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은 아니다
헬렌 칼디코트 지음, 이영수 옮김 / 양문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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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칼디코트가 쓴 <원자력은 아니다>는 원자력을 '지구온난화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값싼 청정연료'라고 홍보하고 있는 원자력산업계의 홍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책이다. 지은이 헬렌 칼디코트는 호주 출신의 의사로서 핵에너지, 핵무기, 원자력에 반대하는 세계적인 반핵운동가이다.


미국에서 '핵폐기를 위한 여성행동'을 창립하여 핵에너지에 지원되는 정부예산을 사회적으로 더욱 필요한 곳에 쓰자는 운동을 펼쳤고, 사회적 책임을 위한 의사회, 핵정책연구소 등에서 대표로 활동해오고 있다.

그녀가 쓴 책은 미국 사례를 중심으로 원자력 발전이 결코 값싼 청정에너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으며, 원자력 발전으로 인하여 파생되는 플루토늄과 핵무기 확산의 위험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헬렌 칼디코트는 미국 사례를 중심에 두고 있지만, 오늘날 지구촌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세계시민사회의 존망을 결정할 만큼 결정적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또 헬렌은 이 책의 많은 지면을 할애해 원자력 발전의 위험과 경제성 논리의 허구성에 대하여 폭로하고 있다.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그녀의 비판은 4곳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20기의 원자로를 가동 중인 우리나라 상황에서도 관심 가지고 귀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원자력은 원자력산업이 주장하는 것처럼 환경친화적이거나 청정하지 않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화석연료의 막대한 양이 원자로 운영에 필요한 우라늄을 채굴하고 정련하는데 사용되며, 육중한 콘크리트 원자로 건물을 건설하고 핵반응과정에 의해 생성되는 유해 방사성 폐기물을 운송하고 저장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 본문 중에서

원자력이 값싼 에너지란 주장은 터무니없는 '홍보'

원자력 발전은 막대한 양의 화석연료를 필요로 한다. 이때, 화석연료를 태우면서 온실 가스인 이산화탄소(CO₂)가 대기중에 방출될 뿐만 아니라 우라늄을 농축하는 동안 지금은 금지된 프레온가스도 상당량 방출된다. 프레온가스는 이산화탄소보다 1만~2만 배 더 치명적인 온실가스이며 오존층 파괴물질이다.

현재 원자력발전은 기존의 화력발전에 비하여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1/3에 불과한 것은 사실이지만, 앞으로 70~80년 사이에 농도가 높은 우라늄 광석을 모두 사용하고 나면, 농도가 낮은 광맥에서 우라늄을 추출해야하기 때문에 더 많은 화석연료를 소모하게 될 것이다.

헬렌은 "한정된 부존자원인 우라늄을 채굴하고 농축하는 데, 막대한 양의 화석연료가 필요하므로 10~20년 내에 원자력에너지를 적자에서 흑자로 돌릴 수 없다"고 강조한다. 결국 원자력 발전소는 기존의 화력 발전 및 수력발전소와 동일한 양의 온실가스와 공기오염물을 방출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헬렌 칼디코트는 원자력 발전이 값싼 에너지라는 것에 대하여도 터무니없는 홍보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원자력은 터무니없이 비싸고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미국 의회가 2005년 에너지 법안에서 130억 달러를 원자력산업을 소생시키기 위한 비용으로 지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매년 원자력 산업을 소생시키기 위하여 10억 달러를 쏟아 붓고 있는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원자력산업은 정부의 지원이 없으면 지탱할 수 없는 사업이며, 월스트리트의 투자가들은 아무도 원자력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

원자력발전소와 관련된 대표적인 잘못된 예측사례는 시브룩 원자로 사례이다.

"뉴햄프셔의 시브룩 원자로는 1976년 8억 5000만 달러의 비용으로 6년 안에 완성되도록 계획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70억 달러를 쏟아 부었고 1990년 완성될 때까지 14년이 걸림으로서 시민들의 격렬한 항의에 부딪혔다." - 본문 중에서

실제로 원자력발전소는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건설비용의 초과와 연기, 혹은 취소, 기준미달의 가동성능, 방사성폐기물 영구저장소 결정의 어려움 등으로 납세자들의 세금을 탕진하는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양상 경제적 합리주의와 '자유시장' 원리를 고집하는 선진국들이, 시작부터 막대한 정부보조금 없이 유지될 수 없는 원자력에 대해 납득 할 수 없을 정도로 열정적이라는 것"이 지은이의 지적이다.

원자력발전, 정부 지원 없이 유지할 수 없는 사업

원자력산업의 전망이 밝지 않은 것은 채굴 가능한 우라늄의 세계적 공급량이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도 기인한다. 만약 전 세계의 전기생산이 핵에너지로 대체된다면, 우라늄을 사용할 수 있는 기간은 9년도 못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농도가 높은 우라늄을 모두 채굴하고 나서 농도가 더 낮은 우라늄 광석을 사용하게 되면, 화석연료를 직접 연소시키는 것보다 우라늄 농축에 더 많은 이산화탄소가 발생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 오늘날 원자력발전소는 테러나 무장공격 등의 명백한 목표물로서도 위험한 존재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소련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 하더라도 비행기, 폭탄테러, 무장공격 등 다양한 테러의 목표물이 되었을 경우, 일어나는 원자로 용해는 인구 밀집 지역의 수십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며칠 또는 몇 년에 걸려 방사선 질환이나 암, 백혈병, 선청성 기형 또는 유전적 질환으로 고통스럽게 죽게 될 것이다.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미국 원자력발전소의 안전은 여전히 9·11테러 이전과 같은 해이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고 한다.

운전수명을 다한 원자로를 해체하는데 들어가는 비용 역시 미지수다. 운전수명을 다해 실제로 완전히 해체된 원자력 발전소가 아직까지 없기 때문에 폐로와 해체에 대한 에너지 비용의 유용한 근거자료는 거의 없는 상황이라는 것.

