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눈
장석남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초여름 이슬비는

이쯤 가까이 와

감꽃 떨어지는 감나무 그림자도

이쯤 가까이 와

가끔씩 어깨 부딪치며 천천히 걷는 연인들

바라보면 서로가 간절히

가까이 와

손 붙잡지 못해도

손이 손 뒤에 다가가다 멈추긴 해도

그 사이가

안 보이는 꽃이니, 드넓은 바다이니

휘어진 해변의 파도 소리

파도 소리 _ '가까이 와' 부분

 

 

작년 늦여름 혹은 초가을 무렵에는 장석남 시인의 시들을 참 많이도 읽었다.

『젖은 눈』을 읽을 때쯤에는 장석남 시인의 시들이 내 마음 가까이 다가와 있었지.

일 년에 다만 몇 권이라도 시집을 읽으려 노력하고, 가끔 무척 끌릴 때는 며칠이고 시집만 읽을 때도 있는데, 그래도 시는 내가 쉽게 손 잡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간절히 가까이 다가가곤 싶어도 슬그머니 잡아볼까 손 내밀었다가, 겸연쩍게 다시 거둬들이기 일쑤인, 글. 내게 시는 그런 존재. 흔한 말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하지만, 장석남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시가 마음속에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얼마 전에 뵌 한 시인께서는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가 참 좋다 하시며, 그 이유로, 이 지상의 언어로 쓰여진 게 아니기 때문이라고, 외계에서 온 글들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나는 아직까지는 이 지상의 언어가 좋은 거다. 보고 듣고 경험한 만큼은, 꼭 그만큼은 거둬들일 수 있는, 그런 시들이 아직 나는 좋다.

장석남 시인의 시는 자꾸 손 내밀어 꼬옥 붙잡고, 마주 잡은 손 경쾌하게 흔들어가며 함께 걷고 싶은, 그런 시들이 많았다.

실은, 사랑시, 연애시들이 그렇게 예쁘게 읽히고 마음에 절절히 와 닿더라. 그런 내게 스스로 한 마디 해주지만. "니가 사랑을 알아?"

위의 시도, 실은, 손 붙잡고 싶었던, 손이 손 뒤에 다가가다 멈추던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밑줄에 별표까지 해가며 읽었더랬다.

뭐, 붙잡지 못한 손은, 끝내, 내 손이 내밀어졌던 것도 모른채, 저만큼 멀어져버렸지만.

 

   (……) 가도 가도 남는 앞의 아득한 길을 바라보면서 간혹은 불빛 속으로, 간혹은 어둠 속으로, 간혹은 눈물 속으로, 모두가 모두를 멀리 두고 그립기 위하여. 어디가 끝일까 궁금한 표정으로 말없이 떠났다. 간혹은 만나고 간혹은 만나지 않고. 그러나 아무것도 꿈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 지긋지긋한 삶이었다.

 

  늦은 밤이면 베란다 창에 별이 와 빛난다. '다 괜찮아, 다 괜찮다니까.' 그러나 답변은 없다. 어머니는 새벽까지 아프지만 아무도 그 아픔의 베란다를 내다보지는 않는다. 하여 '다 괜찮다'는 말이 어머니는 그립다. _ '오동나무가 있던 집의 기록·2' 부분

 

작년에 읽은 시집을 훌훌 넘겨 아무 시나 펼쳐 읽어 본다. 더러는 빨간 밑줄이 보이고, 더러는 내 손길 지나간 흔적이 없지만, 시 한 편 한 편, 내 마음 지나간 자리는 내 눈에 보인다. 밑줄 그었던 부분은 그 부분대로, 말간 얼굴 그대로인 부분은 또 그 부분대로, 새롭게 내 마음속에 조용히 다가오는 그 속삭임들, 참 좋다.

읽을 수록 새롭고, 읽을 수록 더 많이 보이고, 느껴지고, 다가오는 시들의 속삭임을, 오늘밤 자장가 삼아야겠다.

 

솔방울 떨어져 구르는 소리

가만 멈추는 소리

담 모퉁이 돌아가며 바람들 내쫓는

가랑잎 소리

새벽달 깨치며 샘에서

숫물 긷는 소리

풋감이 떨어져 잠든 도야지를 깨우듯

내 발등을 서늘히 만지고 가는

먼,

먼, 머언,

속삭임들 _ '속삭임' 전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