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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남편 - 책꽂이에서 연애편지를 꺼내다
허정도 지음 / 예담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소리 내어 책을 읽어보셨나요? 세상 많은 엄마들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기를 위하여 소리 내어 책을 읽어줍니다.
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자라는 때부터 더 이상 엄마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보채지 않을 때까지 책을 읽어줍니다. 아직 드물기는 하지만 요즘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아빠도 적지 않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기가 좀 더 자라서 혼자서 책을 읽을 무렵이 되면 대부분 엄마, 아빠는 책 읽어주기를 그만둡니다.
가끔 영화나 소설에서 아버지를 위하여 책을 읽는 아들이나 엄마를 위해 책을 읽는 딸의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만,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정성을 다하여 책을 읽는 일은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더군요.
책 읽어주는 남편? 이 책을 소개할 때 가장 많이 되받는 질문 중의 하나가 올 초에 개봉한 독일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책 읽어주는 남자'를 말하는 거냐는 물음입니다. 독일 소설 <더 리더>나 영화 '책 읽어주는 남자'와 아무 상관없는 이 책은 건축가이자 경남도민일보 대표를 지낸 언론인 허정도가 쓴 독서일기 같은 글입니다.
아내를 위해 소리 내어 책을 읽는 남편?
한 마디로 말하자면 영화나 소설이 아닌 실화라는 이야기입니다. 독일 소설 <더 리더>나 올해 초에 개봉한 영화 '책 읽어주는 남자'가 유명해지기 훨씬 전부터 아내를 위하여 매일 소리 내어 책을 읽어주던 남편이 쓴 책입니다.
<책 읽어주는 남편>은 지은이 허정도가 그의 아내 정미라에게 소리 내어 책을 읽어주는 과정에서 주고받은 책에 관한 이야기와 그 책으로 인해 오랜 기억 속에서 집어 낸 삶을 담은 책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부부가 함께 읽은 스무 권 책의 '정수'를 모은 책이기도 하고, 두 부부가 함께 살아온 삶을 담은 기록이기도 합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이 책 '날개'에는 지은이와 나란히 그의 아내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독자들도 이 책을 읽어보면 왜 두 사람이 나란히 소개되어 있는지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습니다. 글쓴이는 남편이지만, 아내와 함께 책을 읽고, 아내와 함께 나눈 이야기 그리고 아내와 함께 살아온 삶이 바로 이 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은이는 '책 읽어주는 남편'으로 소개되어 있고, 그의 아내는 '듣는 아내'로 소개되어 있는데, 사실은 책을 읽어주는 '단순노동'(?) 보다 더 '내공'이 필요한 일이 잘 들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간혹 아내가 읽어줄 때도 있지만 보통은 내가 읽습니다. 내가 잘 읽어서가 아니라 듣는 데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듣기를 시작해 빠르면 5분, 늦어도 10분 안에 까무룩 잠이 듭니다.......그러니 몇 시간 동안이나 졸지 않고 무던하게 듣고 있는 아내가 놀랍습니다." (본문 중에서)
책 읽는 소리를 듣는 일은, 그냥 혼자서 책을 읽는 것 못지않게 집중력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자칫 조금만 방심하면 이내 딴 생각에 젖어들거나 잠을 물리치지 못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책, 읽기가 쉬울까? 듣기가 쉬울까?
허정도가 쓴 <책 읽어주는 남편>은 아주 독특한 형식으로 씌어진 '독후감'입니다. 마치 소설을 보는 것처럼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오고갑니다. 과거는 책을 읽는 부부의 삶이고, 현재는 함께 읽는 책 속에 있는 오늘입니다.
존 우드가 쓴 <히말라야 도서관>편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됩니다. 아내에게 소리 내어 책을 읽어주는 일의 진행과정, 박경리 선생이 돌아가신 직후 작가가 쓴 '토지'를 소리 내어 읽으며 추모한 이야기, 그 다음에는 존 우드의 히말라야 도서관 이야기에서 끄집어낸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히말라야 도서관>에 씌어진 존 우드의 삶을 소개하는 과거에서 빠져나오면, 책 읽은 소감을 나누는 부부의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이런 독특한 구성 때문에 책을 읽어보면 그냥 독후감을 보는 느낌보다는 꼭 소설처럼 새로운 이야기를 한 편 읽고 있는 듯한 느낌에 빠져들게 됩니다.