"방사능으로 심하게 오염된 거대한 건물은 해체가 시작될 실제 과정 이전에 10년에서 100년 동안 위험이나 외부침입에 대해 경비를 강화해 보호해야만 한다. 충분한 시간 동안 방사성 붕괴가 된 후에 원자로는 원격조정 등에 의해 작은 조각들로 분해 되어야 한다. 방사능이 남아 있는 조각들은 용기에 포장해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최종 처리를 해야 한다." - 본문 중에서

원자력 발전소가 가진 또 다른 위험은, 발전소가 기본적으로 원자폭탄 제조공장이기 때문이다

"1000메가와트의 원자로는 1년에 500파운드의 플루토늄을 생산한다. 하나의 원자폭탄을 만드는 데는 10파운드의 플로토늄이 필요할 뿐이다. 원자로급 플루토늄으로 만들어진 조잡한 원자폭탄 한 개만으로도 도시 하나를 황폐화시키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므로 원자력발전소를 확보한 임의의 비핵무기 국가는 원자폭탄을 보유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 본문 중에서

원자력선진국이 원자력기술을 판매하는 것은 결국 핵무기 제조기술을 수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저런 조약을 동원하여 비핵화, 핵동결을 결의한다 하더라도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는 것은 결국 핵무기 제조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과 다름 없다는 것이다.

원자력 발전소는 원자폭탄 제조공장이다

지난 1972년 미국원자력위원회는 2000년까지 사용한 핵연료 재처리를 위한 재처리공장과 증식로뿐만 아니라 1000개의 원자력발전소를 갖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그렇지만, 2000년까지 103기의 원자로만이 건설되었고, 증식로와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시설, 고준위 폐기물 처리장소 등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원자력 발전이 시작된 지 65년이 넘었지만 원자력산업계는 아직도 치명적인 방사성 폐기물의 막대한 양에 대하여 책임을 진적이 없으며, 발전소가 가동되는 만큼 계속해서 쌓이고 있다." - 본문 중에서

원자력 발전소를 가동하면 여러 가지 방사성 폐기물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이다. 이 폐기물은 핵무기를 위한 플루토늄의 생산과 원자로들로부터 나오는 사용 후 핵연료로서 여전히 높은 수준의 방사능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한 개 사용 후의 핵연료 집합체는 히로시마 원폭으로 인한 장수명 방사선의 양보다 10배나 더 많은 방사선을 함유한다. 미국은 현재 유카산에 저장소를 건설하려고 하는데, 이러한 집합체 14만 개를 수용하도록 예정되어 있다.

이러한 고준위방사성폐기물을 저장하기 위한 저장소의 지질학적 요구조건은 적어도 50만 년 동안 폐기물의 누출과 침출이 없어야 한다. 물론 지진이나 화산활동, 테러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한 장소이기도 해야 한다.

또 운반에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론적으로 미국의 여러 곳에 있는 사용 후 핵연료 7만미터톤을 고속도로와 철도를 이용, 유카산 저장소로 모두 운반하는 데는 자그마치 30년이 걸린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사용 후 핵연료 수송용기인 캐니스터는 여러 가지 결함을 노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원자력발전소는 결코 안전하지 않은 방식으로 전기를 생산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어느 곳에서도 안전하게 사용 후 핵연료를 처리 할 수 있는 방법은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원자력은 오늘 날 우리의 조명을 밝혀줌으로써 내일의 후손들에게 방사능이라는 유물을 유산으로 물려주는 셈이다."

헬렌 칼디코트가 쓴 <원자력은 아니다>에는 이 글에 소개하지 못한 원자력발전의 위험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를테면, 원자력발전소 건설기술이 발달하는 것은 안전보다는 건설비용을 줄이는데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기술이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제4세대 원자로에 대한 경고와 같은 내용이다.

또 핵무기와 관련하여, 이란이나 북한에 대한 정책과 이스라엘, 파키스탄이나 인도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다르게 집행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파헤치고 있다. 아울러 원자력발전에 대한 대안으로 재생에너지의 가능성을 폭넓게 소개하고 하고 있다.

헬렌 칼디코트의 해답은 의외로 간단명료하다. 원자력 발전에 집착하는 여러 정부들이 원자력발전을 지원하는 보조금만큼 신재생에너지에 투자한다면, 인류는 가까운 장래에 원자력 발전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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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아이들 (반양장)
히로세 다카시 지음, 육후연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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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람들 대부분은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위험에 대하여 상식이하로 둔감합니다. 우리들뿐만 아니라 20년 전, 옛 소련의 우크라이나 지역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딱 20년인 1986년 4월 26일, 옛 소련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원자력 발전소'라고 믿었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가 폭발 사고를 일으킨 날 입니다.

1945년 8월 6일은 처음으로 인류 전체를 위협하는 핵무기가 히로시마에 투하되어 일본국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에게 그 위험을 알린 날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40년쯤 지난 1986년에 체르노빌에서는 히로시마 원폭 20배에 해당하체는 대규모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고가 일어났고, 무려 13만 명이 강제 이주를 하였고 체르노빌 시가지는 죽음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1차 폭발이 일어난 후에도 창고에는 192톤의 핵연료가 저장된 체로 남아 있었으며 이 어마어마한 핵연료는 철재로 임시 봉합된 채 20여년이 지났다고 합니다. 만약 2차 폭발이 일어난다면 유럽전체가 방사능에 오염될 것으로 예측되지만 우크라이나 정부는 예산도 없고 기술도 없어 유럽 국가에 손을 내밀고 있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더군다나 러시아 정부와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 사고로 발생한 사상자 수와 영구 장애인, 신생아 장애인과 재산 피해액을 정확히 밝히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래 죽음 보면서 죽음 기다리던 체르노빌의 어린이들

히로세 다카시가 쓴 <체르노빌의 아이들>은 바로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 30분부터 17일째가 되는 5월 13일까지 세로프 가족에게 일어난 일을 소설형식으로 쓴 책입니다. 세로프가족은 원자력 발전소에 간부로 근무하는 안드레이와 아내 타냐, 그리고 아들 이반과 딸 이네사인데, 작가인 히로세 다카시는 마치 이들의 일기장을 들춰보듯이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쓴 듯 합니다.

이반과 이네사의 아버지인 안드레이는 기술간부로서 체르노빌 사고 직후 결사대의 일원으로 뽑혀 발전소 뒤처리 작업 중에 사망해 '영웅' 칭호를 받습니다. 폭발사고가 일어난 발전소로 돌아가는 안드레이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고서도 사고 수습을 위해 목숨을 걸고 떠나게 됩니다.

