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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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식간에 읽어내려갔지만 두번은 읽기 힘든 책.

  이것은 주인공 윤영과의 삶과도 같다. 예전에 유행가 가사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다시 살라 하면 나는 못 가요. 윤영은 생존본능에 의해 숨쉴 틈 없이 닥치는 대로 살아낸다. 그러나 본인 삶의 레파토리를 안 후에도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세상의 많은 어머니들에게 마이크를 대고 물어보시라. 아, 다시 살라 하면 절대 못 살지요.

  작가의 메시지는 전작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이 변화없음이, 어쩌면 변화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이가 태어나고 나는 변했다. 잠을 못 자고 밥을 많이 먹게 되었으며 운동하는 시간도 아까워 그 시간을 노동과 잠깐의 휴식으로 보낸다. 내 이름 석자는 어느새 잊었고 영달이 엄마로서 다시 살고 있는 느낌. 점점 힘이 세지고 억척스러워진다. 나는 이런 여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아이를 위해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 위에 엄마 있고 사람 아래 엄마 있다. 그렇듯 엄마라는 존재는 천상과 바닥을 아우르고도 남는 존재이다. 

  윤영이 엄마가 아니라면 이 소설은 성립하지 않는다. 부모와 형제와 남편, 그들을 위한 희생에는 한계가 있다. 나를 버리되, 모두 버리지는 못한다. 관계의 벼랑 끝에 다다른다고 해보자. 에라이. 도망가버리면 그만이다. 그들은 어른 아닌가. 그러나 아이는 다르다.  

  세상에는 고상하고 우아한 모성애와 저급하고 누추한 모성애가 따로 있지 않다. 태생과 여건의 차이일 뿐. 아무개 엄마는 누구에게나 오롯한 고유명사인 것이다. 윤영에게 당신은 왜 그렇게 사나요, 그런 방식으로 새끼를 부양하는 것이 진정 올바른 어미의 길일까요, 그런 질문은 합당하지 않다. 윤영에게는 정신과 육체와 삶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녀는 철없거나 이중적이거나 혹은 위선적인 어떤 여인들마냥 의미와 비유에 기대어 사는 것이 아니다. 생과 맞서 분투하고 살고자 하는 의지로 참아낸다. 누가 그녀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그 동안 한국문학 속 여성들은 어느만치 권태에 빠져 있었다. 나는 무엇인가. 억눌린 감각을 어설픈 지성으로 표출하는 듯한 여인들의 지루한 목소리. 나는 대체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일상의 권태와 환멸 속에서 붙들 수 없는 환영에 휘둘리고 있는 여인들. 다른 한편에서는, 이 힘겹고 징그러운 현실이 차라리 환영이었으면 좋겠다고, 숱한 윤영들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작가는 그 수많은 윤영들을 '주인공'으로 발탁했다. 근래의 소설 읽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그러한 선택은 쉽지 않은 일이며 이례적인 사건이다.

 또한 이 작가는 치열하고 성실한 글쓰기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으로 쪼고 갈아낸 듯한 깔끔한 단문과 오감에 찌릿한 전율을 느끼거나 실제 구토를 느낄 정도로 직접적이고 생생한 표현력이 압권이다. 필연적인 고통과 피로가 뒤따르는, 집중력의 소산이라고 본다.   

  나는 요즘 엄마로서, 아내로서 무척 힘이 든다. 주저앉아 펑펑 울어버리고 싶은 순간도 있다. 이 시간이 꿈처럼 빨리 지나버렸으면, 하고 기다리다가 그리고나면 내게 남는 건 권태일까, 앞질러 우려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하나도 교훈적이지 않을 뿐더러 나에게 무엇을 어찌 하라고 종용하지 않는데도 이상하게 힘을 준다. 자기 위안으로 삼기엔 윤영과 나는 너무 다르고, 그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참으로 질기다 싶은 생의 의지가 소설 전체에 켜켜이 엉켜있기 때문인 듯 싶다. 이 소설을 읽고 주어진 삶 앞에서, 운명 앞에서, 비겁해지면 안되겠다는 비장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 작가의 눈길과 문체에 주목한다. 어디를 바라보고 어떻게 쓰는가. 그 정직성과 성실성에 계속 믿음이 가고 변함없는 응원을 보낸다. 이 나약하고 현란한 시대의 신선한 히로인 윤영과, 비로소 윤영들의 목소리를 찾아준 작가 김이설을 열렬히 환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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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1-08-16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깐따삐야님을 환영해요! :)
이 책 저도 매우 잘 읽었는데, 깐따삐야님의 조곤조곤한 평을 읽으니 더 반갑고 기뻐요

영달이 많이 컸겠어요~

깐따삐야 2011-08-17 10:26   좋아요 0 | URL
웬디양님, 잘 지내고 있죠? ^^
벌써 읽은 지 꽤 됐는데 리뷰를 이제서야 올렸네요. 요즘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어요.

영달이는 걷고, 뽀뽀하고, 장난치고, 떼쓰고... 감사하게도 무럭무럭 잘 크고 있어요. 총기발랄한 웬디 이모를 보면 무척 좋아할텐데 말여요.

레와 2011-08-16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이닷!! 와락!! ^-^

깐따삐야 2011-08-17 10:27   좋아요 0 | URL
아, 반가워요. 레와님!

치니 2011-08-16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환영 3! 그간 육아에 많이 시달리셨던가 봐요. 하지만 행간에서 어미가 된 깐따삐야 님의 힘이 아름답게 읽혀요.
김이설의 이 책은, 리뷰 쓰기가 참으로 어려워서 좋게 읽고도 쓰지 못했는데, 깐따삐야 님 리뷰로 속이 시원해집니다. 참 좋은 리뷰, 고마워요. :)

깐따삐야 2011-08-17 10:34   좋아요 0 | URL
치니님, 정말 오랜만이죠? 저는 요즘 육아전쟁이란 말을 실감하고 있어요. 주변 사람들이 지금이 가장 힘들 때, 라고 정리를 해주더군요. 그래도 영달이가 예쁘니까요.^^

저도 읽고 나서 바로 리뷰를 못 올리고 지금에야 올렸어요. 훌륭한 소설이 많지만 김이설 작가님 소설은 매번 울끈불끈, 하는 생의지를 갖게 해요. 좋은 리뷰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소설을 빌려 푸념을 하고 싶었던가 봐요.