아울러 허정도가 쓴 <책 읽어주는 남편>은 여느 보통 독후감보다 훨씬 끈끈하고 깊은 맛이 배어 나오는데 그것은 아마 어렵고 힘겹고 가난했던 삶의 기억에서 묻어나오는 따뜻함과 애절함 때문인 듯합니다.
신경숙이 쓴 소설 <리진>을 읽는 동안 부부가 주고받은 이야기는 '듣는 아내' 정미라가 기억하는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에 관한 기억 한 자락입니다.
"아내가 말한 초등학교 때 은사는 조용욱 선생님으로 육지에서 섬으로 들어와 교사생활을 했다 합니다. 설령 아이들을 방치해 놓는다 해도 누구도 간섭하지 않을 섬마을 작은학교에서 조용욱 선생님은 열정과 사랑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답니다. 편모 슬하에 살림살이마저 가난했던 아내는 차별 없이 대해준 선생님이 더욱 고마웠던 모양입니다."(본문 중에서)
소리 내어 부르는 것만으로도 애틋한 이름들
랜디 포시가 쓴 베스트셀러 <마지막 강의>를 읽으며 '책 읽어주는 남편' 허정도가 기억해낸 아버지에 관한 기억 역시 따뜻함과 애절함이 묻어납니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아버지가 아직 어린 세 아이를 위해 '마지막 강의'를 읽으면서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떠 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입니다.
"태어나보니 식민지 시골 빈농의 아들이었고, 교육받지 못했으니 출세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일제기와 전쟁을 거치고 나니 마흔이 되었습니다. 희망없는 시대에 청춘을 보냈고 가난과 더불어 일생을 보냈습니다. 세상은 아버지가 감히 희망 한 번 품어보지 못할 만큼 어둡고 거칠었습니다." (본문 중에서)
"사춘기 때, 리어카로 행상하시는 아버지를 부끄러워한 적이 있습니다. 길에서 아버지를 만나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괜히 움츠러들었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반기셨지만 못난 아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아버지가 부끄럽다니..., 그렇게 힘들여 번 돈으로 먹고 마시고 입고 자고 공부까지 하는 자식 놈이 말입니다." (본문 중에서)
모두가 힘든 그 시절, 가난한 삶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좀처럼 자식들에게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 어려웠습니다. 세상 많은 아들들이 그 시절 아버지를 부끄러워하였기 때문에 훗날 철이 들고나면 사춘기 시절의 어리석음을 용서받고 싶어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곁에 없기 때문에 더 안타까워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고혜정이 쓴 <친정엄마>를 함께 읽으며 기억해 낸 '책 읽어주는 남편'의 장모, '듣는 여자'의 친정엄마에 관한 기억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이미 30여 년을 살면서 서로 못다한 이야기가 남아있지 않을 줄 알았는데 함께 책을 읽으며 기억해보니 아직도 서로 못다한 기억들이 적지 않더라는 것 입니다.
"아내는 생후 20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젊은 홀어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체구가 작고 몸이 건강하지 못했던 장모는 거제 바닷가의 작은 마을에서 땅 한 평, 밭 한 뙈기도 없이 큰아들과 밑으로 네 딸을 혼자 힘으로 키웠습니다........ 아버지 얼굴을 모르는 막내딸이 측은해서 어머니는 아내에게 각별했고 아내는 그 사랑을 받아먹고 자랐습니다."(본문 중에서)
함께 소리 내어 책을 읽는 부부는 책으로 인해 더 많은 삶을 공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책 한 권을 읽을 때마다 수 없이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게 된다는군요. 단숨에 읽어내는 단편뿐만 아니라 긴 장편을 읽을 때에도 한 시간 혹은 두 시간을 소리 내어 읽고 쉬는 동안에는 책으로 인해 떠올리게 되는 젊은 날의 기억을 공유하게 되었답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아내와 차분하고 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내와 아내의 어머니 사이에 감추어 두었던 서러움과 아픔,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는 어머니를 향한 애잔한 그리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풀어졌고 그 속에 아내의 회한이 녹아나왔습니다." (본문 중에서)
지은이는 이것을 '책이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위대함'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과거의 기억으로만 돌려놓지는 않습니다. 책은 부부에게 새로운 경험 세계를 열어주기도 새로운 인생계획을 세우게도 합니다. 책 한 권 글 한 줄로 인생이 바뀐 사람이 어디 이 부부뿐이겠습니까?