한편, 사고를 축소 은폐하기에만 급급한 당국에 의하여 아무런 보호조치도 받지 못한 채 그의 아들 이반과 딸 이네사는 격리 수용된 채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아이들을 찾아 헤매는 타냐에게도 사방으로부터 죽음의 그림자가 옥죄어 다가옵니다.

핵폭발로 시력을 잃고 핵방사능에 오염된 아이들은 옆 침대의 또래 아이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공포의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자꾸만 떠오르는 발전소가 폭발하던 모습과 동물들과 사람들에게 일어난 무서운 장면이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실상, 의사나 간호사보다 아이들의 공포심이 백배는 더 컸다. 이 병원으로 오기 전에 어떤 아이는 동물의 시체를 밟았고, 어떤 아이는 눈앞에서 부모가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보았다. 또 농민들이 강제로 피난하는 모습도 보았고, 검문소에서는 잔인하게도 부모와 생이별을 해야 했다. 한꺼번에 이런 끔찍한 일들을 겪게 된 아이들은 이제 마지막으로 감옥 같은 병원 안에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본문 중에서)

아이들 주검은 더욱 참혹합니다.

"그녀가 내민 팔에는 이네사보다 어린 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안겨 있었다. 드문 드문 남아 있는 머리카락, 얼굴 전체에 뒤덮여 부풀어 오른 검붉은 반점 무늬들이 그 아이의 고통스러운 최루를 말해주고 있었다. 목덜미에서부터 가슴까지 제 손으로 쥐어뜯은 손톱자국이 무수하게 남아 있었다."(본문 중에서)

시인 이상희는 이 책을 읽고 "이런 이야기를 읽고, 알게 된 것이 후회스럽다. 이것이 그저 우리를 놀라게 하고 진저리치게 만들어 보려고 어느 예민한 영혼이 상상해서 빚어낸 이야기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햇빛·공기·물·바람 모두 오염... 죽음의 땅이 된 체르노빌

그러나 정말 이것뿐이었을까요? 실제로 체르노빌에서는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작가인 히로세 다카시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더 큰 피해와 공포로 가득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100㎞가 떨어진 키예프시에 사는 사람들은 큰 사고가 아니다, 안전하다는 당국 발표를 믿었지만, 사고 후 보름이 지나고 나자 당국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키예프로 흘러 들어오는 드네프르 강물이 방사능에 오염되었으며, 매일 머리를 감고, 건물의 먼지를 털어내고, 세척하고, 도로에는 물을 뿌리는 등 필사적으로 거리를 씻어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은 건물 밖으로 나와서도 안 되고 일광욕을 할 수도 없다는 경고가 이어집니다.

체르노빌 발전소의 폭발이후 결국 햇빛, 공기, 물, 바람 중에서 어느 것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땅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외출에서 돌아오면 신발 바닥을 닦고, 코를 풀고, 온몸의 먼지를 털어내고 나서 집으로 들어가는 '법'이 생겼지만, 사람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방법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체르노빌에서 폭발이 일어나던 날, 핵구름은 기세 좋게 성층권까지 올라가 그곳에서 천장에 부딪힌 수증기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갔으며, 핵구름은 성층권을 둘러싼 하나의 막을 형성하였으며, 지구는 이미 '죽음의 재'로 완전히 포위당하였습니다.

"전세계 곳곳에 방목된 소들은 초원에서 풀을 뜯어 먹으면서 이 입자를 몸에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핵구름은 우뚝 솟은 이 산 저 산에 부딪히며 산간지대에 많은 비를 뿌렸다. 그 빗방울은 죽음의 재로 뒤덮인 나무들을 씻기고 다시 땅으로 스며들었다… 물은 논과 밭을 적셔주었고 봄을 맞이한 농토는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처음 지구의 상공을 둘러싸고 떠돌던 괴물들의 그물망이 이제는 지구를 옴짝달싹 못하게 죄고 있는 것이다......인간이 입에 넣고자 하는 모든 것들에 이 괴물이 침투해 있었다."(본문 중에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의 희생자는 이반과 이네사 그리고 프리프야트의 아이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의 재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 대부분은 그 위험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작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방사능 낙진의 위험성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인간의 상상력이 도저히 밀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신에 의해 창조된 생물이라면, 마땅히 신이 창조한 세계의 현상에 대해서 자연적으로 인식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고는 신이 창조한 세계의 현상이 아니었다. 바로 가장 신비한 신의 창조물인 원자를 파괴하는, 즉 신이 창조한 세계를 파괴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원자력 발전소가 꼭 있어야 한다고요?

신이 창조한 세계를 파괴하는 방사능의 위험을 제대로 알지 못한 어른들은 지금부터 30년쯤 전, 내가 이 책에 나오는 이반 또래였을 무렵 민방공훈련이 있던 날이면 낡은 교실 책상 아래로 들어가서 눈을 가리고 비닐봉지를 뒤집어쓰고 원자폭탄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도록 가르쳤답니다.

원자력 발전소의 폭발사고 가능성에 대하여 작가는 이런 위험한 예측으로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세계에 건설될 원자력 발전소는 수천 기로, 1기당 사고의 위험성은 2만년에 한 번이라고 나와 있다. 얼핏 읽어보면 2만년에 한 번이 극히 적은 것 같지만, 만약 2천기의 원자력 발전소가 있다고 계산한다면 10년에 한 번 사고가 일어나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의미가 된다."(작가의 말 중에서)

원자력이 가장 안전하고 깨끗하다고 믿고 선전하는 어른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책일 듯 합니다. 그러나 작가의 바람처럼 원자력발전소가 꼭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속고 있는 아이들에게는 인류의 희망과 미래를 위하여 그들이 다시 한 번 생각하고 토론할 수 있도록 돕는 좋은 책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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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공부법
지쓰카와 마유 외 지음, 송태욱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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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공부법은 고등학생 교환유학생으로 1년 동안 핀란드를 다녀 온 일본 여학생 지쓰카와 마유와 그녀의 엄마 지쓰카와 모토코가 함께 쓴 책이다.

