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모임에 다녀온 남편에게 남편 친구들의 근황을 물어봤다. 남편은 내 친구들의 근황에 대해 결코 묻는 일이 없지만 나는 남편 친구들의 근황도 무척 궁금하다. 특히 S씨는 남자로서 육아휴직을 했던 흔하지 않은 경우인데다 그집 딸내미가 우리 영달이와 동갑이기에 저절로 관심이 가곤 한다.

"S는 올해 복직하는데 아이를 3월부터 놀이학교에 보내기로 했대."

"놀이학교? 비용이 만만찮을텐데. 통크다!"

나도 놀이학교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 적이 있었다. 지난 여름, 영달이가 어린이집 적응에 실패하고 할머니 품으로 컴백하여 어린이집, 유치원이란 말만 꺼내도 진저리를 칠 무렵, 이런저런 고민을 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놀이학교'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우리 동네와 이웃 동네에 참으로 각양각색의 놀이학교들이 있었거나, 생겨나고 있었다. 국가에서 보육료를 지원하게 되면서 우후죽순으로 들어서는 함량 미달의 보육시설이 마뜩찮은 엄마들이 나처럼 놀이학교를 찾아보고 상담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뭐니뭐니해도 차를 타지 않아도 되는 가까운 곳이 최고라는 생각에 집 근처 놀이학교에 전화를 해봤더니 역시 이곳도 사교육 시설이고 일종의 학원이다 보니 친절하고 상세하기가 이루말할 데가 없었다. 네살부터 받는다길래 반년 기다렸다가 이곳을 한번 생각해봐야지, 마음먹고 있었는데 S씨의 딸내미가 놀이학교에 다닌다니 귀가 번쩍 뜨였다. 

 

성마르기 그지없는 나는 바로 놀이학교에 전화를 해서 상담을 받은 후 조만간 아이를 데리고 방문하겠노라고 했다. 반년 전이나 지금이나 들어가는 비용에 또 한번 식겁했지만 S씨네 부부도 우리처럼 부부교사이긴 마찬가지인데 우리라고 못 보낼 게 뭐 있어, 하는 유치한 허영심이 한몫 거들었다. 남편과 상의라기보다는 경과 보고를 했더니 탐탁찮은 목소리였지만 그닥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듯 한번 직접 가보자는 뜻을 내비쳤다. 나는 갑자기 너무 신이 나서 놀이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해 아이들이 알록달록 화려한 교구를 갖고 수업받는 사진을 흐뭇하게 바라보기도 하고 영달이가 또래 아이들과 반짝이옷을 입고 합동댄스를 하는 등의 장면을 떠올리며 무한긍정표 상상의 나래를 마구마구 펼쳤다. 가계 재정 따위는 이미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한푼도 모으지 않고 몽땅 영달이 놀이학교에 쏟아부을 심산인 마냥 쓸데없는 지출에 대한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그러나 퇴근을 해서 저녁을 먹던 중 나만의 찬란한 계획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역시 이번에도 친정엄마가 몽롱한 내 정신에 아찔한 브레이크를 걸었다. 더 절약하고 덜 모으면 된다는 나의 말에 엄마는 "너는 엄마란 것이 아이 자존심은 안중에도 없냐!"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대체 무슨 얘긴가 싶었는데 내가 지난 일은 까마귀 고기 삶아먹은 듯 잊어버렸고 앞으로 예상되는 일도 전혀 안중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달이는 아직 기저귀도 하고 분유도 완전히 떼지 못한 상태이다. 지난 여름에 어린이집을 다닐 때도 이 두가지 사항이 영달이를 무척 힘들게 했다. 배가 고프거나 볼 일을 보고 싶을 때 알아서 챙겨주거나 도와주는 엄마, 아빠, 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이 영달이를 불안하게 했고 그 불안함은 한밤중에 혼자 깨어나 통곡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안타까운 한편 다른 집 아이들과 비교해가며 안달했지만 친정엄마는 "설마 중학교에 다니면서까지 기저귀 하고 젖병 물고 다니겠니." 담담하게 응수하시며 어린이집을 관두게 하셨다. 그리고는 "너도 다섯살 때까지 기저귀 하고 젖 먹었다는 걸 모르냐."며 잘난척 하지 말라는 투로 면박을 주셨다. 나도 질세라 "나는 영달이도 중요하지만 엄마도 중요해. 엄마 건강이 자꾸 안좋아지니깐 내가 너무 속상하잖아." 속마음을 쏟아내곤 울컥했지만 "내가 만약에 아파서 아이를 못 봐주면 네가 직장 그만둔다는 각오로 아이를 키워야지. 소신 없이는 절대 아이 잘 키울 수 없는 줄만 알아라." 하는 말씀에 쪼르르 꼬리를 내렸다.

