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코네 국립공원에서 찍은 후지산
비행기가 간사이 국제공항에 착륙한다는 기내 방송이 흘러나올 때까지만 해도 마치 이웃 동네에 잠시 놀러오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일본은 지리상으로 우리와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고 첫눈에 내려다 보이는 오사카의 전경이나 기후 또한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일본에서 한국인이 가장 많이 거주한다는 일본 제 1의 상업도시이자 물류도시인 오사카는 비교적 활기가 넘치고 시끌벅적한 동네였다. 나중에 들르게 되는 다른 도시들에 비하면 말이다. 오사카 이후에 만나본 일본의 도시들은 대개 조용하면서도 한산했고 오가며 마주치는 사람들의 태도 또한 상당히 다소곳하고 조심스러웠다. 나중에 가이드로부터 외부 침입보다는 내부 충돌이 많을 수 밖에 없는 섬나라이기 때문에, 고대 사무라이에서 현대의 야쿠자로 이어지는 칼의 문화가 남아있기 때문에 서로간의 ‘화(和)’를 중시하다 보니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렇듯 예절바르면서도 조심스럽게 조성될 수 밖에 없었다는 설명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오사카 시내로 진입하여 일본식 도시락인 오벤또로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가장 먼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후 3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완성했다는 ‘오사카성’으로 출발했다. 원래 외모상으로나 출신 성분 상으로나 콤플렉스가 많았다는 임진왜란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화려함으로 감추려는 듯 웅장한 건물 여기저기에 다소 조잡스러워 보인다 싶은 금박을 입혀 놓았고 성 둘레에는 ‘해자’라는 호수를 만들어 외부의 침입을 철저하게 막아놓았다. 일본이란 나라처럼 오사카성 또한 물로 둘러싸인 하나의 섬 같았다.
이어서 우리가 두 번 째로 들른 곳은 교토의 가장 인기 있는 명승지 중의 하나라는 ‘청수사’였다. 아름답고 정교한 단청에 안정되고 우아한 멋이 있는 우리나라의 불국사나 법주사의 본당 건물에 비하면 다소 단조롭고 밋밋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 아쉬움이 들었지만 청수사에서의 재미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 곳엔 ‘지주신사’라는 돌이 있었는데 눈을 감은 채로 이 쪽 편 돌에서 저 쪽 편의 돌까지 걸어가서 돌을 만지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설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했다. 쑥스러워하는 학생들을 뒤로 한 채 결혼 적령기에 다다른 내가 용기 있게 도전, 엄청난 집중력을 가지고 돌을 만지는 쾌거를 이루면서 2006년 올해 뭔가 좋은 일이 생기리라는 설렘을 잠시 느꼈다. 그리고 언덕의 세 군데에서 흘러 나오는 사랑의 물, 학문의 물, 건강의 물까지 마셨으니 아주 복이 넘치는 한 해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2005년 작년 한 해 동안은 개인적으로 불운한 일들이 많아서 힘들었는데 일리가 있든 단순히 미신이든 돌을 만지고 물을 마시면서 왠지 액땜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청수사에서 내려오는 길목의 기념품 가게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무엇이든지 조그맣고 예쁘게 만들기를 좋아하는 일본인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아기자기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도자기와 수예품들이 매우 많았다. 한편, 여행 첫날 이후 다른 사찰에도 들르게 되지만 일본 사람들 점 치는 것을 상당히 좋아해서 사찰 곳곳에 점집이 번성해 있었고 각종 부적을 파는 가게도 성업 중이었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일본에는 800만이 넘는 귀신이 산다고 하는데 화산과 지진의 위험 속에 사는 불안한 지형학적 이유, 섬나라라는 고립된 조건이 일본인들로 하여금 믿을만한 무엇인가를 계속 갈구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했다. 종교도 다양해서 장례는 납골당에 목뼈를 보관하는 불교식으로 하고 결혼은 예배당에서 기독교식으로 하고 어려운 일이 있거나 바라는 일이 있으면 신사참배를 하는 등 일본인들은 그 때 그 때 편리하게 신토, 크리스트교, 불교를 포용하며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종교관에 있어서 상당 부분 융통성이 없고 서로 배타적인 우리나라와는 크게 대조를 이루는 부분이었다.