이 책을 쓴 마유는 2004년 8월부터 약 1년간 핀란드 헬싱키에 있는 ‘헤르토니에미’ 고등학교로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다녀온 경험을 소개하고 있다.



요즘은 우리나라에도 경쟁, 등수, 서열이 없는 바람직한 교육 모델로 핀란드 교육이 많이 소개되고 있지만, 마유가 유학을 떠날 무렵만 하여도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에도 핀란드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에도 핀란드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마유가 유학을 떠난 2004년 무렵이라고 한다.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2000년부터 OECD가 실시한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한다.

“2000년 조사에서 독해, 수학, 과학 각 분야에서 상위권을 넘보던 핀란드 아이들이 2003년 조사에서는 드디어 독해와 과학에서 1위, 수학과 문제해결 능력에서 2위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었다. 이에 비해 일본은 자신감을 갖고 있던 수학에서 6위까지 줄줄 미끄러졌고, 2000년에 그럭저럭 8위를 했던 독해력에서는 14위까지 밀리고 말았다.”(본문 중에서)

2003년 핀란드가 세계 1위를 휩쓸 때, 같은 학업성취도 평가에서 한국은 독해력 2위, 과학 4위, 문제해결능력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OECD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만 놓고 보면, 한국교육도 성공적인 사례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핀란드 교육의 실상을 알고 나면 깜짝 놀라고 만다. 왜냐하면,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 최고를 자부하는 일본과 유럽 국가들을 제친 이 나라에는 학원도 없고, 과외도 없고, 서열과 경쟁은 물론이고 등수도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아울러 핀란드는 2000년대에도 매년 5%씩 고도성장을 구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일본 사람들이 핀란드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마유가 직접 가서 체험해 본 핀란드는 일본만큼 무시무시한 중학입시가 있는 나라도 아니고, 한국처럼 밤낮 없이 학원을 다니는 나라도 아니고, 중국처럼 엘리트 선발교육이 이루어지지도 않으며, 심지어 부모들의 교육열조차 높지 않은 나라였다고 한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세계적으로 교육열이 높은 동아시아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조건을 가진 나라였던 것이다.

학원, 등수, 교칙이 없는 핀란드 학교

핀란드에는 학원이 없다. 마유가 핀란드 친구들에서 일본 학교와 입시를 설명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바로 “수업 들으면 되지 학원을 왜 다녀?”하는 질문이었다. 실제로 핀란드에도 대학 입학 시험이 있으므로 시험을 위한 학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이나 한국처럼 중고등학교 내내 대학 입학을 위해 학원에서 죽도록 공부하는 입시전쟁은 없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그들에게는 학교란 ‘배우는 곳’이라는 인식이 확실히 자리잡고 있다. 때문에 일부러 학원까지 가서 배우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핀란드 학생들이 수업에 임하는 진지한 자세에도 나타난다. 그들은 수업 중에 절대로 졸지 않는다.”(본문 중에서)

핀란드 아이들은 중고등학교 무렵에 스스로 진로를 결정하는데,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따라서 핀란드에서는 누구도 반드시 학교에 가야 한다고 강제 하지 않기 때문에 학교는 공부하기 위해 가는 곳이라는 생각이 분명하다고 한다.

실제로 일본이나 한국 아이들은 ‘학교=생활’이 일치하고 있지만, 핀란드 아이들은 학교가 생활을 완전히 지배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고 한다. 우선 아이들은 하루 종일 학교에 있는 일이 거의 없고, 심지어 고3이 되면 학점 취득이 끝나 일주일에 두 번 정도만 학교에 간다고 한다. 일본이나 한국의 대학생들처럼 수업을 들을 때만 학교에 간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틀린 표현이다. 요즘 우리나라 대학생들은 입시전쟁을 마치고 나면, 취업전쟁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중, 고등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수업이 없는 시간에도 하루 종일 학교에 남아 공부를 하거나 학원을 다녀야하기 때문이다.

핀란드에서 고등학교 수업은 학기 초에 원하는 과목을 수강 신청하여 수업을 듣게 된다고 한다. 전 과목이 자유선택이기 때문에 자신의 취향과 적성에 맞는 수업을 선택하여 졸업에 필요한 72학점을 이수하면 되는 것이다.

3년간 취득한 학점은 졸업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 여부를 결정할 뿐이며, 다른 아이들과 서열화 시키는 등수라고 하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핀란드 학교에는 다른 아이와 자신을 비교하는 등수는 없고, 공부를 제대로 하였는지 확인하는 학점만 존재한다는 것. 1등을 제외한 모든 아이가 열패감을 느끼는 일본이나 한국과는 구조적으로 다른 상황이라고 한다.

핀란드 학교에는 교칙이 없다고 한다. 일본이나 한국학교에서는 매니큐어, 피어싱 같은 것은 물론이고 머리카락 길이나 치마길이 등도 모두 교칙으로 정해 규제하지만 핀란드에는 교칙이라는 것 자체가 없다고 한다.

한 마디로 학교라고 해서,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어른들에 비하여 특별히 더 금지하거나 규제하지 않는다. 피어싱이나 염색은 기본이고 선생님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아이도 있었지만 누구도 상관하지 않더라는 것.

그렇지만, 누구도 그런 아이들을 일본이나 한국처럼 ‘불량학생’이라고 말하지 않고, 피어싱과 염색을 하고 담배를 피우는 아이들도, 수업시간이 되면 선생님말을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집중해서 참여한다는 것이다. 공부나 성적과 상관없이 누구나 자신을 개성있게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지식보다 생각이 중요하고, 읽고 쓰는 것이 시험

등수가 없고 학점만 이수하면 되는 핀란드 아이들은 시험공부는 어떻게 할까? 마유는 핀란드 아이들의 시험공부는 암기가 아니라 읽기라고 한다. 시험을 준비하는 아이들은 모두 책과 자료를 읽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핀란드 아이들은 시험 전에 ‘공부한다’ 고 말하지 않고, 시험을 대비하여 ‘읽는다’리고 한다는 것이다. 마유가 만난 핀란드 친구들 시험 답안지를 보면 음악이나 미술 같은 과목도 꼭 마지막에는 에세이 문제가 출제 되어 있었고, 수학조차도 고급 수준이 되면 에세이를 쓰게 하더라고 한다.

