커피를 좋아한다기보다 마실 때 그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커피라면 모두 최고라고 생각하네. 아무리 비싸고 훌륭한 커피라도 마시는 사람이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짜 맛있는 커피가 아니지. 역시 어려운 질문이야."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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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책좋사), 『책 읽어주는 책 북멘토』

 

네이버 카페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http://cafe.naver.com/bookishman) 회원들의 리뷰가 책으로 엮어져 나왔다.

매주 뽑는 우수 리뷰들이 그 대상이었던 듯 하며, 나도 일전에 '출간 동의서'를 보낸 기억이 있어, 책 출간 소식이 반가웠다.

내 리뷰가 실렸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책좋사 우수 리뷰 100여 편이 책에 실렸다. 저자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인세 전부와 책 수익금 일부는 어려운 곳에 성금으로 쓰인다 한다.





 

목록에서 반가운 책 제목을 발견했다.

작가의 젊은 날을 사로잡은 한 문장을 찾아서  『청춘의 문장들』(김연수)

(물론, 반가운 책이야 많았지만, 이 책은 내가 우수 리뷰로 뽑혔던 책이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디보자, 141쪽이라...

아앗, 정말 내 리뷰다!! @.@

반가움과 부끄러움이 동시에...

(편집자의 손이 많이 거쳐갈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거의 그대로 실렸다. 맞춤법 틀린 것도 있는데...흠흠;;;)

 

작년에 내 리뷰만으로 만들어진 리뷰북을 모 온라인 서점에서 선물 받긴 했지만,

이렇게 정식 출간 된 책에 내 글이 실리는 건 처음이라, 참으로 신기하고 재미나다.





 

거기다가, 내가 가장 애정하는 작가님 중 한 분인, 김연수 작가님 책 리뷰라니. 우후훗.

가보로 길이길이~~~!! ^^*


 

 

이 책에는 네이버 파워블로거를 비롯해, 북리뷰계의 유명인들, 내 블로그 이웃 등 반가운 이들의 글도 많이 실려 있어 그 닉네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우아, 자목련, 설해목, 세상틈에, 개츠비, 유랑인, 햇살박이, 행인, 인메이, 뒷북소녀, 태극취호 등의 닉네임이 눈에 띄었다.

(실은 이 몸이 '책좋사' 유령회원인지라, 더 많은 회원들을 알지 못하여...흠흠)

 

이렇게 반가운 닉네임들을 찾아가며 글 읽는 재미도 있을 것 같다.

다른 이들은 어떤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하다. 찬찬히 읽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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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 1994-2005 Travel Notes
이병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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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지요.

차곡차곡 쌓은 환상을 넘겨보려면…

가야지요.

때론 그것들이 조용히 허물어지는 것도 봐야죠.

 

여행 에세이의 고전, 여행 에세이의 명품 『끌림』을 작년에 뒤늦게 읽게 되었다. (뒤늦게 읽고 보니, 바로 이어서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끄응...)

내가 아는 어떤 이는 이 책을 일곱 번 읽었다 했고, 또 어떤 이는 여행을 떠날 때마다 이 책을 가지고 간다 했고, 또 어떤 이는,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나를 정말 의외라는 듯이 쳐다봤다. "끌림을 아직 안 읽었다고??" 수많은 독자들에게 여행의 로망을, 여행 에세이의 로망을 심어준 이 책이 궁금하기도 했고, '안 읽은 죄' 같은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게 야속해서, 기필코 읽고야 말겠어! 다짐하고 읽었던 책.

 

감각적이고 정감 가는 사진들과 그 곁에 함께하는 조금 짧거나 긴 작가의 단상들.

격하지 않고, 요동치지 않으며, 잔잔하게 잔잔하게... 어쩜 처음부터 끝까지 이와 같은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는지, 수시로 '미친년 널 뛰듯' 변하는 내 마음에게 '이것 좀 봐봐, 이렇게 평온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이런 고요함을 좀 배워봐'라고 조용한 질책을 보내게 만든 책이기도 했다.

 

'내일과 다음 생 중에,

어느 것이 먼저 찾아올지 우리는 결코 알 수가 없다!'

티베트 속담이다.

이 속담은 티베트의 칼날 같은 8월의 쨍한 햇빛을 닮아 있다.

살을 파고들 것만 같은 말이다.

내가 지금 걷는 이유는 내일과 다음 생 중에 어느 것이

먼저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올 것이 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차곡차곡 쌓은 환상을 넘겨보고, 때론 그것들이 조용히 허물어지는 것을 보기 위해 가야 하고,

내일과 다음 생 중에 어느 것이 먼저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걷는다는 작가의 말에, 나도 나직이 고개를 끄덕여본다.

환상이 깨질까 두려워 마주하길 피했던 것들, 늘 내일이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나중으로 미뤄두었던 걸음들이 떠올라, 조금쯤 가슴 시려하면서...

 

요즘의 나는 책을 읽으며 반성투성이다. 반성이야 많이 한다고 나쁠 것 있겠느냐만은, 늘 반성만, 반성만...

내일은 부디 환상을 넘겨보고 걸음을 걸어보길!

 

사랑해라, 시간이 없다.

