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시대
채영주 외 6명 지음 / 문학동네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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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든, 예술이든, 우리를 이끌어가는 기원은 유년과 청년 시절에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책. 멀리 떠나올수록 또렷해지는 그날들. 여타의 장식이 필요없는 소설가의 맨살이 참 아프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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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인간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50년 독서와 인생
오에 겐자부로 지음, 정수윤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체험, 사고, 독서가 어우러져 대작가를 이룬다는 진리를 다시금 일깨우는 책. 세상의 모든 읽는 인간, 그리하여 깊이 사는 인간에게 경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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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W 엄마가 콩국수를 해주겠다는 말을 그냥 무심코 흘려들었다. 집에서 직접 콩을 갈아 만든다는 것. 비지가 나오면 찌개를 끓여먹는다는 것. 언니한테 꼭 한번 해주고 싶다는 말을 그냥 고맙게, 즐겁게 들었던 것 같다. 퇴근 후 유치원 가방을 든 채 영달이를 따라 놀이터로 터덜터덜 걸어오던 나에게 처음엔 머뭇머뭇 말을 못 붙이더니 나중에는 자신이 학창시절에 얼마나 골 때리는 학생이었는가를 열렬히 토로했고 그 솔직한 웅변이 재미있어서 그녀의 이야기를 즐겨 들었더랬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살피다가는 엄마, 라는 부름이나 으앙, 하는 소리에 벌떡벌떡 튀어 나가곤 하는 네추럴 본 엄마들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가 짬짬이 들려주는 사연들이 마냥 재미있었다.

 

그리고는 W 엄마가 점심 초대를 한다는 이야기를 Y의 엄마로부터 전해 듣고 한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게 생긴 W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며 잠시 망설였다. 우리는 함께 물놀이장에 갈 예정이었기에 물놀이를 마치고 나서 바로 점심을 준비하여 우리를 초대한다는 게 나로서는 상상만 해도 힘에 부치는 일. 물놀이를 마치면 빨래거리가 줄줄이 나올 것이고 아이를 깨끗이 씻겨야 할 것이며 이 더위에 육수를 뻘뻘 흘리고 나서 다시 음식을 만들기 위해 불 앞에 선다는 것이 끔찍한 일일 터. 내 식구야 평소 나 하던 식대로 먹이면 그만이라지만 남을 불러서 밥을 먹인다는 것이 나에게는 큰 부담처럼 여겨졌다. 그래도 W 엄마는 꼭 오라는 말을 잊지 않았고 나는 냉장고를 열어 아직 손 데지 않은 새 반찬인 오이도라지무침, 볶음고추장을 챙겨서 W의 집으로 갔다.

 

W 엄마는 갓 헹구어낸 뽀얀 소면에 시원한 콩국물을 부어주며 맛있게 먹으라 했다. 그새 고기도 삶았는지 초들초들하게 삶아진 돼지고기, 부추무침, 양념쌈장, 내가 가져온 오이도라지무침 등을 펼쳐놓고 엄마 셋, 아이 다섯이 오붓하게 점심을 먹었다. 소박하지만 황송한 밥상. 정작 본인은 수저를 뜨는 둥 마는 둥 하며 허기진 동네 언니들이 부지런히 국수발을 건져 올리고 콩국물을 후루룩 쩝쩝대는 것을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근처 사는 친정엄마로부터 새로 담은 김치, 갓 만든 맛스런 반찬들을 날름날름 얻어다 먹고 있는 나는 W네 묵은 김치를 보자 어쩐지 송구스러워 이거 등갈비 넣고 찜해 먹으면 맛있겠다, 볶음고추장은 만능이니 떡볶이도 해먹고 그래, 괜한 참견질을 해대며 너스레를 떨었다.