심지어, 마유가 홈스테이를 하였던 후트넨 가에는 공부하는 책상조차 따로 없었는데, 책을 읽는 것은 침대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란다. 시험 직전에 핀란드 아이들은 두꺼운 책을 읽으며 시험 준비를 하기 때문에 ‘암기’는 없다는 것이다.

아울러 지식을 채워놓은 것만으로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는 것이 핀란드 시험이란다. 핀란드 시험은 지식보다 자기 자신의 의견을 얼마나 잘 표현했느냐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학교에서 공부나 시험은 책이나 자료에서 얻은 지식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는 훈련을 하는 과정이라는 것.


 

유급해도 괜찮아 알 때까지 배운다

핀란드 교육시스템은 5학기로 나누어져있고, 성적은 일본이나 한국의 대학학점 방식으로 주어진다고 한다. 1에서 10까지 10단계 성적에서 4가 두 개 이상이면 유급이 된다고 한다. 중학교의 경우 대체로 8과목을 공부하기 때문에 2과목이 4점이면 똑같은 공부를 1년 더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마유는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 유급된 아이들을 수 없이 많이 보았다고 한다. 당시 열네 살이던 후트넨 가의 막내 요카는 중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지 못해서 중학교 1학년에 머물러 있었고, 둘째 아케 역시 나이는 열여섯이었지만 2년을 유급하여 중학교 3학년이었다고 한다.

“핀란드인에게 낙제는 특별히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모르는 것을 확실히 배우지 않고 졸업하는 것이 더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이다.”(본문 중에서)

핀란드 아이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하여, 다시 말해 세상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을 위해 교육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도 유급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

아울러, 핀란드는 무상교육을 실시하기 때문에 유급을 하기 때문에 학부모가 더 추가비용을 부담하는 일도 없으며 아이들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다 배울 때까지 같은 것을 반복해서 공부할 뿐이라는 것이다. 핀란드는 꼴찌를 만드는 대신에 유급을 시켜서라도 꼭 필요한 것은 반드시 익히도록 한다는 것.

핀란드 부모들은 자식이 유급을 하여도 아이가 능력이 없다거나 문제아 취급을 하는 일이 없으며, ‘읽는 것’을 싫어하고 읽지 않았기 때문에 유급 당했다는 것을 스스럼없이 말한다는 것이다.

“교육의 역할은 결국 먹고살아갈 수 있는 직업을 갖도록,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도록 돕는 것이고, 직업을 구하는 일도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만날 때까지 천천히 찾아나가면 되니까, 부모가 이래라저래라 간섭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본문 중에서)

“뭘 좋아하고 뭘 하고 싶어 하고 뭘 제일 잘 하는지는 아이마다 다 달라요. 유급을 시키는 것 또한 성적이 충분히 좋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충분한 실력을 갖추지 못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하면 그것을 개선할 수 있는지를 선생님과 학생, 학부모가 함께 생각해보기 위한 시간을 갖기 위해서예요.”(본문 중에서)

이런 생각이 핀란드 부모들의 일반적인 교육관이라는 것이다. 아이들 중에는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읽고 쓰는 일 대신에 무언가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이 생기면 그 뿐이라는 그들 일반적인 생각이란다.

따라서 핀란드 부모들의 걱정은 성적이 나쁘다거나 놀기를 좋아한다 같은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장래를 결정하지 못하는 것이 걱정이라고 한다. “핀란드 학생들은 중학생 정도의 이른 시기부터 인턴십 등을 거치며 자신의 진로를 명확히 결정해나간다”는 것이다.

미래를 꿈꿀 시간을 허락하는 나라

한마디로 핀란드 교육에는 시간제한이 없다. 남들 보다 시간이 좀 더 걸려도 필요한 것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몇 살까지 무엇을 해야 한다는 연령제한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도 몇 살까지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한다고 선을 긋지 않는다. 대학에 입학하는 것도 졸업하는 것도 자신이 하고 싶을 때 하면 된다.”(본문 중에서)

뭔가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을 찾을 때까지 연령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다보니 기업에서 사원을 모집할 때도 대부분의 경우는 연령제한을 두지 않는 단다.

따라서 핀란드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학에 진학하는 사람이 들물 만큼 ‘바리부오시’(휴식하는 해, 유예기간)는 일반적 일이라고 한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경험하면서 좀 더 구체적인 장래 계획을 세우는 유예기간을 대분이 거친다는 것이다.

지쓰카와 마유가 소개한 <핀란드 공부법>을 읽으며 한국의 몇몇 대안학교와 대안교육을 여러 번 떠 올렸다. 가만히 책을 읽으며 생각해보면 핀란드의 모든 학교는 한국의 대안학교처럼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놀면서 공부하는 핀란드 아이들이 밤낮없이 공부하는 일본과 한국을 가뿐히 제치고 세계 최고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찌 부럽지 않을 것인가?




“영어, 국어는 물론이고 화학, 생물, 음악까지 에세이, 즉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것이 핀란드 고등학교의 일반적인 시험형식이다.......핀란드에서는 이러한(일본이나 한국 같은) 구멍 메우기 문제가 아예 없다.”(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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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슐라와 그림책 이야기
도로시 버틀러 지음, 김중철 옮김 / 보림 / 2003년 3월
평점 :
품절


<쿠슐라와 그림책 이야기>의 주인공 쿠슐라 요먼은 염색체 이상으로 육체와 정신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입니다. 보지도, 만지지도, 입으로 느끼지도 못하는 모든 감각기관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아이로 태어났지만, 누구도 생각하지 않은 그림책 읽어주기 라는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장애를 극복해나가는 이야기이지요.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1997년 스물다섯 살이 된 쿠슐라는 흔히 우리가 말하는 육체적, 지적으로 능력이 완전한 '정상인'이 되지는 않았습니다만, 좀 더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갈 수 있는 '정상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쿠슐라의 지적 능력이 완전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때문에 삶에 대한 충족감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쿠슐라는 잘 읽고 잘 쓰며, 컴퓨터로 능숙하게 글을 쓰기도 한다. 편지를 잘 쓰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며 지금은 목공 기술을 배운다. 하지만 손을 자유로이 쓰기가 어려워서 섬세한 손동작이 필요한 일은 하지 못한다."(본문 중에서)

스물다섯 살이 된 그녀는 다른 장애인 네 명과 함께 생활하고, 대부분의 집안일을 자신들의 힘으로 꾸려가며, 정원을 가꾸고 지역사회를 돕는 일에도 참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녀는 정기적으로 도서관, 극장, 교회, 바닷가와 수영장에 가는 걸 즐기며, 아이를 돌보는 일에도 특별한 관심이 있다고 합니다.

