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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 시대의 격랑을 헤쳐나간 젊은 영혼들의 기록
황광우 지음 / 창비 / 2007년 6월
평점 :
사람을 빨아드리는 글쓰기는 황광우가 가진 남다른 재주인가보다.
1985년에 대학에 입학한 나는 참 많은 후배들에게 그가 쓴 책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와 <들어라 역사이 외침을>을 읽게 하였다. 그리고, 대학을 마치고 혹은 감옥살이를 하고 나서는 반드시 '현장'으로 옮겨야 한다는 중압감을 가졌던 마지막 세대였다.
대학 3학년이 되면서부터 시작한 노동야학에서도 내가 만나는 백여명이 넘었던 노동자들과 함께 읽었던 입문서 역시 '소삶'과 '들역'(우리는 그 때 이렇게 불렀다.)이었다. 이 두 권의 책은 출간되자마자, 소위 의식화교육의 입문서로 자리매김하였다.
아주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철학공부의 입문서였던 <철학에세이>를 쓴 사람도 황광우와 함께 활동하던, 조성오라는 사실도 알게되었다. 황광우와 함께 활동하던 이들이 쏟아낸 숱한 번역서를 읽고 공부하였던 이들이 이른바 '386세대'다. 나는 단 한번도 그들 만난적이없지만 80년대 후반 사회과학서점을 통해 그가 참여했을 인민노련기관지를 꼬박 꼬박 사설 읽은 적이 있다.
이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는 황광우의 개인사와 같은 책이다. 그렇지만 단순한 자서전이나 개인사는 아니다. 개인사의 형식을 빌었기 때문에 단숨에 읽어내릴 수 있을 만큼 편안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읽는이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마치 밤을 세우면서 70년대, 80년대 활동가들의 무용담을 듣는 것 같은 재미가 있다.
그 내용이 어두운 과거와 시대의 아픔을 기록하고 있지만, 지은이 특유의 '혁명적 낭만주의'가 스며있기 때문인지 큰 패배보다는 작은 승리를 읽으면서 기쁨을 맛 볼 수 있었다.
우리는 황광우를 통해서 혹은 황광우의 지인을 통해서 혹은 그가 찾아낸 역사의 기록을 통해서 그 시절 전사들, 운동가들의 진면목을 확인하게 된다. 윤한봉, 김남주, 권인숙, 박종철, 전희식.......과 같은 이들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고, 지금도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나는 최근 6.10민주항쟁 20주년을 기념하여, 지역 운동사를 정리하는 작업 중 일부를 맡았었다. '기록'이'기억'을 이긴다는 말이 있지만, 당시는 기록을 남기지 않는 시절이었다. 기록은 곧 범죄의 증거가 되는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지역 운동을 정리하는데도 참 많은 어려움이있었다.
나는 20년전 활동가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시도하였다. 불과 20년 전의 일이지만, 사람들의 기억이 일치하지 않는 곳이 너무 많았다. 기억하는 과거중에는 이미 '역사'가 아니라 '서사'가 되어버린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기록물 하나만 발견되어도 그것이 사실을 정확히 기록으로 남기는데 아주 중요한 근거자료가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잘 안다. 이 정도 기록을 정리하는데는 어마 어마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책을 읽는 이들은 마치 지은이가 소주잔을 마주놓고 자신의 무용담을 주저리 주저리 풀어내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꼈을지 모르지만, 글을 쓴이는 많은 이들의 실명을 담아서 사실을 기록으로 남겨야하는 많은 부담을 안고 있었으리라
지은이의 탁월한 기억과 지인들의 증언으로 엮어진 이 책은 1970년대, 80년대 한국의 노동운동사를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실감나는 문장으로 정리하였다는 점에 있어서도 큰 성과라고 생각된다.
책을 읽는 동안, 탁월한 감각을 지닌 어떤 영화감독이 이 책을 읽는다면, 영화로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얼마전 마산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서 조희연 교수로부터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과제는 세대를 잇는 일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 나는 87년 6월 항쟁에 4살베기 꼬마였던 후배와 함께 토론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토론회를 마치고 나오며 "솔직히 모르는 이야기가 많았다"고 틀어놓았다. 이 책이 나와 그 후배 사이에 세대간의 간극을 메우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