 

함께 사는 남자를 지상 최고의 배필로 알며 매일 아침 꼬박 삼십분씩 걸어서 병든 친정엄마를 보살피러 가는 사람. 암병동 아이들을 위해 머리를 기르고 무리한 선행학습을 시키는 건 학교와 선생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가르치는 사람. 그 흔한 토마토나 오이마저 얹지 않고 말갛게 국물과 소면 그대로 담아 내어온 그녀의 콩국수가, 고지식하게 담백했던 그녀의 음식이, 그녀를 닮아 있어 참 좋았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으려는 찰나, 전화가 왔다. 남은 콩국물과 콩비지를 주러 오겠단다. 안 그래도 된다 했는데 고집이 쇠심줄 같아 결국 내려갔다. 아까 내가 가져갔던 반찬통에 하얀 콩국물과 인절미 같은 콩비지가 담겨 있다. 그새 옮겨 담고 그 자리에 새것을 담아 왔다. 점심 맛있게 잘 먹었다, 오늘 너무 수고했다, 아이들 개학하면 우리끼리 편안히 점심 먹자, 내가 산다, 하고서는 빠빠이 하여 보냈다. 한 덩치 하는 사람인데 돌아서며 보이는 등판이 어쩐지 애잔하다. 현란하고 느끼한 위선과 허영의 시대, 누가 무어라든 소처럼 묵묵하게 제 갈 길 가며 엊그제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다시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그녀의 태도가 참 든든했다. 자주 찾아오는 우연은 아니지만 자기 비호, 타인 비하로 들끓는 집단의 생리에서 저만치 비껴서 있는 사람을 만나서, 알게 되고,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이젠 거의 행운처럼 느껴진다. 찬탄과 아집 안에 갇혀 지내는 무리들로부터 빠져 나와 새벽 공기마냥 쨍하니 시원한 인간들을 접한다는 것도 하나의 낙이라면 낙인 셈. 그럼에도 동네 언니들을 알게 되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너무나 행복하다는, 착한 W 엄마. 누군가 무슨 말을 하면 어느 날은 목이 아플 정도로 연신 고개만 주억거리고 이따금씩 까칠한 언사로 산통을 깨버리는 바보 같은 내가 좋았다니. 빠듯한 육아와 소신 있는 삶 속에 그녀의 피로와 외로움이 묻어난다.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그녀의 이름을 모른다. 나 역시 언젠가부터 직장을 벗어나면 영달이 엄마라는 호칭이 익숙하지만 우리에게는 엄연히 이름이 있지 않은가. 다음에 만나면 이름을 물어보고 내 이름도 알려줘야겠다. 아침 일찍 병원에 다녀오는 길. 둘째가 탄 유모차를 끌고 감기에 걸렸다는 첫째를 앞세운 채 이글이글 타오르는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그녀의 모습에 활짝 웃어보였지만 구슬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과 뒤돌아보다 마주친 그녀의 등이 또다시 애잔하고 어른어른하여, 나 자신 부실한 몸뚱이 걱정은 차치하고 씩씩하게 잘 살아가는 그녀 생각을 잠시 했더랬다. 나이를 먹는 건지 공연히 오지랖이 뻗친 건지 사람이든, 삶이든, 일이든, 뭐든지 오래 생각하거나 깊이 알게 되면 남는 건 어쩐지 슬픔뿐이네. 그래서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마음으로 가만가만 노래만 부른다.

 

새벽공기를 가르며 나르는

새들의 날갯죽지 위에

첫차를 타고 일터로 가는 인부들의

힘센 팔뚝 위에

광장을 차고 오르는

비둘기들의 높은 노래 위에

바람 속을 달려 나가는 저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에

사랑해요, 라고 쓴다.

 

피곤한 얼굴로 돌아오는

나그네의 저 지친 어깨 위에

시장어귀에 엄마 품에서 잠든 아가의

마른 이마 위에

공원길에서 돌아오시는

내 아버지의 주름진 황혼 위에

아무도 없는 땅에 홀로 서 있는 친구의

굳센 미소 위에

사랑해요, 라고 쓴다.

사랑해요, 라고 쓴다.