해가 빨리 뜨고 빨리 지는 일본은 오후 여섯 시 즈음이 되어가자 그새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지진 때문에 전광판에 대한 규제가 심해서 일본 시내의 저녁은 우리나라의 새벽 무렵보다도 더 어둡고 조용하게 느껴졌다. 일본 기생인 게이샤들이 남아 있다는 고급 술집을 지나치고 캄캄한 시내를 통과하여 우리는 교토의 한 식당으로 이동해 일본식 샤브샤브를 저녁으로 먹었다. 청양고추나 고춧가루로 매콤하게 육수의 간을 하는 우리나라식 샤브샤브와는 맛이 전혀 달랐다. 일본식 간장, 즉 왜간장은 짭짤하면서도 달콤했고 왜간장으로 맛을 낸 샤브샤브는 시원하고 얼큰하기보다는 간간하고 담백한 맛이었다.
첫날의 바쁜 일정을 마치고 교토의 도큐 호텔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우리가 가장 먼저 간 곳은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다른 곳을 다 생략하고도 이 곳만은 몸소 보고 갔다는 ‘금각사’였다. 연못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금각사는 일본 여행 중에 보았던 많은 건축물 중에 단연 최고였다. 여러 사찰을 돌아다니며 황금 불상은 많이 보았어도 누각의 사방을 모두 번쩍거리는 황금을 입힌 사찰은 처음 보았다. 일본인들은 무엇보다도 금을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왠만한 건축물에는 거의 다 금박을 입히거나 금칠을 해놓았거나 금장식을 해놓았다. 우리나라에 비해 훨씬 단순하고 소박해 보이는 주택이나 좁다란 도로가 두드러지는 것에 반하여 일본의 고대 건축물들은 대개 크고 웅장하고 화려했다.
금각사를 둘러본 후 ‘나라’로 이동해 호리병 벤또로 점심식사를 마치고 곳곳에 사슴이 뛰노는 동대사로 향했다. 15M의 금동좌불상을 볼 수 있는 세계 최대의 목조건물이라고 알려진 동대사는 일단 규모 면에서 보는 사람을 압도했지만 뭐니뭐니해도 동대사의 구경거리는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는 사슴들이었다. 일본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에도 사슴신이 등장하지만 사슴은 일본인들이 매우 신성시하는 동물이라고 한다. 동대사의 사슴들은 인간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먹거리를 들고 있는 인간들 곁으로 와서 친근하게 구는 등 예상했던 것보다 붙임성이 좋았다. 학생들은 사슴의 먹이가 될만한 과자를 사서 먹여주고 던져주고 뿌려주고 하면서 다들 즐거워했다.
동대사 관람을 마친 후 그 다음으로 들른 곳은 일본 최초의 신궁으로 알려진 ‘이세신궁’이었다. 이세신궁 주변으로는 곧고 시원하게 뻗은 삼나무들로 이뤄진 숲이 있었는데 토토로도 튀어나오고 사슴신도 나올 것 같은 시원하면서도 으스스한 숲이었다. 우리가 갔던 날은 마침 일본의 춘분이어서 일본인들이 이 곳에 와서 신사참배를 하며 한 해의 복을 기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정으로 피곤한 여행객들의 원기 회복과 소화를 돕기 위해 원래 속에 들어 있어야 할 앙꼬를 찰떡 겉에 입혔다는 적복떡(붉은 복떡)과 이 곳의 유명 특산품 중의 하나라는 새우과자를 먹고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올라 도바항으로 갔다. 그 곳에서 이세완페리 훼리를 탑승, 국토가 긴 나라답게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기후와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며 메론으로 유명하다는 아쓰미 반도로 이동했다. 실제로 그 날 저녁 호텔 뷔페에서는 맛있고 싱싱한 메론과 메론빵을 먹을 수 있었고 해변에 면하고 있는 호텔의 위치 덕분에 다음날 아침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일출을 감상할 수도 있었다.
