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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드립 커피 좋아하세요? - 시시때때로 커피가 그리운 사람들을 위한 커피 안내서
김훈태 지음 / 갤리온 / 2010년 12월
평점 :
얼마 전에 언니가 핸드밀과 원두를 사다주었다.
평소에는 원두 간 것을 사주곤 했는데, 원두는 가는 순간 향이 거의 다 날아가버려 그때그때 갈아 마셔야 맛있다고 하더라며, 더 맛있는 커피 즐기라는 선물이었다.
원두는 막 볶은 것이기 때문에 3일 후에 개봉하고, 개봉 후 일주일 내에 마셔야 한다는 이야기도 전해주었다.
그날, 그러니까 핸드밀에 직접 원두를 넣고 드르륵드르륵 갈아 부엌 가득 퍼지던 커피향을 맡았던 그날, 나는 왠지 태어나 처음으로 커피를 마시는 기분 같은 걸 느꼈다.
지금껏 집에서 내려 마신 커피가 몇백 잔일 텐데, 밖에서 친구들과 수다 떨며 사 마신 커피는 또 얼마나 많을 텐데, 과거의 그런 커피들과는 다른 내 생의 어떤 '첫'을 만난 듯한 느낌. 아니, 그건 실제로 '첫 커피'이기도 했다. 내가 직접 원두를 갈아서 내린 첫 커피.
그래서일까, 그냥 대충 원두 간 것 넣고 전기 포트째로 물 쭉쭉 부어 내려 마시던 그 '대충 핸드드립 커피'에서 벗어나, 조금쯤 제대로 커피를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두를 직접 갈아 내린 감격에 취해 "커피콩 사다가 직접 볶아서 마셔볼까봐" 했더니, 가족들이 워워ㅡ 말리더라. 커피콩 볶는 거 웬만한 내공으로 되는 것 아니라며. 우리집에서 커피 제일 즐겨마시는 건 나인데, 뭐야 이제 보니, 내가 커피를 제일 모르잖아? 커피가 궁금해졌다. 아무거나 무엇이든 커피에 관한 이야기가.
커피에 관한 책이 워낙 많아 막상 어떤 책을 읽어봐야 좋을지 고르기 힘들었는데, 그러다가 눈에 띈 이 책, 『핸드드립 커피 좋아하세요?』.
미리 읽어본 사람에 의하면 커피 입문자에게 딱 좋은 책이란다. 이미 커피에 관한 웬만한 배경지식을 갖추고 있는 이들에게는 '정보 전달'의 역할이 미미하겠지만, 커피에 문외한이라면 쉽고 재밌게 접할 수 있다고. 그렇다면 내게도 적합한 책인 것 같아 선택.
그리고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책 속에 쏘옥 빠져들어가 그 밤 다 읽어버리며 책 속 커피향에 취했으니, 탁월한 선택.
책은 처음에는 에세이로 시작된다. 서울에 사는 저자가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주문진 보헤미안을 찾아간 이야기. 아, 커피 한 잔을 위한 여행이라니.
"혼자서 조용히 커피 마시러 다니는 사람이 진짜 맛을 아는 사람이에요. 한 남자가 말이에요, 주말이면 말쑥이 차려입고 집을 나서는 거예요. 그래서 하루는 부인이 이상하다 싶어 그 남자를 쫓아갔대요. 그런데 그 남자가 간 곳은 조용한 커피집이었고 거기서 말없이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나오더래요. 진짜 커피 좋아하는 사람은 맛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법이 없어요. 누구와 시끄럽게 어울리는 법도 없고요." (28~29)
일주일에 한두 번은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커피를 마신다는 저자에게 보헤미안의 박이추 선생(우리나라 핸드드립 커피의 3대 명인 중 한 명)이 들려준 이야기이다. 커피의 '진짜 맛'을 아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책 초반부터 내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겼는데, 박이추 선생의 이런 말은 빈속에 들이켠 진한 커피처럼 내 심장을 콩콩콩콩 뛰게 만들기도 했다.
"인생을 살다보면 주부主部가 바뀌는 순간이 있어요. (……) 열심히 살다보면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일로 자연스럽게 옮겨가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행복해지는 거예요." (31~32)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커피 명인에게 듣는 인생 이야기란 얼마나 향긋하고 묵직할 것인가. 그의 카페에 있는 '강원도 남대천' 같은 하우스 브렌드 커피도, '아마존 폭포와도 같은' 스트롱 믹스 커피도 궁금하지만, 나는 그 무엇보다 박이추 선생 그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지기도 했다. 언젠가 그가 카페와 함께 운영한다는 펜션에 머무르며 주문진 바다도 감상하고, 그의 인생 철학이 담긴 커피도 맛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저자는 이처럼 자신의 커피 인생을 편안하고 향긋한 에세이로 풀어내며 이어 커피 초보자들을 위해 커피의 이모저모를 소개해준다. 로스팅이란 무엇이며 집에서 로스팅하는 방법, 아라비카와 로부스타의 차이('아라비카'는 커피 광고에서 많이 봤지만, 왜 '아라비카 아라비카' 강조하는지 몰랐는데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커피 이름 짓는 법('모카'가 대표적인 커피 무역항 '모카항'에서 나왔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커피 추출의 역사와 각종 추출법(에스프레소 머신, 사이펀, 프렌치 프레스, 모카포트, 더치커피 등), 핸드드립 도구 선택과 핸드드립 방법, 각종 커피 메뉴에 대한 설명 등을 조금도 어렵지 않고 지루하지 않게 애정을 담뿍 담아 풀어놓았다. 그리고 저자의 그런 마음이 고스란히 내 마음에 전해진 듯, 책을 읽고 나니 커피를 향한 애정이 더 커지는 기분이랄까. 아는 만큼 보이고, 알면 사랑하게 되는 거겠지.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자신있게 이 책 제목에 "네!"라고 대답할 수 있었는데, 막상 책을 읽고 나니, 과연 내가 그동안 핸드드립 커피를 좋아했던 것이 맞나 슬그머니 꼬리가 내려진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동안 내가 마신 건 '대충 핸드드립 커피'였기에. 핸드드립 커피를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실은 그 맛도 구별할 줄 모르고(로스팅 된 지 일주일, 한발 양보해서 보름 지난 커피는 이미 썩은 생선이나 다름 없다는데, 나는 보름이 뭐람, 한 달이 지난 것도 아무 느낌 없이 잘 마셨으니...) 커피를 '제대로' 내릴 줄도 모르고, 무엇보다도, 커피에 대해서 아는 게 정말 요만큼도 없었다는 생각에 커피 볼 면목이 없어진 게 사실이다. 이 책으로 커피가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왔으니, 앞으로는 집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도 조금 더 정성을 기울여 '제대로' 내려봐야겠다. 이 책으로 새롭게 접하게 된 커피의 이런저런 이야기도 궁금해져, 관련 책도 더 찾아 읽고 싶어졌다. 커피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은, 나 같은 초보자들에게 참으로 친절하고 고마운 책이다.
"당신께서 좋아하는 커피는 무엇입니까?"
(……)
"특별히 어떤 종류의 커피를 좋아한다기보다 마실 때 그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커피라면 모두 최고라고 생각하네. 아무리 비싸고 훌륭한 커피라도 마시는 사람이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짜 맛있는 커피가 아니지. 역시 어려운 질문이야." (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