 

수없이 밟고 지나는 길에 자라는

민들레 잎사귀에

가고 오지 않는 아름다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소녀의

겨울 밤차 유리창에도

끝도 없이 흘러만 가는 저 사람들의

고독한 뒷모습에

사랑해요, 라고 쓴다.

사랑해요, 라고 쓴다.

사랑해요, 라고 쓴다.

사랑해요, 라고 쓴다.

 

- 시인과 촌장, ‘사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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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8-05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면서 내내 아, 깐따삐야님 돌아오셨네, 오셨네, 했어요. 아침 간식 준비해두고 읽으면서 다시 읽고 싶은 글이에요. 제가 비록 사무실이지만 말이에요.

여름, 잘 보내고 계세요? 아까 회사 출근하는 길에 걸어오는 데 갑자기 비가 내리더라고요. 조금씩 내려 그냥 맞고 사무실에 도착했어요. 영달이도 깐따삐야님도 그리고 좋은 이웃도, 이 여름 잘 보내세요.

깐따삐야 2015-08-05 20:27   좋아요 0 | URL
그래도 종종 들어와 다락방님 글도 잘 읽고 있어요. 알라딘에 오면 서재 마을 언니인 다락방님이 건재하니 건필하고 계셔서 항상 든든해요.

봄, 가을은 짧아지고 여름, 겨울은 자꾸만 길어지는 이 기후가 저는 참 힘드네요. 그래도 더울 땐 덥고 추울 땐 추워야 제맛이라는 화끈한 영달이 덕분에 본의 아니게 여름을 만끽하고 있어요. 다락방님도 좋은 사람들과 귀여운 조카들과 이 여름, 건강하게 나시길 바래요!

웽스북스 2015-08-05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다! 조곤조곤 깐따삐야님 글 너무 좋아요. (제 닉네임 보고 누군가 제가 글 속의 분이 서재 오신 걸로 착각할 수도 있겠네요!)


깐따삐야 2015-08-05 20:32   좋아요 0 | URL
저 빨간 우체통의 이미지가 정말 오랜만이네요. 보고 싶었어요.^^
건강히 잘 지내고 있는 거죠? 좋은 책을 꾸준히 많이 읽는 것 같아 부러워요. 나는 어째 모든 것에 점점 감을 잃어가는 것 같아요. 에구~

 

주변 사람들에게 익숙해지거나 질려갈 무렵이 되면 어김없이 방학이 찾아온다. 몇몇 동료들은 출석 연수도 신청하고 그간 못 만났던 사람들과 회포를 풀 예정인가 본데 나는 그저 한없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혼자 있고 싶었다.

 

방학 시작과 동시에 일찌감치 근무조를 마쳤고 아름다운 가게로 보낼 물품들을 정리했다. 곧이어 알라딘 중고샵에 판매할 책들을 켜켜이 쌓아두니 어느만치 홀가분해진 느낌. 영달이는 다음주부터 방학이라 오늘은 유치원에 갔다. 유치원을 마치면 집에 돌아와 간식을 먹고 조금 쉰 후에 놀이터에 나가 원없이 놀다 온다.

 