그녀가 '정상인'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쿠슐라 스스로, 그리고 그 가족들과 주변사람들이 그녀가 가진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입니다. 마치 눈이 나쁜 사람이 안경을 쓰고,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사람이 보청기를 사용하는 것처럼 장애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지요.

쿠슐라가 태어났을 때 두 손에 손가락이 하나씩 더 달려있었고, 뇌혈종으로 인하여 심한 활달에 걸렸으며 호흡이 고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주일 후에 퇴원하였으나 끊임없이 보채고 숨쉬기를 힘들어하였으며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아이는 시각과 청각에 이상이 있었고, 이따금 발작성 경련을 일으켰으며 몸무게가 제대로 늘지 않고 귀와 목이 반복적으로 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병원 진단 결과 심장에 구멍이 나서 천식이 생겼고 습진성 발진도 생겼으며 콧구멍이 좁아 호흡장애도 나타났다고 합니다.

심각한 장애 있었지만 그림책을 좋아했다.

3개월이 되었을 때 팔을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하였으며, 머리를 들어 올리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물건에 초점도 맞추지 못하였습니다. 정상아보다 발육이 훨씬 뒤떨어졌고, 등과 다리는 흐늘거렸으며 자주 비정상적인 경련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쿠슐라의 부모는 누가 봐도 심각한 장애를 가진 어린 쿠슐라에게 4개월째부터 책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이때는 쿠슐라가 얼굴 가까이 있는 사물을 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시기다. 밤낮으로 깨어 있는 아기와 기나긴 시간을 무엇을 하며 보낼까 생각하던 끝에 책을 보여 주게 된 것이다. 사실 절망에 빠져 아무것이나 해 보자는 마음도 있었다. 쿠슐라는 책을 보려고 했고 귀 기울여 들었다."(본문 중에서)

이후 쿠슐라는 요도감염과 신장 수신증, 뇌파이상으로 10주 동안이나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게 됩니다. 병원 생활을 하는 동안 부모들은 쿠슐라가 그림과 기호에 흥미를 나타내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입원생활을 마치고 퇴원한 뒤부터 깨어있는 긴 시간 동안 그림책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합니다.

쿠슐라의 어머니는 밤낮 없이 책을 읽어주는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9개월 된 아기에게 규칙적으로 책을 보여주는 일 역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으며, 또 다른 이유는 어차피 쿠슐라가 다른 정상아들과 같은 활동을 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어 주는 동안 쿠슐라는 어른 무릎에 앉아 등을 기댄 채 읽어 주는 책에서 가장 알맞은 거리에 눈을 두었다. 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주었고, 한 장 한 장씩 책을 쿠슐라의 눈에 가까이 보여 주었다."(본문 중에서) 

<쿠슐라의 그림책 이야기>는 이후 쿠슐라가 3년 9개월이 될 때까지 매시기 신체적, 정신적 발달과정과 그 시기에 읽은 그림책의 종류, 그리고 각각의 그림책에 쿠슐라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어떤 책을 더 좋아하고 흥미롭게 받아들였는지, 그리고 정상적 발달을 보이는 아이와는 어떤 점이 달랐는지를 비교하여 깜짝 놀랄 만큼 자세히 관찰하여 기록한 책입니다. 

아이가 자라는 것, 날마다 작은 기적을 경험하는 것

쿠슐라의 외할머니이기도 지은이 도로시 버틀러가 기록한 쿠슐라가 성장해가는 모습을 책을 통해 읽어보면, 독자들은 아이가 자라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깨닫게 됩니다. 

아이가 태어나 조금씩 자라면서 몸을 뒤집는 것, 배밀이를 하는 것, 기는 것, 서는 것, 걷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사건인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누구나 다 겪는 이런 과정을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더 늦게 경험하는 쿠슐라 가족들에게는 훨씬 더 경이로운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회복하면서 장애 있는 아이의 삶을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하였습니다.

보통 아이들은 14개월이면 어른의 도움을 받지 않고 걷고, 24개월이면 온몸을 조정하여 잘 걷고 달리기도하며 잘 넘어지지 않는데, 쿠슐라는 24개월쯤 되어 뒤뚱거리며 걷게 되었고, 30개월쯤 되어 어색하지만 무난하게 걸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걷는 모습은 특이했다. 몸은 약간 뒤로 기우뚱하고, 팔은 구부러진 채 뒤로 흔들거렸고, 머리는 균형을 잡기 위해 앞으로 내밀었다. 넘어질 때 팔을 쓰지 못하고 자세가 불안정했기 때문에 사고가 자주 났다."(본문 중에서)

어쨌든 다행스러운 것은 쿠슐라가 보통 아이들보다 늦기는 하였지만, 보통 아이들과 비슷한 발달과정을 꾸준히 쫓아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쿠슐라는 똥오줌을 가리는 일도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늦었습니다.

근육이 약하고 병에 자주 걸리며 방광염에 걸리기 쉬웠으며 신장 결함이 있었기 때문에 부모들은 쿠슈라에게 배변훈련을 시킬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33개월쯤에 쿠슐라가 똥오줌을 누는 간격이 길어지자 이제 훈련할 때가 온 게 아닌가 생각했다. 사실 쿠슐라는 똥오줌을 조절하는 걸 일주일 만에 다 배웠다."(본문 중에서)

쿠슐라는 보면, 아이들 성장과정에 있어서 보통이나 평균이라는 것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보통 아이들 보다 늦다는 것이 아무 의미없는 일이지요. 쿠슐라는 조금 늦게 배웠지만, 겨우 일주일 만에 똥오줌을 가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늦게 피는 꽃이 더 아름다울 수도 있다

쿠슐라 사례는 아이들에게는 저 마다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때가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첫돌이 지나자마자 아이들에게 배변훈련을 시키는 부모들이 있고, 친구나 이웃아이들보다 조금이라도 발달이 뒤처지면, 큰 일이 나는 것처럼 불안해하는 부모들에게 쿠슐라 사례는 좋은 교훈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 부모들은 아이의 발달은 무조건 빠를수록 좋다는 오류에 빠져있습니다. 따라서 일찍 피는 꽃만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늦게 피는 꽃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오히려 불안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쿠슐라는 보통 아이들에 비하여 모든 것이 늦었지만, 결국 모든 것을 다 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쿠슐라는 늦게 피는 꽃이었지만, 일찍 피는 꽃들과는 다른 아름다운을 지닌 꽃으로 피어난 것 입니다.