이어서 여행 사흘 째, 이 날은 이번 여행 코스의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좋았다. 우리나라의 KTX도 같은 신간센을 탑승, 후지역에 도착한 우리 앞에 흰머리 독수리 같은 후지산이 환하게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후지산에 사는 여신은 질투가 심해서 미인이 오면 절대 자태를 드러내지 않는다면서 못 볼 수도 있으니 너무 아쉬워 말라고 당부했으나 같이 간 남학생들의 근사한 외모 덕분에 후지산의 여신도 결국 우리 남학생들 인물을 보느라 자태를 드러내고야 말았다. 3776M의 거대 휴화산이라는 후지산은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아름다웠다. 그런데 실제로 가까이에서 보면 화산답게 숭숭 구멍이 뚫린 못난 모습이라서 일본에서는 겉보기엔 근사한데 막상 사귀어보면 별로인 사람을 가리켜 ‘후지산같은 사람’이라고 비하하기도 한단다.
차창 밖으로 후지산을 감상하고 다시 삼나무로 빼곡히 둘러싸인 하코네 국립공원에 들러 오와쿠다니 온천물로 찐 쿠로다마고(검은 달걀)을 먹었다. 화산지대라서 유황 냄새가 풀풀 풍기는 언덕에서 한 개 먹으면 7년을 더 장수한다는 계란을 먹으며 저 편으로 바라뵈는 후지산을 감상하고 있자니 일본에 왔다는 것이 확연히 실감이 나며 괜히 뿌듯하고 감격스러웠다.
고원을 내려와 유람선을 타고 칼데라호인 아시호수를 30분 정도 유람한 다음 우리 일행은 드디어 일본의 심장 도쿄로 이동했다. 도쿄에 접어들자마자 보아의 앨범을 홍보하는 커다란 광고판이 보여 일본에서의 보아의 입지와 인기를 실감하며 반가움을 자아냈다. 동경 도청에 도착한 우리는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45층으로 이동, 지상 202M의 전망대에서 도쿄 도내를 한 눈에 내려다보며 도쿄 전역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과는 달리 동경은 끝도 안 보일만큼 넓은 허허벌판에 크고 작은 건물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는 전형적인 현대 도시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도청을 빠져나온 일행은 신주쿠 거리를 구경하며 유명 한식집에서 해물탕을 저녁으로 먹었다. 우리나라에서 연예인이나 유명 인사들이 오면 꼭 한 번 들른다는 맛집으로 식당 내에는 우리 일행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식을 시켜먹고 있는 일본인들이었다. 젓갈을 사용하지 않고 담근다는 라면 스프 맛이 나는 일본식 김치와는 차원이 다른, 우리식 김치를 맛볼 수 있었던 곳이었다. 식당 주변에는 우리나라 물품을 파는 가게들도 많이 있었다. 가게에 설치된 모니터에서는 비와 세븐이 춤을 추며 노래를 하고 있었고 밖에 내어놓은 진열대에는 배용준 열쇠고리나 핸드폰줄을 쉽게 구경할 수 있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인이었고 성업 중인 가게들을 보면서 대중매체에서 이야기하던 한류열풍의 단면을 볼 수 있어서 반갑고 뿌듯했다.