 

남편은 장모님 말씀이 전적으로 옳아서인지, 허황된 지출을 미연에 방지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삐질삐질 의뭉스런 미소를 흘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밥을 꾸역꾸역 우겨넣으면서도 놀이학교는 일반 어린이집이과는 다를텐데, 영달이가 오전반만 다녀도 엄마가 조금 덜 힘드실텐데, 영달이도 놀이학교에 가서 놀면 더 즐거울텐데... 갖가지 아쉬움이 남았지만 앞으로도 지겹게 오래 다닐 학교인데 뭐가 그리 급하냐고, 때가 되어 제가 간다고 할 때 보내도 늦지 않다는 엄마 말씀에 동의하며 놀이학교에 대한 미련을 접는 대신 엄마를 향한 미안함과 고마움에 마음이 무거웠다. 오가는 이야기에 눈치를 챘는지 오늘 아침 영달이는 할머니 품에 안겨 출근하는 나를 쿨하게 보내주었다. 

 

출근하여 커피를 마시다가는 어제 엄마가 말씀하신 아이의 자존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영달이가 뭔가 실수했을 때 영달이 혼 좀 내라는 식으로 남편에게 고해 바친 기억, 영달이가 듣고 있는 상황에서 영달이 험담을 주변 사람들에게 했던 기억, 영달이보다 먼저 퍼즐 조각을 완성한 후 혼자 박수치며 좋아했던 순간이라든가 책 제목을 마음대로 꾸며 읽는 영달이에게 글자 하나를 조목조목 짚어가며 다시 말해주던 순간, 그때 살짝 침울해지던 영달이 모습 등을 상기하며 나란 여자가 대체 생각이란 게 있기는 있는 여자인가. 직장 다니는 엄마라고 돈만 써댈 줄 알았지 아이의 자존심을 세심하게 배려해 본 적이 있었던가. 강도 높은 자아비판을 하며 다 식어버린 커피를 씁쓸히 들이켰다. 개성 강하고 고집이 세서 크면서 엄마 마음을 안 아프게 하지는 않았는데 아빠는 물론 친척들까지 죄다 나를 엄청 착실하고 모범적인 인간으로 판단하게 만든 건 이제껏 친정엄마의 속깊은 배려 덕분이었다고 생각하니 고개와 함께 마음까지 숙여졌다. 그렇듯 현명한 할머니 밑에서 자라는 영달이는 참 행운의 아이고 이렇듯 모자란 엄마, 뒤늦게 깨닫고 몸서리치며 후회하는 엄마 밑에서 자라는 영달이는 참 안쓰런 아이다. 자존심 하나로 삶의 온갖 피로를 견디며 꼿꼿하게 살아오신 엄마의 건강이 요즘 별로 좋지 않아 염려스럽고 죄스럽지만 되도록 두번 실수 반복하지 않는 성숙한 엄마가 되어 우리 엄마의 걱정을 좀 덜어드려야겠다. 그리고 우리 딸, 영달이에게도 시시콜콜 재미만 주는 엄마가 아니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튼튼한 엄마가 되어야 할텐데 말이다. 그 어느 때 보다도 갈 길이 참 멀고도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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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5 1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6 1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5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6 1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인 2013-02-06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육아모범 페이퍼로 전시하고 싶어요. @.@

깐따삐야 2013-02-06 10:32   좋아요 0 | URL
타이틀은 '나쁜 엄마의 좋은 예' 정도로 하면 되겠지요.ㅠ 우리 또래 엄마들은 당최 자기밖에 모르고 큰 세대라서 그런지 두루두루 헤아리는 능력이 모자라는 것 같아요. 여기저기서 많이 좀 혼나야 되요.

치니 2013-02-06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추천 백번! 근데 혹시 그쪽 지역에 공동욱아 어린이집은 없는지, 갑자기 궁금하네요. 제 경험상 공동욱아 어린이집이라면 영달이 경우 적응하기가 좀 낫지 않나 싶어서요.

깐따삐야 2013-02-07 11:59   좋아요 0 | URL
들어본 적은 있는데 제대로 알아본 적이 없네요. 치니님 댓글 보니 이것도 한번 생각해봐야겠단 생각 들어요. 요즘 저희 엄마가 방학 동안 버르장머리 없어진 영달이 때문에 저한테 욕을 바가지로 퍼붓고 계셔요.ㅠㅠ

꿈꾸는섬 2013-02-06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니가 넘 멋지세요. 아이의 자존심은 안중에도 없냐~ㅎㅎ아이들 때가 되면 다 잘 하더라구요. 제가 알던 아이는 어린이집에 적응 못해서 놀이학교로 보냈는데, 거기서도 적응을 못 하더라구요. 근데 1년반을 참았다가 애가 준비된것 같아 좀 큰 유치원에 보냈는데 정말 잘 다니더라구요. 아이가 먼저 준비가되면 그 다음부터는 걱정할게 없어지는것 같아요. 힘드셔도 손주 봐주시겠다고 자청하시는 부모님께 더 잘하시면 좋을것 같아요.^^

깐따삐야 2013-02-07 12:0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엄마가 쫌 독특하셔요. 삼십 중반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하루라도 엄마한테 욕을 안 먹으면 뭔가 허전한;; 저야 엄마가 봐주시니 너무 고맙지만 엄마 건강도 염려되고 영달이도 낯가림이 심해서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요. 엄마한테 잘해드리고 싶은데 뭘 바라시는 게 있어야 잘해드리죠. 제가 똑똑하게 살길 바라시는 것 같긴 한데 그게 가장 어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