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자려고 했는데 잠이 안 온다. 눈도 피로하고 몸도 노곤하지만 눕기가 싫다. 오후에 낮잠을 조금 잔 탓일까. 어차피 오늘 낮잠은 설 익은 밥같았지만.
이미 목록에서 지워버린, 기억 속 어딘가에야 남아 있었겠지만 이젠 왠지 낯설어 보이는 전화번호. 곤히 자다가 울리는 벨 소리에 알람을 확인하듯 부리나케 받은 전화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 사람이었다. 잠시 당황했지만 노래 가사에도 있듯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익숙한 그의 음성에 곧 침착해졌고 평범하게 안부를 물었다. 이젠 아주 가끔밖에 생각나지 않는 사람. 생각이 나다가도 다른 생각에 곧잘 묻혀버리는 사람. 그런 그가 불현듯 넉 달만에 내게 송신을 해왔다.
나도 간혹 그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궁금했다.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거나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다소 심약하고 부드러운 성정의 남자이긴 해도 고집도 있고 나름의 프라이드가 강하니 잠깐 아프더라도 금새 아무렇지도 않은듯 잘 살고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힘이 드는 건 오히려 내가 몇 배는 더 할 것이라고 믿었다. 헤어지고 나서 한동안은 왠일인지 그에게 잘 못 대해준 것만 생각이 나서 매일매일 미안해 하고 마음 아파하면서도 당시의 나는 갖가지 질병이 겹친 환자라는 것. 어쨌든 그가 먼저 이별의 언사를 내비쳤다는 것을 상기하며 단단히 마음을 추스렸다. 꽤 오랜 시간 동안 그를 만나고 그에게 집중하느라 성실하게 연락하지 못했던 다른 많은 친구들과 지인들을 만났고 나를 속박하던 질병들로부터도 멀어졌다. 그 사이 시간은 잘도 흘러주어 벌써 2006년의 입춘이 지났고 나는 올봄에는 바람난 꽃처녀마냥 희희낙락 지내볼 심산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단다. 우리가 데이트를 했던 도시에 매주 내려와 함께 갔던 장소에서 하루 종일 앉아 있다 오곤 했으며 나의 사진이나 내가 선물했던 모든 물건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 땐 꼭 너의 발목을 잡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할 수 없이 놓아주었지만 가슴 아프게 후회한다고, 하지만 그 때의 헤어짐이 반드시 영원한 이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너도 알지 않느냐고 했다. 그리고는 남자친구도 없고 아직 결혼할 마음도 없다는 내게 앞으로 우리가 다시 잘 될 수 있는 가능성마저 접어두진 말기를 당부했다. 확실히 준비가 되면 다시 너를 찾고 싶다고, 너를 데려가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싶다고. 하지만 그 사이 더 좋은 남자가 나타나면 그 사람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라고 했다. 내가 먼저 시집 가는 걸 보고 자기도 결혼하겠다고. 나는 이 대목에서 쓸쓸하게 웃고 말았다. 이제 와서 무얼 어떻게, 라는 착잡한 생각이 드는 동시에 마음 한 켠이 몹시 아파왔다. 여전히 나를 못 잊고 있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에게 나 곧 근사한 남자한테 시집간다고 뻥이라도 쳤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는 긴장하고 안달하는 자신에 비해 차분하고 무덤덤한 나의 어투에 짜증을 내며 이미 상처를 받은듯 했지만 내가 울고불고하며 그를 못 잊겠다고 말해도 더욱 가슴 아파할 사람이란걸 잘 안다. 나는 최대한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행복감을 드러내 주었고 그의 행복을 빌어주었으며 그는 다소 담담해진 분위기로 나에 대해 안심했다. 그럼에도 그는 내가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싶어했고 예전처럼 사랑을 표현해주길 바랬지만 그건 벌써 지나간 일이고 지나간 감정이기 때문에 나는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라고만 했다. 터미널 근처에서 나에게 심한 말을 하고 나를 혼자 버려둔 채 성큼성큼 멀어져갔던 기억이 자꾸만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는 그에게 나는 그런 건 이제 기억도 안 난다고 거짓말을 했다. 추억을 붙들고 있는 건 그의 마음이지만 한 번 끊어진 실을 다시 이어봤자 못난 매듭만 도드라질 뿐. 이젠 너무 늦었다.
나는 그를 정말로 사랑했다. 나의 생활은 학교에 나가는 것과 그를 생각하고 만나는 것. 그 두 가지였다. 그는 내가 그를 사랑해주고 그에게 잘해주었던만큼 자신은 그러지 못했던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나는 아니라고, 돌아보면 나도 미안한 부분이 많다고 말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의 그런 깨달음은 어느 정도 맞는다. 나는 그에게 잘해주었다. 잘해주고 싶었고 잘해주었다. 옆에서 나를 지켜보는 엄마가 혀를 끌끌 차며 속이 뒤집어진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이래저래 표현 방법이 서툴렀던 그 사람도 물론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었다. 누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있고 강아지같은 순수함으로 나에게 충성하고 있음을. 그리고 이기적인 나는 생각한다. 그를 사랑하기만 했던 게 아니라 잘해주길 정말 잘했다고. 적어도 다 지나간 후에 후회하는 시간이 그만큼 적어지지 않았냐고.
어쩜 그 동안 한 번도 연락이 없었냐며 보고 싶지 않았냐고 말하는 그 사람 앞에서 난 또 웃고 말았다. 예나 지금이나 내 앞에서 떼를 쓰는 건 여전하다. 자기도 모르겠단다. 왜 내 앞에만 서면 지금도 얼라가 되는지. 이젠 내가 먼저 연락을 안하면 자기도 연락을 안하겠다고 땡깡을 부리는 그를 보며 '이 남자에게 모성애가 풍부하고 마음이 따숩고 헌신적인 여자를 하나 내려주소서'라고 빌면서 마지막 안부를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미 사랑도 식었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봐도 우리가 헤어진 건 참 잘한 일인 것 같다. 철없는 새끼곰같은 우리들에겐 서로 서로 더 강한 상대가 필요한 법이다. 진심으로 그에게 새로운 사람, 더 좋은 인연이 닿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