놀이터에서 얼굴을 익힌 엄마들은 내가 선생이라는 이유로 대단한 노하우라도 감추고 있는 건 아닐까, 이것저것 물어오지만 뭐가 있을 턱이 있나. 오히려 육아에 대한 자세 및 유용한 팁을 얻는 것은 내쪽이다. 이따금 젊은 엄마들의 우렁찬 주장들을 듣다 보면 다들 저렇게 자식 잘 키우고 싶어 혈안이 되어 있는데 교육현장이나 나라꼴은 왜 이럴까 싶다가도 또또 인간에게 하릴없이 기대를 건다 싶어 마음을 접곤 한다. 삼십대 중반에 처해 있는 지금, 나 자신을 포함 모든 것을 향한 환멸과 싸우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이 환한 빛을 뿜으며 어울려 노는 모습을 보면 경이롭다. 분명 내가 지나온 시간일텐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나뭇잎 한 장, 돌멩이 한 덩어리를 가지고도 수억년 전을 상상하고 수억년 앞을 희망한다. 무궁화꽃 한 송이를 보고도 자신만의 비밀 동화를 풀어내고 흔하디 흔한 나뭇가지 두 개로도 새로운 역할을 꾸며낸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놀이시설 하나에 다 올라타고는 먼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이 되기도 한다. 종종 놀이터에 나와 아이들에게 과자를 풀어주며 흐뭇하게 미소 짓고 계신 백발의 할머니, 무더운 여름날이지만 아이들의 소음과 열기가 그리운 할머니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사춘기도 아니련만 내면에서 솟구치는 분열로 미칠 것 같다가도 누군가 따듯하게 건네는 말 한 마디, 무심코 흘린 말을 기억했다가 나누어먹는 음식, 아이들의 해맑은 함성 소리, 상념으로 끈적한 이마를 시원하게 헹구어주는 바람, 쨍하니 귓전에 울리는 친정엄마의 건강한 꾸지람... 그렇듯 소소한 것들로 위안을 받고 다시 버텨나갈 힘을 얻는다. 약간의 시간 차와 개인 차가 있을 뿐, 결국 내가 아는 것들은 남들도 이미 다 아는 것이거나 알게 될 것이라는 부질없음이, 그 부질없는 깨달음이 도리어 서늘한 용기를 준다. 체념의 두번째 뜻이 '도리를 깨닫는 마음'이라고 나와 있는 것을 보면 나를 괴롭히는 분열증의 해답은 이미 정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결국 비슷하다면 내 나이 즈음에 남편도 참 힘들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가 말했을 때, 말을 걸어왔을 때, 나는 영달이가 너무 어렸던 탓에 경청하지 않았거나, 못했다. 남편의 선명한 말보다 영달이의 무언의 몸짓이 더 중요한 시기였다. 이럴 때 그는 남자고, 아빠니까 괜찮았을 거라고 얼버무리기엔 석연치 않다. 그가 힘들다고 했을 때 엄마인 나보다 당신이 더 힘든가, 나는 앞으로 더 힘들어질 예정이니 나한테 그딴 말 걸지 마시오, 하는 차가운 눈빛을 쏘아주진 않았던가. 그때 그 남자는 혼자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식으로 단념했기에 지금 저런 얼굴을 하고 다닐까. 어쩌면 내가 주장하는 나보다 나와 같이 살아온 저 남자가 나를 더 잘 아는 건 아닐까.

 

그렇듯 요즘은 무심한 듯 일상을 조율하고 근근이 관계를 엮어나가는 사람들을 경외심을 갖고 바라보게 된다. 기본적으로 삶과 사람에 대해 막연한 공포를 갖고 사는 나같은 인간에게 그들은 창조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상의 반복, 또는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사건들을 무척 잘 견디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묵묵하고 인내심 강한 그들을 숙주 삼아 물적, 심적 호사를 누리며 잘난척 해왔던 내가 마치 고급 기생충은 아닌가 싶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살아가는 데에는 신선한 감성 뿐만 아니라 반복적으로 다져진 근육이 더욱 절실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는 요즘이다.

 

방전된 몸과 마음을 추스리고 새로운 날들을 준비해야 하는 방학. 아이들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격려와 치유가 필요하다. 학교에 갇혀 있는 동안 함께 갇혀 있었던 생각들을 풀어내고 자연의 여유로운 기운도 받아와야겠다. 내 안의 숱한 상념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나에게는 시간이 있고 그 시간의 가치가 새삼 고마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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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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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돌처럼 묵묵하고 정직한 사람. 나는 그보다 훨씬 다층적이고 다면적이지만 인간의 원석, 인생의 원형 같은 부분이 그에게 있다. 그 진실이 참 슬프다. 부질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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