호텔에 투숙하여 도쿄에서 하룻밤을 쉬고 여행 나흘째, ‘닛코를 보지 않고는 일본의 아름다움을 말하지 말라’는 명언이 있을만큼 아름답다는 닛코 국립공원으로 이동했다. 꼬불꼬불한 S자 곡선의 좁다란 길을 버스로 이동하며 눈덮인 남체산을 구경하고 산 허리에 나와 노는 원숭이들의 모습도 구경했다. 이 곳에서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 유산이자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신 신사인 ‘동조궁’과 ‘쥬젠지 호수’를 구경하고 ‘게곤폭포’에서 단체로 기념촬영을 했다. 특히 99m 높이의 절벽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로 이루어진 게곤폭포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꽤 쌀쌀했던 날씨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폭포가 얼지 않아서 우리 일행은 물이 떨어지는 시원한 모습을 제대로 구경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 천황의 별장이 있다는 일본 최대의 별장지대 나스로 이동해서 노천 온천을 즐겼다. 우윳빛이 나는 뜨거운 유황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시원한 머리를 들어 별을 구경하며 집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했다. 하루 종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피곤했던 몸이 부드럽고 따듯해지면서 딴딴하게 뭉쳐 있었던 어깨와 다리의 근육도 시원하게 풀리는 느낌이었다. 온천을 하면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가족동반으로 다시 한 번 나스에 오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일본은 예부터 혼욕이 일반화되어 있어서 아주머니들이 사이 사이 남탕에 청소를 하려고 들낙거리는 풍경이 전혀 이상한 게 아니라는 가이드의 말을 듣고 함께 갔던 남학생들은 과연 온천을 할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를 두고 제딴에는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 날 한 명도 빠짐없이 노천온천을 즐겼고 점점 일본에서의 일상에 익숙해져갈 무렵이 되자 벌써 일정의 마지막 날이 찾아왔다. 우리는 며칠 안 남은 개학을 투덜거리며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센다이 공항에 도착, 4박 5일의 짧은 듯 하지만 꽉 찬 일정을 마치고 우리나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인천 공항에 도착하자 아이들의 머릿수를 세지 않아도 왠지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조용하고 깨끗한 환경에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들, 오미조밀하면서도 고급스런 물건들과 담백하고 맛깔스런 음식들, 일본은 참으로 매력적이고 살기 좋은 나라였지만 익숙한 우리말이 여기저기서 들리고 아줌마들과 아저씨들의 고함 소리를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우리나라에 오니 일단 편했고 활기가 살아나는 듯 했고 그 동안 보고싶었다는 말이 불쑥 나올만큼 괜시리 반갑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일본에 비해 이렇게 유리하고 편안한 환경 속에 살면서도 왜 항상 뒤쳐질 수 밖에 없는가, 하는 아쉬움이 많이 들었다. 섬나라인데다 지형마저 불안해 늘 화산과 지진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일본인들은 척박한 환경에 대비하고 재난을 극복해가면서도 오늘날처럼 경제 대국을 이루었는데 우리는 그 동안 뭐하고 있었나 하는 안타까움. 서로 속을 내비치지 않고 조심해가면서 철저한 개인주의로 살다가도 공동의 목표가 생기면 和를 내세우며 단결하는 모습은 우리가 배워나가야 할 점이 아닌가 싶다. 물론 언론에서도 이야기하듯 소위 왕따라고 불리는 이지메라든가, 날로 변태적으로 변해가는 성문화와 엽기적인 범죄 행각들은 일본의 치부이지만 남의 치부를 욕하는 데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좋은 점을 배우고 그것을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적극성과 부지런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함께 갔던 학생들은 우리 세대에 비하여 왜곡된 편견을 기저에 깔지 않고 훨씬 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자세로 일본을 흡수하고 일본 문화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쿨한 사고방식에 길들여진 신세대는 역사적인 배경에 의해 좌우되기 보다는 지금 현재의 좋고 싫음과 유익함과 무익함에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아이들의 그러한 자세에서 희망을 보게 된다. 우리의 오감을 통해 체험했던 일본은 말 그대로 선진국이었고 소형 승용차의 대중화,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지역별 케릭터 상품 등 곳곳에 배울 점이 많은 나라였으며 원화의 열 배 가까이 육박하는 엔화의 가치는 겉으로는 소박하고 겸손해 보이는 그들이 속으로는 얼마나 실속을 잘 챙기는 알부자인지를 실감하게 해주었다.
우리 아이들이 단무지 한 개에도 추가 비용이 필요한 나라 일본을 체험하면서 참 알뜰하고 실속있다, 혹은 참 감질나고 야박하다, 둘 중 무엇을 느꼈고 무엇을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여행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우리나라를 돌아보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기회가 닿으면 꼭 한 번 다시 가고 싶고 관광이라기보다는 견학의 차원에서 누군가에게 방문을 권해주고 싶은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오늘같이 피곤한 날, 따땃한 유황온천물에 온몸을 푹 담그고 오래오래 쉬어줬으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