<쿠슐라와 그림책 이야기>는 그림책이 아이의 언어 발달과 지능 발달에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를 주로 설명하고 있지만, 한 편으로는 그림책이 아이의 삶을 넓혀주고 또한 풍요롭게 해주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이 책에 나오는 방법은 평범해 보입니다. 보지도, 만지지도, 입으로 느끼지도 못하는, 모든 감각기관이 제 기능을 못하는 아이를 품에 안고 단순히 책을 읽어주었다는 평범한 방법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보통 부모들은 아이들을 잘 키우고 싶어 하면서도 쿠슐라를 키운 간단하고 평범한 방법을 너무나 힘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쿠슐라에게 일어난 일은 마치 '기적'이 일어난 것이라고 말하기 쉽습니다.

사실, <쿠슐아와 그림책 이야기>는 장애아를 위한 이론서가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모든 아이들에게 소중한 책입니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게 하는 것이 좋다는 차원을 넘어서,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 타고난 재능과 장점에 주목하고 장점을 발달시키는데 주목할 것을 강조하는 책입니다.  

이 책을 읽는 한국 독자들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열쇠'가 될 수 있다는 편견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린 자녀를 둔 한국의 많은 엄마들이 '영어 조기 교육' 만큼이나 공을 들이는 조기교육이 바로 '독서교육'이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책을 읽어주라는 것이 아니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쿠슐라에게는 지적장애를 극복하고 평범한 삶으로 나아가는데, 그림책이 좋은 도구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을 뿐입니다. 만약, 쿠슐아에게 육체적인 장애가 없었다면, 그리고 쿠슐라가 신체활동에 더 흥미를 보였다면, 쿠슐라 부모는 아이가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도록 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쿠슐라는 정신없이 뛰어노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장애를 훌륭하게 극복해냈을지도 모르는 일이구요. 

실제로 쿠슐라 부모는 아이가 2년 6월 때부터 꾸준히 수영을 가르쳤고, 쿠슐라가 수영을 잘 배우고 또 즐거워한다는 것에 주목하였다는 것 입니다. 어른이 된 후에도 그녀는 수영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녀의 부모는 그림책이던, 수영이던 중요한 것은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는 것입니다.

올림픽을 휩쓴 수영선수 마이클 펠프스가 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ADHD)를 극복하기 위하여 수영을 시작하였는데, 물에 얼굴을 담그지 못하여 '배영'부터 시작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만약, 자유형 - 배영 - 평형 - 접영과 같은 일반적인 순서만 고집하였다면, 세계적인 수영 영웅은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 책은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 모든 아이들에게 무조건 그림책을 읽어주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책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타고 난 특성과 발달에 맞는, 아이가 흥미를 보이는 활동을 선택하라고 말 하고 있습니다. 다만, 쿠슐라에게는 그것이 그림책이었던 것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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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인문학 - 세상과 소통하는 희망의 인문학 수업
고영직 외 지음 / 이매진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소외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강좌가 처음 시작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미국 학자 '얼 쇼리스' 교수가 시작한 '클레멘트 코스'이다.

우리나라에도 서울시를 비롯한 수도권 자치단체와 대학, 사회교유기관에서 가난한 사람들과노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강좌를 개최하고있는데, 얼 쇼리스가 시작한 '클레멘트 코스'가 그 원조라고 할 수 있다.

'클레멘트 코스'란 미국에서 시작된 일종의 실험적 '사회교육' 으로 빈민과 노숙자들에게 인문학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그들이 세상을 바꾸는 일에 나서도록 하는 프로젝트이다.


2007년에 열린 어느 대안교육 강연회에서 우연히 국내에서도 노숙자를 위한 인문학강좌를 비롯한 소외 계층을 위한 여러 인문학 강좌가 진행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행복한 인문학>은 바로 관악인문대학, 경기광역자활지원센터, 성프란시스대학, 구세군브릿지센터, 의정부교도소, 안양교도소를 비롯한 국내 여러 곳에서 개최된 인문학 강좌에서 격은 크고 작은 '사연'을 담은 책이다.

여러 지역에서 개최된 인문학 강좌는 실천인문학, 현장인문학, 평화인문학, 시민인문학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고, 참가자 역시 노숙인, 자활근로자, 교도소 수용자, 지역주민 등 다양한 사람들과 이루어졌다.

가난이 대물림되는 이유

열 세 사람이 쓴 인문학 강좌의 경험에는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누구도 이 강좌를 실제로 경험해보기전에는 인문학이 사람들에게 '힘'이 될 줄 몰랐다는 것이다.

"살 집과 가족과 일터를 잃고 떠돌면서 생의 밑바닥에 내던져진 사람들에게 한 편의 시가 무슨 의미가 있을지 나도 자신할 수 없었다. 한 편의 시, 한 줄의 글이 한 그릇의 밥과 한 덩어리의 빵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말해도 되는지 나는 속으로 걱정하고 있었다."(본문 중에서 - 도종환)

"당장 한 끼 식사, 하룻밤 잠자리가 절실한 처지인 사람들을 강의실에 데려다 앉혀놓고 '공부'를 하게 만들다니, 그게 과연 가능할까. 정상적인 일상생활도 감당할 능력이 없는 듯해 보이는 노숙인들에게 언필칭 대학교육 방식 수업이란 제대로 이루어지기나 하겠는가. 더구나 취업에 필요한 실용과목도 아니고 하필이면 인문학이라니? 요즘 이 나라 대학에서조차 일방적으로 내몰려 천대받고 있는 바로 그 인문학 과목들을 말이다."(본문 중에서 - 임철우)

도종환, 선생과 임철우 선생뿐만 아니라 소외 계층과 만나 인문학 강좌를 진행한 필자 모두가 처음엔 대개 비슷한 생각을 하였다고 한다. 다만, 얼 쇼리스와 같은 외국에서의 성공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반신반의하는 상황이었을 뿐이다. 그럼 이들의 이런 생각은 어떤 계기로 바뀌었을까?