마음을 움직이게 위대한 힘을 가진 '책'
지은이는 아내와 함께 책을 읽으면서 기대하지 않았고 예측하지 못한 재미들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친정엄마>를 읽으며 붉은 팥칼국수가 전라도 음식이란 걸 알게 되었고 나이 오십이 되어 처음으로 팥칼국수를 먹어보고, 김남희가 쓴 히말라야 여행기를 읽고는 안나푸르나 트레킹 계획을 세우기도 하더군요.
부부가 함께 앉아 소리내어 책을 읽어주고 들으며 삶을 윤택하게 하는 또 다른 재미를 발견한 부부는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유산도 책이며, 소리내어 책을 읽어주고 들어주는 삶도 물려주고 싶어 합니다.
"우리 부부는 훗날 아이들에게 읽은 날짜가 적힌 책들을 남겨주기로 했습니다. 한술 더 뜬 아내의 제의를 받아들여 좋은 책 한 권을 택하여 읽는 소리를 녹음하기로 약속하기도 했습니다."(본문 중에서)
법정 스님이 쓴 <아름다운 마무리>를 읽으며 가장 반가웠던 대목이 바로 자식들에게 부모가 함께 읽은 책을 삶의 자취와 정신적 유산으로 남겨주라는 말씀이었다고 합니다. 이미 그리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던 터라 스님의 말씀이 더 마음에 와 닿았다고 합니다.
"자식에게 책을 유산으로 물려주고 싶다"
시인 도종환 선생은 이 책 추천사 첫 머리에 "부부가 이렇게 나이 들어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라고 썼습니다. 책을 함께 읽으며 주인공들을 따라 어린 시절로 돌아가기도 하고, 인생의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눈이 퉁퉁 붓도록 같이 울기도 하고, 다가올 시간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하는 이 부부의 모습이 부러웠다고 합니다.
지은이가 아내에게 책을 읽어주기 시작한 것은 '안부대상포진'으로 꼼짝 못하고 누워있는 아내를 위해 "남편이 할 수 있는 도리와 의무 혹은 서비스 차원의 이벤트 비슷한 것"이었지만 함께 책을 읽기 시작한 후에는 생각하지 못하였던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우연히 시작한 소리 내어 책읽기에서 삶의 또 다른 재미와 의미를 발견한 부부는 꾸준히 함께 책을 읽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 그들이 찾은 낭독이 주는 행복한 경험을 독자들과 나누기 위하여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책과 삶, 추억과 현실을 넘나드는 이 책은 한 번 손에 쥐면 놓을 수 없을 만큼 흡입력이 있지만 지은이가 읽은 책 속의 주인공과 지은이의 삶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며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는 책이기도 합니다.
지은이는 간결한 문장을 좋아합니다. 스스로 읽은 책을 소개하면서 여러 번 간결한 문장이 좋다고 밝혔습니다. 그가 쓴 책 역시 군더더기 없이 간결합니다. 그래서 읽기에 더 편합니다.
지은이가 아내와 함께 읽은 스무 권의 책을 소개하면서 인용한 글들은 그가 가진 삶의 철학과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똑같은 책을 읽어도 사람마다 서로 다른 감동과 교훈을 갖게 되는 것은 살아가는 삶과 철학 그리고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가 읽은 많은 책을 저도 읽었습니다. 저 역시 밑줄을 긋고, 책장을 접어놓은 곳도 많습니다. 지은이가 <책 읽어주는 남편>에서 인용한 스무 권의 책에서 찾아낸 인용문을 보면 지식인으로서 올바르고 곧은 삶을 살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 여름휴가에 여러분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책 한 권 소리 내어 읽어보지 않으시렵니까? 다른 책도 좋지만, 소리 내어 읽는 책 읽기의 특별한 즐거움을 소개하는 <책 읽어주는 남편>을 읽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