사랑을 자꾸 벽에다가 걸어두지만 말고 만지고, 입고 그리고 얼굴에 문대라.

사랑은 기다려주지 않으며,

내릴 곳을 몰라 종점까지 가게 된다 할지라도 아무 보상이 없으며

오히려 핑계를 준비하는 당신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사랑해라, 정각에 도착한 그 사랑에 늦으면 안 된다.

 

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기차다.

함께 타지 않으면 같은 풍경을 나란히 볼 수 없는 것.

나란히 표를 끊지 않으면 따로 앉을 수밖에 없는 것.

서로 마음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같은 역에 내릴 수도 없는 것.

그 후로 영원히 영영 어긋나고 마는 것.

 

우리 생에서는, 영원히 영영 어긋나고 마는 일 같은 걸 없도록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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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눈
장석남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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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이슬비는

이쯤 가까이 와

감꽃 떨어지는 감나무 그림자도

이쯤 가까이 와

가끔씩 어깨 부딪치며 천천히 걷는 연인들

바라보면 서로가 간절히

가까이 와

손 붙잡지 못해도

손이 손 뒤에 다가가다 멈추긴 해도

그 사이가

안 보이는 꽃이니, 드넓은 바다이니

휘어진 해변의 파도 소리

파도 소리 _ '가까이 와' 부분

 

 

작년 늦여름 혹은 초가을 무렵에는 장석남 시인의 시들을 참 많이도 읽었다.

『젖은 눈』을 읽을 때쯤에는 장석남 시인의 시들이 내 마음 가까이 다가와 있었지.

일 년에 다만 몇 권이라도 시집을 읽으려 노력하고, 가끔 무척 끌릴 때는 며칠이고 시집만 읽을 때도 있는데, 그래도 시는 내가 쉽게 손 잡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간절히 가까이 다가가곤 싶어도 슬그머니 잡아볼까 손 내밀었다가, 겸연쩍게 다시 거둬들이기 일쑤인, 글. 내게 시는 그런 존재. 흔한 말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하지만, 장석남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시가 마음속에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얼마 전에 뵌 한 시인께서는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가 참 좋다 하시며, 그 이유로, 이 지상의 언어로 쓰여진 게 아니기 때문이라고, 외계에서 온 글들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나는 아직까지는 이 지상의 언어가 좋은 거다. 보고 듣고 경험한 만큼은, 꼭 그만큼은 거둬들일 수 있는, 그런 시들이 아직 나는 좋다.

장석남 시인의 시는 자꾸 손 내밀어 꼬옥 붙잡고, 마주 잡은 손 경쾌하게 흔들어가며 함께 걷고 싶은, 그런 시들이 많았다.

실은, 사랑시, 연애시들이 그렇게 예쁘게 읽히고 마음에 절절히 와 닿더라. 그런 내게 스스로 한 마디 해주지만. "니가 사랑을 알아?"

위의 시도, 실은, 손 붙잡고 싶었던, 손이 손 뒤에 다가가다 멈추던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밑줄에 별표까지 해가며 읽었더랬다.

뭐, 붙잡지 못한 손은, 끝내, 내 손이 내밀어졌던 것도 모른채, 저만큼 멀어져버렸지만.

 

   (……) 가도 가도 남는 앞의 아득한 길을 바라보면서 간혹은 불빛 속으로, 간혹은 어둠 속으로, 간혹은 눈물 속으로, 모두가 모두를 멀리 두고 그립기 위하여. 어디가 끝일까 궁금한 표정으로 말없이 떠났다. 간혹은 만나고 간혹은 만나지 않고. 그러나 아무것도 꿈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 지긋지긋한 삶이었다.

 

  늦은 밤이면 베란다 창에 별이 와 빛난다. '다 괜찮아, 다 괜찮다니까.' 그러나 답변은 없다. 어머니는 새벽까지 아프지만 아무도 그 아픔의 베란다를 내다보지는 않는다. 하여 '다 괜찮다'는 말이 어머니는 그립다. _ '오동나무가 있던 집의 기록·2' 부분

 

작년에 읽은 시집을 훌훌 넘겨 아무 시나 펼쳐 읽어 본다. 더러는 빨간 밑줄이 보이고, 더러는 내 손길 지나간 흔적이 없지만, 시 한 편 한 편, 내 마음 지나간 자리는 내 눈에 보인다. 밑줄 그었던 부분은 그 부분대로, 말간 얼굴 그대로인 부분은 또 그 부분대로, 새롭게 내 마음속에 조용히 다가오는 그 속삭임들, 참 좋다.

읽을 수록 새롭고, 읽을 수록 더 많이 보이고, 느껴지고, 다가오는 시들의 속삭임을, 오늘밤 자장가 삼아야겠다.

 

솔방울 떨어져 구르는 소리

가만 멈추는 소리

담 모퉁이 돌아가며 바람들 내쫓는

가랑잎 소리

새벽달 깨치며 샘에서

숫물 긷는 소리

풋감이 떨어져 잠든 도야지를 깨우듯

내 발등을 서늘히 만지고 가는

먼,

먼, 머언,

속삭임들 _ '속삭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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