한 강좌, 두 강좌 수업이 진행되면서 인문학 수업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사회를 새롭게 보는 경험을 통해 새로운 기쁨과 삶의 에너지를 찾아가는 수강생들을 만나면서 자신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하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이 폭력과 온갖 적대적인 사회적 조건들에 포위된 채 가난을 대물림하며 살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세상과 타자와 올바로 소통하는 방식을 배울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타자와 소통이 가능하려면 먼저 자신에 대한 성찰과 자존감을 스스로 확보해야 하는데, 바로 인문학이 그것을 가증하게 해줄 것이라고. 인문학이 가진 최고의 미덕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찰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 성찰적 사고는 자신에 대한 자각과 함께 타자와 사회를 성찰하는 일로 이어짐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를 꽃피게 할 것이라고."(본문 중에서)

그렇다. 소외 계층은 인문학을 통해 성찰과 자존감을 회복함으로써 새로운 삶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성찰은 자기 삶과 자신이 속한 사회를 새롭게 돌아봄으로써, 가난을 비롯한 온갖 어려운 사회적 조건들이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런 성찰의 과정은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통해 '자존감'의 회복으로 이어지게 된다.

철학자 우기동은 단순한 인문학 교육과정은 기능교육과 교양교육을 넘어서는 삶의 가치와 주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이며 사회 구성원으로서 당당한 요구이고 정당한 권리행사라는 것이다.

"이런 교육과정을 통해 어떤 상황에도 자기의 삶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인식하는 자아 존중감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삶도 그런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는, 그래서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공동체적 의식을 갖고 함께 살아가는 인문정신을 체득하게 하는데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본문 중에서)

"자신들의 무지 때문에 사회에서 어렵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이들도 이것이 구조적 문제라는 것을 파악하게 되었고 우리 민족이 분단된 것도 외세의 간섭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본문 중에서)

이처럼 인문학강좌는 단순히 교양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자각시키는 학문이었던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을 떨치고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공안정권이 만들어낸 한국적 표현을 사용하면, 인문학 강좌는 '의식화'교육이었던 셈이다.

시민인문학은 의식화 교육인가?

이른바 의식화 교육의 세례를 입어 세상에 대하여 새롭게 눈뜬 경험 때문에 <행복한 인문학>을 읽는 동안 '의식화 교육과 별로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였다. 실제로 소외계층에 대한 교육은 이미 1970~80년대에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사회과학이 중심이 된 의식과 교육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적이 있다.

철학자 이병수는 의식화 교육과 인문학 강좌에서 진행한 철학교육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의식화라는 개념 자체는 우월과 열등의 이분법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억압적인 성격을 지닌다. 가르치는 자의 전문 지식과 피교육자의 생활 경험의 식견이 차등 없이 소통될 수 있는 교육방식에 대한 고민이 없으면, 결국 철학교육도 과거의 의식화 교육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본문 중에서)

그는 소외계층이 단순히 수동적인 수혜자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주체적 인간으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육을 통한 사회변혁은 전위의 지도를 받는 민중이 아니라 길들여진 자아를 거부하고 스스로 세상과 마주하면서 세상을 읽을 수 있는 자기 성찰적 능력을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되는 존재를 상정한다."(본문 중에서)

즉, 인문학교육은 의식화 교육이 지향하는 종래의 혁명적 방법을 통한 사회변혁이 아니라 교육을 통한 점진적인 전망과 아울러 삶의 현장을 새롭게 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는 '일상적 삶'에 주목하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자 이병수는 소유가 지배하는 대신 소통적 관계가 일상이 되고, 통치 대신 자치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 권력 정치 대신 생활정치가 동력이 되고, 중앙과 지방 대신 지역과 지역이 연대하는 삶의 현장과 삶의 방식의 재구성에 주목하고 있다.

비이성적인 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

또한 평론가 최준영은 '나눔'의 관점에서 시민인문학을 단순히 지식인의 지식 나눔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고 평가한다. 그는, 시민인문학이 소외 계층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은 생각과 마음의 변화뿐만 아니라 경제적 능력의 향상으로도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제4 섹터라고 불리는 '사회적 기업'에 주목하고 있다. 기술이나 전문지식이 없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빈곤 계층에게 적절한 일자리를 제공하고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회적 기업이 양극화를 해소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양극화 시대의 화두가 빈곤의 문제 이기는 하지만, 경제적, 정치적 관점에서만 바라보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빈곤은 분배와 정책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인문학의 관점에서는 '관계의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양극화 시대를 해소하는 것은 사회시스템과 빈곤계층의 관계의 변화를 모색하는데 주목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성과 논리 대신에 비이성적 추진력과 열정적 감성으로 뭉친 '비인성적인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진보한다는 것이다.

<행복한 인문학>은 도종환 선생의 추천사, 임철우 선생의 프롤로그, 최준영 선생이 쓴 에필로그 그리고 본론에 해당되는 3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는 글쓰기 - 행복한 삶 쓰기, 2부는 철학 - 세상살이 인문학과 삶의 철학, 3부는 역사 - 역사와 소통하는 인문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다른 곳에서 주제에 맞는 강의를 진행하였던 필자들의 '경험'과 '사연'이 담겨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 날, 서울광장 노제의 제관을 맡았던 도종환 선생은 우리가 만나는 인생의 벽을, 자기 앞을 가로막는 벽을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꾸면서 넘어가는 담쟁이와 같이 마주하자고 한다. 국민과의 소통을 닫은 '명박산성'도 담쟁이로 휘감아 넘어갈 수 있을까?

소통과 정의가 사라진 '명박산성'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행복한 인문학>에서 찾아낸 울림이 큰 글 한 줄을 마지막으로 소개한다.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는 정의가 아닐지 몰라도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은 결코 정의가 아니다."(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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